2005년 12월호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 류일엽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5-12-01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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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2004년10월18일, 중국 지린(吉林)성 수란(舒蘭)시 빈관(賓館)에서였다. 작가 김태복(金太福·60· 수란시 조선족 중학교 퇴직 교원) 선생은 수란에 살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하는 중에 불쑥 박재호(朴在浩)라는 이름을 꺼냈다.

    “박재호씨는 원래 우리 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광복 전에는 주타이(九臺)현 경찰서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한 분이고요. 광복 후에는 주타이현 한교회 회장도 맡아 하셨지요. 수란에 와서는 조선족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가 우파(右派) 때부터 별의별 고생을 다 하신 분이지요.”

    김 선생은 자기가 알고 있는 박재호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뒷말은 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나의 한 가지 관심사는 경찰 신분의 독립운동가였다는, 소설 같은 사실이었다.

    “그분이 생전이십니까?”



    나의 물음에 김 선생은 “생전이고 말고요. 지금 여든넷인가 됐을 걸요. 그런데…”라며 긍정 뒤에 시답지 않게 토를 달았다.

    “그런데라니요?”

    나는 다급히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치매가 왔어요. 한 이태 되었을 걸요. 얼마 전에 갔더니 사람을 몰라봐요. 때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가 봅데다.”

    김 선생의 김빠진 소리에 나는 맥을 놓았다. 맹랑한 노릇이었다. 둥베이(東北) 3성(省) 조선족이 사는 곳이라면 메주 밟듯 했다는 소리를 듣는 나에게도 수란은 빈 구석이었다. 지린에서 하얼빈으로 오가면서도 그 중간에 있는 수란은 그냥 지나친 것이 못내 후회됐다. 나의 답사에 대해 세월은 무정한 재판관이었다.

    “그래도 혹시 정신이 맑을 때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때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그런 심정이었다.

    “글쎄요. 그 아들을 불러볼까요?”

    김 선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그러십시다.”

    나의 불 같은 재촉에 김 선생은 작은 수첩을 꺼내어 한참이나 뒤적이더니만 “예전의 전화인데 지금도 그대로 쓰는지 모르겠구만요”라고 반신반의하더니 전화를 걸었다.

    이튿날 박수진(朴守振·53)씨가 호텔로 찾아왔다. 김태복 선생이 말하던 박재호씨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셨고, 광복 후에도 민족사업을 줄곧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산당 천하에서는 죄가 됩디다.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문은 패가망신을 당한 겁니다.”

    박수진씨는 아버지의 과거사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믿기엔 몽롱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수란을 떠나기 전날 박수진씨는 아버지와 관련 있는 자료들을 가져왔다. 그중엔 일본 유학 기간의 일기, 만년에 쓴 자술(自敍)과 광복 전후의 주타이 조선족사며, 그외 여러 가지를 증명할 만한 자료가 포함돼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밤새워 읽었다. 읽을수록 가슴이 뭉클해왔다. 한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의 형상이 머리 한가운데 거연히 솟아올랐다.

    민족의식 싹튼 학교생활

    박재호는 망국 10년 만인 1920년 3월24일생이며 출생지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오기동 삼계리다. 부모대에 계룡산 도읍설(都邑說)에 현혹되어 아버지 삼형제가 모두 가산을 팔아 계룡산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결국 민족독립도 이룩하지 못하고 생계유지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하여 부득불 고국을 등지고 낯설고 물선 중국으로 오게 됐다. 그때가 1923년이다. 몽골 등지를 전전하다 나중에 지린 판스(盤石)현 옌퉁산(烟筒山) 훠사오거우(火燒溝)에 정착했다. 이 마을의 주민은 모두 한족(漢族)이고 조선인은 그들뿐이었다. 말하자면 사면초가 속에서 박씨 일가는 바이장칭(栢長靑) 지주의 토지를 소작 맡아 한전(旱田)을 수전(水田)으로 개답(開沓)했다. 형제 중 부모의 일손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큰아들 재영(在榮·당시 19세)뿐이었다.

    그 마을 부근 시다디(西大地)와 솽먀오쯔(雙廟子)에 한국인 애국지사들이 설립한 민족소학교가 있었다. 박재호는 둘째형 재유(在裕)와 함께 을반(乙班)에서 공부했다. 그때 비로소 그는 단군(檀君) 국조(國祖)를 알았고 태극기를 보았고 애국가도 배웠다. 여기서 그의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10세 미만의 일이니 다만 개념일 뿐이지, 기타 구체적 정황은 잘 알지 못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집에도 다녔고, 백형(伯兄)도 총을 차고 다녔다.

    중국 땅에서 자라는 반일세력은 일본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교묘한 민족 이간책으로 중국 둥베이 군벌의 눈에 조선인이 일제의 앞잡이로 비치게끔 만들었다. 봉계군벌(奉溪軍閥)의 처지에서 보면 조선인이 둥베이와 몽골로 이주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일단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민족분쟁이 일어나면 영사재판권 문제와 연결될 것이고, 조선인이 반일투쟁을 할 경우엔 일본측이 군사도발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잡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주 조선인은 중국옷을 입지 못하고 총기를 휴대하지 못하며 공안국의 허가 없이는 거주하지 못했다. 심지어 1929년 이후엔 조선인 토지경작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다.

    야반도주와 만주사변

    바로 그러한 때인 1930년, 박재호네는 중국인 동네에서 홀로 소작을 하고 있었으므로 솔가도주(率家逃走)했다고 한다. 한밤중 쥐도 새도 모르게 마을을 나와 50리 길을 걸어 옌퉁산에서 펑톈(奉天·오늘의 선양(瀋陽))행 기차를 탔다고 하니 어지간히 급박한 사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펑톈에 이르러 곧장 수용소에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서 수용소라고 하면 당시 펑톈에 주재한 일본영사관의 ‘보호’를 받는 곳임에 틀림없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이 있다. 당시로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두고 하는 비유라 하겠다. 중국 정부의 심사를 건드려, 만주로 이주해 농·공·상업 등에 종사하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자금을 마련하는 조선인을 박해하게 해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멸하려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동시에 수용소를 만들어 각지에서 도망온 조선인을 수용하는 것으로 명줄을 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의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수용소에서 주는 배급은 겨우 연명할 만한 양의 좁쌀과 소금, 무며 감자며 채소 등속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어른들은 날품을 팔고 어린애들은 사탕과 궐련(卷煙) 장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31년 봄, 박재호 일가는 펑톈 서쪽 스리쉬(十里許)에 있는 중양차오(中央橋)로 이주해 벼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수재가 들어 농사를 망쳤다. 하늘도 무심했다. 알몸으로 훠사오거우를 떠난 그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값싼 메밀가루를 사서 가지가지 남새며 나물을 섞어 연명했다.

    그해 9월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9·18 사변’이라 부른다. 바로 그날 일본군은 펑톈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북대영을 습격하고 펑톈거리를 폭격했다. 다음날 아침엔 펑톈을 점령했고, 그뒤 불과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둥베이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일본 관동군의 공격에 패한 둥베이 주둔 중국군은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패전의 분풀이를 하고 그 재산에 대한 약탈로 군비를 보충했다.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찬다’는 식으로 일본군에 대한 분풀이를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온순한 조선인에게 했다. 그 불똥이 박재호 가족에도 튀었다.

    마침 중양차오를 지나던 중국군이 재호의 백형 재영씨를 보고 “조선인은 왜놈의 앞잡이(二鬼子·왜놈은 鬼子이고 조선인은 두 번째 鬼子라는 뜻)”라면서 불문곡직 총을 들이댔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아슬아슬한 찰나에 마을의 중국인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보증하고 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가슴에 시한폭탄을 안은 것처럼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내던 박재호 일가는 끝내 만선척식회사(滿鮮拓植會社) 소속인 선양현 사링둥산바오(沙嶺東山堡)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만 사는 마을로 보통학교도 있었다.

    재호는 근 2년이나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종형과 그는 3학년에, 여동생 옥희(玉姬)는 1학년에 입학했다. 괴뢰 만주국이 서고 둥베이 전체가 일제의 천하가 됐으므로 학교 교육도 완전히 일제의 노화교육이었다. 조선어문 한 과목만 제외하고 모든 학과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일본문 교과서로 수업이 진행됐다. 그러나 교사 중에 숭실전문 출신인 김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는 학생들에게 애국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회의는 7일부터 시작됐다. 둥베이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온 18∼19개 현 조선인 교민회 대표의 모임이었다. 복잡한 상황인 데다 각지 대표들이 저마다의 주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7일간 갑론을박을 반복하다 간신히 연합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회의 기간에 박재호는 대회석상에서 지방 정세 보고를 하는 기회에 주타이현의 현지 실정을 알리고 좌중의 동정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방명록과 취지서, 영수증을 들고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동정금(同情金)을 청했다. 그러나 회의석상에서는 한껏 동정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선양으로 떠날 때만 해도 총회를 통해 교민이 일치단결하면 만난(萬難)을 물리치고 오래지 않아 만주에서 조선인의 평화와 자유가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그러한 낭만을 잃었다. 과연 자유와 평화가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절망이 한 가슴을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48년 4월, 공산당 군대가 지린을 점령하고 뒤이어 창춘도 그렇게 됐다. 그해 11월 선양이 함락되면서 둥베이는 공산당의 천하로 변했다. 이에 앞서 1947년 가을 공산당이 집권한 주타이 일대에서는 토지개혁이 시행됐다. 원 교민회 회장 장용림은 청산투쟁을 맞고 퇴임하고 그 빈 자리를 박재호가 메우게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공산당이 일으킨 계급투쟁의 폭풍은 모든 민족운동을 휩쓸어버렸다. 주타이현 민족해방동맹 이석대(李石大) 주임이 나서서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1948년 8월12일은 박재호에게 생전생후를 통해 가장 큰 일이 생긴 날이다. 아내 신순생(申順生)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은공과 애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으로 확인했다. 부모가 돼보지 않고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의 참뜻을 그는 28세에 이르러서야 체험한 것이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길진(吉鎭)이라고 지었다. 진은 돌림자라서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길자를 선택한 것은 지린성에서 났다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세 살 때 고향을 떠나온 몸이 이국 타향에서 생명의 연장인 아들을 보았다는 뜻이자 모든 풍파는 자신의 대에서 그치고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길하라는 자식에 대한 사랑의 뜻도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식에게 발전된 사회, 평화롭고 자유로운 행복한 사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싸웠다. 그는 사회가 필요로 하면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감격시대

    바로 그러한 때 주타이 교민회 농사부장 우종현이 지린성 농업청 수리국에 임직(任職)을 하고 오래지 않아 인마허농장을 재건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우선 지린시 강북에서 조선인 농호 50여 호와 피란을 떠났던 인마허 10여 호의 주민을 집단이주시켰다. 그리고 조선민족 학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남산학교는 광복 직후 중국인들이 뜯어가버려 터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타이현 조선인 사회는 이른바 약동하는 감격의 시대를 맞은 셈이었다. 박재호는 민족사회의 부름을 받고 민족의 민생문제 해결과 후대 양성을 위해 ‘어리고 귀여운 길진이와 몸이 성치 않은 처를 의식주조차 없는 채 두고’(일기 중에서) 인마허로 갔다. 그는 학교를 꾸렸고 이철우(李哲雨)를 교장으로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중국인과 손을 잡고 중조소비합작사(中朝消費合作社)를 창설했다. 합작사의 주임으로 황재중(黃載仲)을 천거했다.

    후대 양성을 목적으로 한 학교가 가동되고 민족의 생계 보장을 목적으로 한 합작사도 가동되자 박재호는 참군(參軍)을 선택했다. 1949년 4월의 일이다. 그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독립단 경위련(警衛連) 11반·독립연대 경위중대 (11분대)에 편입되어 반장(班長·분대장) 겸 군인회(軍人會) 회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군인생활은 반년에 그쳤다. 결핵을 앓아 퇴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슴 찢는 비보였다. 아내가 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다 병사한 것이다. 겨우 세 살 난 길진이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아들을 안자 길진이는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너무 오래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서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순수한 민족주의자

    박재호는 얼마 동안 일을 놓고 집에서 보양한 뒤 건강이 회복되자 학교에서 교도주임 자리를 비워놓고 모시러 왔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사절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 현의 조선인을 하나로 규합하는 단체를 만드는 사업에 착수했다. 이른바 교민회와 같은 성격의 민족단체였다. 교민회는 국민당의 지지하에 세워진 조직이지만, 이번의 민족단체는 공산당의 지지를 받아서 만들려는 것이었다. 박재호에겐 국민당의 삼민주의든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든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색깔이 무엇인지 가리지 않고 오직 민족에 유리한 것이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순수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1949년에 전 현 조선인 대표대회가 소집됐다. 그런데 회의는 중도에서 막을 내렸다. 처음엔 정부에서도 허가했는데 정작 회의가 진행되자 중지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후에 박재호가 쓴 자서전을 보면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민족조직이 필요했다. 이를 제의하니 우리 민족뿐 아니라 현 당국에서도 지지해 나섰다. 그리하여 전 현 각지 대표들이 참가한 주타이현 조선인 대표대회를 소집했다. 그런데 성 민정청에서 온 사람이 의의를 달았다. 따라서 이(회의)를 중단했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던 열차는 중도에서 멎었다. 통행금지였다. 하는 수 없이 중도에서 하차한 박재호는 단호히 주타이를 떠날 생각을 가졌다.

    때는 1950년 8월이었다. 박재호는 18세에 이사 와서 30세가 되도록 산 주타이를 떠나 수란으로 갔다. 그에게 수란은 낯선 고장이 아니었다. 바로 세 번째로 맞은 처가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박재호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서 결혼을 했으나 잔치 후 7일 만에 첫 아내를 결핵으로 잃었고, 그 후에 얻은 두 번째 처 또한 길진이를 낳고 오래지 않아 병사했다. 그래서 세 번째 부인을 맞았는데, 그녀가 지금까지 그와 수난의 연대를 같이해온 허춘자(許春子·74·평안도 덕천군 태생)씨다.

    박재호는 수란현 조선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맡은 과목은 한어문(漢語文)이었고 학급 담임도 겸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박재호의 등 뒤로는 검은 그림자가 지긋지긋 붙어다녔다.

    학교는 사립이었고 동사회에서 교장을 선출했다. 그런데 1952년 학교에서 선거운동을 할 때 그에겐 선거권이 없었다. 광복 전에 경찰을 지냈고 광복 후에 교민회 회장을 한 전력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법에 호소했다. 수란현 공안국은 전문 인력을 주타이에 파견해 조사한 뒤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는 뒤늦게나마 선민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불과 1년이 못되어 3반5반(三反五反) 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사회주의 개조운동이 시작됐다. 학교는 공립으로 개조됐고, 공산당이 파견한 교장이 새로 부임해왔다. 교장과 박재호는 별다른 갈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두 집 안식구 간의 말다툼으로 인해 두 집 사이는 벌어졌고, 이는 결국 화를 몰아오는 도화선이 되었다.

    문제가 된 전력

    1957년 여름방학에 지린성 내 모든 조선족학교 교원은 옌볜조선족자치주 소재지인 옌지(延吉)에서 열리는 학습반에 참가했다. 말이 학습이지 기실은 일종의 숙반운동(肅反運動)이었다. 말하자면 반우파 투쟁의 서곡인 셈이었다.

    공산당의 정책은 ‘노실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엄하게 처리’하며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면 훌륭한 동지로 된다’는 것이다. 학습반에 참가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실직고했다. 박재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과거사를 낱낱이 고백했다. 그런데 회의측에서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대부분의 선생은 한 달 정도만 ‘학습’을 마치고 돌아갔지만 박재호와 몇몇 사람은 놓아주지 않았다.

    괴뢰 만주국 관공서에서 계장도 했고 경찰서에서 대리서장도 지냈으니 어찌 죄악이 없겠는가? 관공서에 있으면서 백성을 얼마나 괴롭혔으며 경찰서장을 하면서 공산당은 얼마나 죽였는가? 광복 후에도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한교회장을 맡으면서 어떻게 국민당에 일조했는가?

    매일같이 신문이 이뤄졌다. 그러나 하지 않은 것을 어찌 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아니라고 하면 솔직하지 못하다고 책상을 쳤다.

    그는 부정했다. 관공서에 취직한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였고, 경찰에 복직한 것은 항일을 위해서다. 광복 전엔 조선독립선봉대 제1지대장이었으며 광복 후엔 한국독립당 일원으로 한교회를 조직했다. 비록 한국독립당은 한국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정당이고 그 배후세력이 국민당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이끈 주타이현 한교회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에서 절대적 중립을 지켜왔다. 이 모든 것은 국민당 편에 서서 공산당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전란 속에서 허덕이고 굶주리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벌목장 노역

    그러나 박재호의 주장은 회의 조직자의 귀에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이 반복됐다. 그들은 어르기도 하고 을러메기도 했다. 시달리다 못한 박재호는 회의측의 요구에 응해버렸다. 끝내 그들이 만들어낸 허위의 역사를 승인한 것이다.

    “사람이 사노라면 착오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감추면 일생을 불안 속에서 살고 그것을 침통하게 깨닫고 새출발을 한다면 마음 편한 날을 보내게 됩니다. 당의 정책은 종래로 탄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석 달을 시달리고 나서 박재호는 귀가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불안했다. 회의 책임자가 싹싹한 태도로 보내준 것이 아무래도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우파분자에 역사반혁명분자라는 죄명을 얻게 됐다.

    그는 공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어느 날 수인차(호송차)가 와서 다짜고짜 잡아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는 식구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옷도 입던 그대로였고 신도 신던 그대로였다. 덕지덕지 기운 옷과 뒤축이 닳아 발바닥이 땅에 닿는 신이었다. 그러나 바꾸어 입을 옷도 신도 없었다.

    압송되어 간 곳은 지린성 후이난(輝南)현의 깊은 산 속 벌목장이었다. 성내 각지에서 각양각색의 죄명을 쓴 정치범들이 모였다. 가혹한 노동 개조를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너나없이 법적인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계급의 적들은 여지없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철퇴로 족쳐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논리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모든 반동적인 것은 치지 않으면 거꾸러지지 않으므로 무자비하게 족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죄범’들은 허약한 박재호를 아껴서 도끼로 나뭇가지 따는 일을 맡겼다. 그러나 그것조차 그에겐 엄청난 고역이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온몸이 산처럼 무거웠고 일을 마치고 저녁에 산막으로 돌아올 때면 천근 추를 달아맨 듯 발이 무거워 문턱을 넘기가 어려웠다. 몸이 건장한 ‘죄범’들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야 그는 간신히 산막으로 돌아왔다. 아침은 옥수수떡 하나였고 저녁은 보통 푸대죽이었다. 그러므로 일을 마치고 먼저 온 사람들은 쌀알이 둥둥 뜬 죽물을 먹고 나중에 온 박재호에겐 멀건 죽이 차려졌다. 그는 남보다 푸짐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박재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식염도 귀하고 채소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약한 사람들만 모아서 나를 책임지게 하고 1개 조를 묶어 비술나무 껍질을 벗겨오게 했다. 이는 대식품(代食品)의 원료였다. 그것을 쪄서 가루를 낸 다음 통 옥수수(粟) 가루와 섞어 떡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자) 항문이 막혀서 손으로 파내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배가 너무 고파) 뱀 고기도 먹었고 개구리알도 먹었고 비술나무씨도 훑어서 먹었다. 봄이 되면 산나물을 뜯어먹었다. 같이 왔던 사람들 중에 병에 죽고 굶어 죽은 사람도 있었다.

    운동화 한 켤레

    1958년 박재호가 잡혀가던 날을 부인은 47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저 영감의 운동화 뒤축에 구멍이 나서 살이 땅에 닿을 지경이었습지. 그래서 공자(월급) 나오면 신을 사려고 했는데 갑자기 잡혀 가다니. 해진 신을 신고 갔거든요. 돌아올 때까지 꼭 4년을 신만 보면 눈물을 흘렸습지비.”

    그때 노동 개조를 가지 않았더라도 그는 남편의 신을 사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벌써 그 전에 남편이 공직을 박탈당했으므로 월급이 나올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수입이 없는 가정 부녀였다. 식구가 많으므로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호구지책이 어려워 학교 식당에서 허드렛일이라도 시켜달라고 애걸해도 학교측은 알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당 회의에서의 부결 이유는 그가 부농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빈농과 하중농의 자제들도 직업이 없는 판에 착취계급의 자식을 어찌 특별대우할 수 있으랴! 계급투쟁이란 사활이 걸린 문제이므로 추호의 동정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호소하면서 어떤 농부가 겨울에 언 뱀을 불쌍히 여겨 품에 품어서 기껏 살려놓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다는 고사를 전국 인민에게 상기시키기도 했다.

    남편이 악마일지라도 그에겐 유일무이한 집안의 기둥이었다. 남들이 한결같이 반동이라고 외면하고 욕해도 그에겐 믿음직한 아이 아버지이고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남편이 없다면 집안은 무너져내릴 것이고 아이들과 그는 삶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남편이 떠나가고 아침을 먹고 나면 저녁을 때울 일이 태산 같은 근심인 판에 한 무리 사람들이 오더니 다짜고짜 집안의 가장 집물을 모조리 밖에다 내버렸다. 반동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 가속들도 국가에서 준 집에 더 이상 기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가장 집물이래야 낡은 궤짝 하나에 밥상 하나가 고작이었다. 옷이래야 입고 나면 여벌이 없었다. 부부에 아이 셋, 식구 다섯이 매일 밤 함께 덮고 자는 이불 한 채가 더 있을 뿐이었다. 툭 털면 먼지만 나고 서발 막대 휘둘러야 거칠 데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런데 마당으로 쫓겨나니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와도 밤을 날 집이 없고 배가 고파도 쌀 한 홉 안칠 솥이 없었다.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은 채를 볶고 ‘축하연’을 벌이는데, 멋모르는 아이들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출입문 앞에 서서 ‘구경’했다. 그것을 보는 그의 오장육부는 갈가리 찢겼다.

    그날 밤 그와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벼 겨를 넣어둔 나무판자막에서 쪽잠을 잤다. 그날따라 비가 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벼 겨가 화목(火木)을 대신하던 시절이므로 바람막이는 안 되어도 빗방울은 가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살 포기한 아내

    그는 뜬눈으로 날을 새웠다. 날이 밝자 아이들을 데리고 본가로 갔다. 세상 천지에 믿을 만한 곳은 어머니뿐이었다. 좋든 궂든, 잘하든 못하든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어느 날 생산대(당시 촌을 생산대라고 불렀음) 일을 나갔다가 마을 사람들이 사위 이야기를 하면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온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어떤 말이 들려오든 딴 마음을 먹지 마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니 참고 이기면 좋은 세월이 올 것이라고 타일렀다.

    그 말이 그에겐 쥐 굴에 볕이 든다는 식이었다. 굴에 볕이 든다고 해서 쥐가 고양이가 될 것인가?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강으로 갔다. 함께 익사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을에서 강으로 가는 길에 마른 나뭇가지가 널려 있었는데 둘째가 한 가지 한 가지 주워 품에 안으며 “엄마, 이거면 저녁 불 때고 밥 해 먹을 수 있나?”라고 빤히 쳐다보며 묻는데 그 철없는 말이 그의 가슴을 통째 무너뜨렸다.

    ‘부모가 죄가 있지 새끼들이 무슨 죄랴! 밥 해 먹고 살려는 애들을 어찌 죽인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어머니한테 맡기고 떠나려고 마음을 바꿔 먹었을 뿐이다. 그런데 죽기 전에 남편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면회를 신청했다. 마침 수란현 공안국에 출근하는 조선인 최씨라는 사람이 접대를 하는데 박재호의 아내라고 하자 반겨주었다. 군에 함께 있었다고 하면서 “박 선생 그 양반은 마음이 곱고 고지식한 선비입니다. 이번에 일이 잘못되어 고생을 하지만 조만간에 풀려날 것입니다. 사필귀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면회를 가시지요.”

    즉석에서 도장을 꽝꽝 박아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면회를 포기했다. 동시에 죽음도 포기했다. 남편이 돌아올 것이며 자신은 애들을 책임지고 잘 키워야 한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그리고 이튿날 가도판사처(街道辦事處)로 갔다. 사무실 복도에 놓인 긴 걸상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 며칠이고 공손히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가도 주임이 무슨 일인가 물었고 그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주임은 “아주머니, 돌아가서 기다리십시오. 일자리를 찾아드리지요”라고 했고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과연 도자기공장으로 출근하라는 통지가 왔다. 한 달 월급은 32원, 입에 풀칠은 하게 된 셈이었다.

    3년9개월 만에 박재호는 집으로 돌아왔다.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신고 왔다. 집을 떠날 때 신고 갔던 그 신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떠날 때에 달고 갔던 우파분자에 역사 반혁명분자라는 죄명이 여전히 붙어 있었다.

    불과 한 달도 되기 전에 축출령이 떨어졌다. 계급의 적을 도시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농촌으로 쫓아내어 노동 개조를 계속하게 해야 한단다. 그는 종백형 재준(在俊)씨가 사는 류허(柳河)현도 생각했고 주타이로 되돌아갈 생각도 했다. 그러나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호수(戶數)가 적은 마을도 제외였다. 호수가 적으면 사람이 적고 사람이 적으면 감시하는 눈이 적으므로 적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적지는 수란현 성에서 30리 떨어진 수이취(水曲)대대로 정해졌다.

    100여 호에 700여 명이었다. 순수 조선족만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므로 부근의 농촌에서는 잘살기로 소문나 있었다. 대대 당지부 박 서기가 직접 나서 초가 한 채를 주어 기거하게 했고 사원(社員·촌민)들을 안배하여 집수리도 도와주었다. 순수하고 따뜻한 인정이 넘치는 농촌의 전원 풍경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런데 그것도 순간이었다. 빈하중농도 이사를 오려고 해도 어려운 곳으로 반혁명분자가 끼어들 수 있었다는 것은 새로운 계급투쟁의 동향이란다. 그것을 빌미로 박 서기가 쫓겨나고 외지에서 김 서기가 부임해왔다.

    반혁명분자의 집

    그때부터 박재호 일가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박재호 자신은 일은 남보다 곱절 하지만 받는 공수는 다른 사람의 절반밖에 안 되었다. 그리고 의무노동도 곱절 더 많았다. 하긴 그 부인의 노동 공수는 깎고 싶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공수를 많이 받지 못했다. 큰애가 전실의 소생으로 겨우 13세, 그 아래로 조롱조롱 달린 아들 셋과 딸 하나는 어려서 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말이면 여느 집에서는 분배를 타서 옷을 산다, 자전거를 산다, 시계를 산다, 라디오를 산다 야단이었지만 그들은 쌀값도 모자랐다. 마을에서 1년에 봄가을로 돼지를 잡고 소를 잡아 추렴을 할 때면 고기를 먹겠다고 나설 엄두도 못 냈다. 그래도 마을의 노인들이 아무리 반혁명 분자라고 해도 다같이 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겨우 1년에 두 번밖에 맛보지 못하는 고기를 우리들만 먹고서 어찌 마음이 편할건가, 한 집에서 고기 한 점씩 덜 집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인정을 세웠다. 그 덕에 옆집의 고깃국 냄새에 속이 파내리는 아픔은 덜었다.

    몇 년 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박재호는 살아서 움직이는 짐승에 불과했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당서기의 허가가 없이는 마을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외지에 사는 친척집에 경사나 상사가 있어도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런 기회에 다른 마을에 있는 적들과 내통하여 복벽을 꿈꾼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 건너씩 하는 마을의 거의 모든 회의는 박재호를 투쟁하는 것이었다.

    “박재호를 타도하자!”

    저녁이면 대대의 방송이 시작된다. 대대정부청사의 마당에 높이 세운 대 위에 동서남북으로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동방홍(東方紅)’이 울려퍼졌다.

    동방이 붉어오니 태양이 솟아중국에 마오쩌둥이 나타났네그이는 인민을 위해 행복을 창조하니그이는 인민의 구성이라네

    그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당서기의 목소리가 왕왕 울려나온다.

    “사원 여러분, 오늘 저녁 대대 회의실에서는 우파 분자이며 역사 반혁명 분자인 박재호 투쟁대회가 있겠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참가해야 합니다.”

    당서기의 말이 곧 법이던 세월이라 사람들은 저녁 밥술을 놓기 바쁘게 회의장으로 모여들었다. 회의장 앞에 놓인 책상 위에 걸상을 얹어놓았는데 그 위에 박재호가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어야 한다. 머리에는 양철 연통에 가마니를 둘둘 말아서 만든 고깔모자가 씌워졌다.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는 쇠줄로 목에 건 나무 푯말에는 ‘우파, 역사반혁명, 제국주의 간첩 박재호’라는 글씨가 비뚤비뚤 씌어져 있었다.

    벌써 오래 전에 공민권을 박탈당한 그한테 차려진 것이라면 투쟁을 받을 권리밖에 없었다. 대꾸를 해서도 안 되었다. 오직 묻는 말에만 대답해야 했다. 그리고 사실 여하를 불문하고 김 서기네 억측에 따라 죄명이 새록새록 불어났다.

    “일본에 가서 무얼 했느냐?”

    “고학을 했습니다.”

    “닥쳐! 네 놈이 일본에서 간첩훈련을 받은 사실을 고백하란 말이다!”

    그는 하룻저녁에 일본 간첩이 되었다.

    “독립당에 참가하여 무얼 했느냐?”

    “독립당은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조직입니다. 한국임시정부 산하의 조직입니다. 나는 조선인으로서 독립당에 참가한 것을 지금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닥쳐! 한국은 미제국주의 괴뢰 정부가 아닌가? 네 놈은 한국 간첩이다.”

    그는 또 한국 간첩이 되었다.

    “일본 경찰을 하면서 지은 죄를 이실직고해라.”

    “처음에 경찰 시험을 친 것은 생계 때문이었고 후에 경찰에 복귀한 것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입니다.”

    “이놈아, 나발 불지 마라. 네놈이 공산당을 얼마나 죽였는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는 오늘 저녁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뒤따르는 것은 매였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자신의 적극성을 보이기 위하여 목이 터져라 하고 “박재호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너도나도 매 손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어떤 청년은 손목만큼 굵은 장작을 들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한번은 김 서기가 손수 나서서 매를 치라고 선동을 하는 바람에 홍위병들이 바자 기둥을 뽑아서 박재호의 머리를 까려고 했다. 마침 당시의 대대 민병연장(民兵連長·연장은 중대장임)이 나서서 말렸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그날이 그의 제삿날이 되었을 것이었다.

    박재호를 투쟁할 때면 그의 아내를 옆에 세워놓고 함께 투쟁했다. 남편이 투쟁을 맞는 것을 옆에서 보는 그의 가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아프고 쓰렸다. 밤중이 되어 투쟁대회가 끝나면 그는 남편을 부축해 집으로 왔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가 대회장으로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까지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지도 오래된 시간이라 그는 어둠 속을 헤덤비며 남편을 찾고 찾았다. 날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 남편은 윗마을 쪽에서 비칠비칠 걸어오고 있었다. 모진 투쟁에 정신을 잃고 온 밤을 방황했다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매 타작

    그날 집에 들어온 남편은 아내를 보고 말했다.

    “도망이라도 가야지 집에 있다간 살지를 못할 것 같소.”

    아내는 반대했다.

    “가려면 나도 애들도 죽이고 갑소. 당신이 도망가면 무슨 큰 죄라도 있다고 생각할게 아임둥? 그러면 집에 있는 식구들이 당할 고초를 생각해봅소.”

    그 말을 듣고 남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투쟁을 맞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투쟁을 하는 사람들도 지쳤다. 최일룡이라고 하는 사람은 회의에서 당서기를 보고 “이봅소 서기, 만날 투쟁을 해봐야 한 말을 곱씹긴데 이제 또 무얼 바라고 회의를 하는게요? 그만하고 우리도 좀 잠이나 잡시다. 우리가 살아야 투쟁도 할 게 아이겠소?”라고 부르튼 소리를 했다.

    어느 날 저녁 아내는 아이들이 깊은 잠에 든 때 남편에게 솜신 한 켤레와 몰래 모아둔 수십근의 전국양표(全國糧票·전국 각지에서 쓸 수 있는 양표. 당시에는 성마다 자체로 발행하는 양표가 있었다. 양표가 없으면 어디로 가든 밥을 사 먹을 수 없었다)를 주면서 “여봅소, 당신 이곳에 더 있다간 살지를 못할게꾸마. 도망을 갑소. 애들은 내가 맡아서 키웁지비”라고 했다.

    박재호는 솜신을 만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고맙소. 그런데 도망을 간들 어디로 가겠소. 죽어도 여기에서 맞아 죽겠소. 나 하나 살겠다고 당신이나 아이들한테 고통을 전가해줄 수는 없는 일이오.”

    추운 겨울날 홍위병들이 그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간첩이니 무전기를 내놓으라고 핍박했다. 없다고 하자 무지막지한 홍위병들은 깔개를 걷어내고 곡괭이로 방구들을 파헤쳤다. 그리고 책이며 일기장이며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재판이었다.

    ‘우파의 새끼’

    그의 집 출입문 위에는 ‘반혁명분자의 집’이라는 간판을 써서 붙였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사는 모든 식구는 적으로 간주되었다. 학교를 다니는 자식들은 매일같이 학교내의 오류분자(五類分子·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우파분자, 나쁜 분자의 총칭)들과 함께 일하고 투쟁을 받았다.

    ‘혁명적’ 선생들과 학생들이 투쟁대회 때마다 죄를 탄백(坦白)하라고 하는데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치원 시절에 벌써 우파의 새끼로 되었고 그때로부터 줄곧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언제 한번 허리를 펴고 큰소리 한번 하지 못한 그들이었다. 간이 콩알만해서 언제나 남의 눈치를 보고 앉을 자리 설 자리 조심하며 살아온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름보다 ‘반동의 새끼’로 통했다. 그들도 스스로 자기의 아버지는 반동이고 자기들도 반동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일본놈 경찰을 하면서 혁명동지들을 얼마나 죽였습니까? 노실하게 탄백하십시오. 아버지 때문에 우리 모두 무슨 개 고생입니까?”

    그들은 아버지한테 화풀이를 했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머리를 돌리고 땅 꺼지는 한숨만 쉴 뿐이었다.

    “내가 나쁜 일을 했다면 그때 남조선으로 도망을 갔을 것이다.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해 일했을 뿐이란다. 이다음 너도 알게 될 게다.”

    어떤 날 아이들이 투쟁대회에서 전신이 피 못이 되게 얻어맞고 돌아가면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천하 부모의 마음은 하나,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박재호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차라리 자기가 죽어서 처자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서슴없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같이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학교에서는 반동의 새끼는 공부를 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쫓아냈다. 그들 형제는 마을에 와서 아버지하고 함께 투쟁을 당해야 했다. 박재호씨는 아들 넷, 딸 하나를 두었다. 그중에서 막내아들(世鎭·1960년생)과 막내딸(仙嬌·1964년생)은 어려서 투쟁은 면할 수 있었지만,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는 매일반이었다. 다행히 맏아들(吉鎭·1947년생)은 타고장에 있는 처녀와 결혼하고 처가살이를 갔으므로 무사했다. 그러나 둘째 수진(守鎭)은 아이들의 매를 맞아 종신고질이 되었고 셋째 경진(京鎭)과 넷째 세진(世鎭)은 돌림 매가 무서워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한테는 천진난만한 동년이 없었고 생기발랄한 학창시절이 없었다.

    식구들 중 어느 누구라 없이 병이 나도 대대의 의사는 아예 진찰을 거부했다. 반동가정을 치료하는 것 또한 반동적 행위로 낙인찍히는 세월이었다.

    그런 모진 세월에도 마을 사람들은 모름지기 그들을 도와주고 용기를 주었다. 쌀이 떨어지면 저녁에 남의 눈을 피해 가져다주기도 하고 투쟁대회가 있는 날이면 “오늘 저녁 투쟁대회를 한다누만. 찰밥을 해서 대접하라우. 찰진 밥을 먹어야 끈기를 잃지 않을 게 아이우”하면서 찹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되어 그들 일가는 힘겨운 나날을 용케 이겨나갔다.

    “나는 죄가 없다”

    1974년 우경번안풍(右傾?案風)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국무원 부총리로 재임하여 경제건설을 위한 일련의 조치를 강구하자 자본주의 복벽을 꿈꾼다는 죄명을 씌워서 투쟁을 하는 운동이었다. 당시에 그것을 계급투쟁의 새로운 동향이라고 표현했다.

    수이푸의 당조직에서는 계급 적들의 복벽을 방지하기 위하여 우파 분자이고 역사반혁명 분자이며 반동적 민족주의 분자이고 일본 간첩이며 남조선 간첩인 박재호에 대한 투쟁의 공세를 새롭게 일으켰다. 하루도 아니고 연속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투쟁이 연장되자 거의 20여 년을 참고 참았던 박재호의 인내심이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목에 건 푯말을 벗어 내치고 “나는 죄가 없다. 모든 것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외쳤다. 그러자 당서기가 단에 올라서서 “우리의 가장 경애하는 수령이신 마오 주석께서는 ‘일체 반동적인 것은 치지 않으면 거꾸러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박재호 놈의 이러한 작태가 바로 주석의 영명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놈은 감옥에 처넣어야 합니다”라고 연설하고 나서 민병들을 시켜 박재호를 결박했다. 그리고 공사(公社·현재의 향) 파출소에 긴급 전화를 하였다. 얼마 후 경찰들이 와서 수인 차에 박재호를 싣고 갔다.

    그리고 그 이튿날 수진이와 경진이를 포박하여 현으로 압송했다.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라 아버지를 위해 복수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겉에 드러난 구실은 그들 형제가 마을 청년들을 시켜서 대대의 간부들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청년 몇이 증명을 서기도 했다. 순전한 모함이었다.

    동틀 무렵

    박재호 삼부자는 수란현 공안국 미결수 감방에 갇혔다. 아버지는 앞건물에, 두 아들은 뒷건물에. 박재호는 정치범이고 중범이라고 해서 족쇄며 수쇠를 채웠고 두 아들은 일반 잡범들과 함께 가두었다.

    “영감을 만나러 감옥에 가면 저 먼 데서부터 족쇄와 수쇠소리가 절그럭절그럭 울려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끝장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허연 간수가 당신 남편은 큰 죄가 없으니 시름을 놓으라고 안위를 주데요. 역사반혁명이며 우파 등등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고 현행죄가 없는 한 도형(徒刑)에 떨구지는 못할 것이라고 합데다. 그리고 영감은 영감대로 대대에 있을 때보다 감옥에 있는 편이 낫다고 합데다. 투쟁도 받지 않고 강제노동도 시키지 않고 오히려 심심해서 죽겠다는 겁니다. 하긴 나를 위안해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사실 영감한테는 감옥보다 사회가 더 무서운 감옥이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부인의 말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었다.

    여섯 식구 중에 장정 셋이 감옥에 가고 나니 식구가 단번에 절반이 준 셈이었다. 아내는 또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찌그러진 초가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장마철에 접어들어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집 천장으로는 비가 낙숫물처럼 쏟아져내렸다. 뒷벽은 허물어져내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에서 가냘픈 여인은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하루라도 거를세라 일을 나가야 했고 쉬는 시간이면 풀을 뜯어다 돼지를 먹였다.

    부자가 감옥에서 돌아오면 잡아서 몸보신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는 남편과 아이들이 조만간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아무리 하늘이 무정해도 죄 없는 사람을 도형에 떨구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꼭 2년 만에야 남편과 수진이가 놓여 나왔다. 보통 돼지는 1년 정도 키우면 팔든지 잡든지 하는데 그 돼지는 그들의 감옥살이 시간만큼 명이 붙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억울하게 5년 도형을 받은 경진이마저 3년을 징역 살고 돌아온 바로 그해에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1979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 박재호와 그 자식들은 무죄선고를 받았다. 천추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꼭 21년을 살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물론 부귀영화를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가 광복된 이후 우리 집처럼 대를 이어 박해를 당한 가정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지난날을 회상하는 박수진씨의 눈에는 이슬같이 맑은 눈물이 금방 쏟아질 듯 그득 고여 있었다.

    에필로그

    2005년 3월, 필자는 두 번째로 수란으로 갔다. 박수진의 안내를 받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산다는 집을 찾아갔다. 단층 벽돌집인데 온돌은 두 분이 누우면 태질을 할 자리도 없이 좁았다. 1970년대 말에 무죄를 선고받고 나서 수란현 조선족중학교에 복직되고도 한참 뒤에 직장에서 분배받은 집이란다. 이 콧구멍만한 집에서 박재호는 아들딸들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냈다. 이제는 자식들이 저들 살림을 꾸리고 세간을 나가고 나니 손바닥만한 온돌이 영감노친의 차지가 되었다.

    윗목에는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 요를 깔고 누워 있었다. 벌써 3년째 중풍으로 누워 사는, 이 글의 주인공 박재호씨였다. 그는 말을 못했지만 정신은 바른 대로였다. 그런데 손 움직임마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어서 글을 쓰지 못했다. 생각은 불 같은데 표현력을 잃은 안타까운 그의 심정을 성한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부인과 아들 수진, 딸 선교가 박재호씨가 중풍을 앓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해주었다.

    중국 당국은 박재호의 과거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일편단심 모든 것을 바쳐 나라의 광복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는데 죄가 아니라는 판결이었다.

    박재호는 ‘지린신문’에 박소진을 찾는 광고를 냈다. 독립운동 참가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는 박소진밖에 없었다. 옌지에 살던 최성순 또한 문화대혁명 시기에 투쟁을 맞고 사망했던 것이다. 최성순은 생전에 자서전을 써서 남겨뒀다.

    신문에 광고가 나간 이튿날 자오허에 사는 박소진의 친척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들을 통해 박소진도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박소진의 일생을 쓴 ‘어느 독립운동가의 일생’이라는 책을 얻었다.

    조선독립선봉대 총대장 박소진과 제2지대장 최성순의 생전 증언 문장을 얻자 박재호는 천하를 얻은 듯 기뻤다. 마치 당년에 한방이가 박재호를 얻고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다고 표현했듯이 박재호는 친구이자 동지 둘의 글을 얻고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한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신심에 벅찬 마음으로 한국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 그때가 2000년 2월20일이다.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중풍 후유증과 치매 증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박재호 옹과 그의 부인.

    그러나 그것은 한강에 돌을 던진 격이었다. 2002년 11월2일 보훈처 회신에서는 ‘고 최성순, 고 박소진 두 분의 자전서는 구체적인 작성기가 불분명하고 공적 내용을 입증하는 데 한계가 있어 입증자료로 채택하지 않는다는 결과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라는 아주 간단명료한 말로 한 독립운동가의 소원을 묵살해버렸다.

    그 소식을 접한 박재호 선생은 며칠동안 말이 없더니 갑자기 치매현상을 보였다. 오직 애국애족의 정의사업에 한 생을 바친 자신의 노력이 무시당한 충격을 끝내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21년 동안의 고난에 못지않은 가혹한 판결이었다. 그는 드디어 자기의 모든 과거를 잊었고 그 어떤 욕망도 잃었다. 그것이 자녀들한테 가슴의 상처로 박혔다. 그들은 2003년 2월24일 보훈처 심사위원회에 드리는 글을 이렇게 마감했다.

    ‘팔십 평생을 타국 땅에서 오직 정의로 일하며 살아오신 주인공, 조국과 민족을 위한 성스러운 일생은 이제 잔년(殘年·여생)에 접어들어 꺼져가는 촛불인 양 희미한데 이미 늦었지만 오늘 다시 한 번 주인공의 후대들은 고국 정부의 현명한 판단과 선처가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이제 한 애국애족지사인 주인공으로 하여금 두 눈 감으시고 유감 없이 이 한 세상을 떠나가시도록 대한민국 정부에서 바른 처사를 해주실 것을 우리 모두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는 박재호씨와 그 자녀들의 소망인 동시에 동시대를 살아온 박재호씨와 같은 모든 분과 조선족 전체의 소망이기도 하다.



    금수강산 한반도는 우리 집이요백의민족 2000만은 우리 형제라우리 강산 아름다운 천하 빛나고우리 민족 고운 마음 비할 데 없네

    백두산의 상상봉은 우리 넋이요한강수 맑은 물은 우리 마음이라이 넋 이 마음 변치 말고 항상 일하세금수강산 삼천리에 웃음 피우세

    국조 단군과 태극기와 애국가로 그의 마음속에 진작 애국애족의 싹이 텄다고 한다면, 바로 이 노래는 그의 심령 깊이 한평생 꺼지지 않는 애국애족의 불씨를 심어줬다.

    박재호는 17세 되던 해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했지만, 생활고로 인해 승학(升學)의 꿈을 접어야 했다. 다행히 숙부가 학비를 대줘 사촌형 재만(在萬)과 함께 위만한족(僞滿漢族) 초중예비교인 사링바오 가오얼샤오(高二小)에서 1년 동안 한어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글과 일어, 한어를 두루 섭렵한, 당시로는 지식인 소리를 들을 만한 인재로 성장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일했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 자리 뜀이었다. 만선척식회사에서 소작을 맡은 땅이래야 가뭄에도 수해를 입는다는 수렁논뿐이었다. 그래서 가을에 탈곡을 마친 뒤 회사에서 여름에 대부해준 좁쌀(小米) 빚을 물고 나면 벼 짚가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번엔 빚 때문에 야밤 삼경에 솔가도주를 했다. 만선척식회사는 빚을 진 소작농의 이주를 절대 불가했던 것이다.

    박재호네는 주타이현 칭양(慶陽)촌 신카이링(新開嶺)에 이삿짐을 풀고 중국인 지주 주시이(朱希義)의 논을 소작 맡았다. 그러나 수원(水源)이 없어 천수(天水)만 고대하다 보니 결국 볏모도 못하고 폐농(廢農)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의 농토에 목숨을 걸고 덧없는 세월에 소망을 붙들어맨 턱없는 생활을 더는 계속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산 사람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식구들 저마다 생존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큰형은 장사를 떠나고, 둘째형은 신징으로 가서 제과공장에 취직했다가 뒤미처 주타이현공서(公署) 담배업무계(煙務股)에 취직했다. 재호도 신리툰(新立屯)에 있는 만선척식회사의 주타이농장에서 김매는 삯품을 팔기도 하고 인마허(飮馬河) 강둑 공사에서 측량하는 일을 하고, 백화점에서 점원 노릇도 하면서 전전긍긍하다 19세 되던 해에 경찰 모집에 응시했다. 시험에 합격하고 3개월간 훈련을 거쳐 드디어 주타이경찰서에 배치됐다.

    만주국 경찰이 되다

    박재호는 만주국의 경찰이 된 것이다. 만주국이 일제의 식민지 국가이고 경찰의 임무가 만주국의 통치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는 친일파 행렬에 낀 것이다. 그것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으로 시험을 쳐서 말이다. 박재호는 ‘자서’에서 “훈련기(訓鍊機) 단련이 바빴으나 밥통이나 극복하고 난 나머지 취직한 것이다”고 변명하고 있다. 얼마나 호구지책이 어려웠으면 구직(求職)에만 천방지축 헤맸으랴.

    그는 꼭 1년 반 동안 경찰로 근무했다. 3개 언어에 능통한 덕분에 월급승진(越級昇進)하여 경위가 됐다. 맡은 일은 주타이 시내의 조선인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괴뢰 경찰복을 입었어도 마음속엔 정의가 살아 있어 주어진 권한 내에서 바른 시비를 들었다. 농장 주임의 친구가 주정을 부리다 자위단(自衛團)에 걸린 것을 중재하기도 했고, 사법대서 최영화(崔泳華)가 대서비를 더 받은 것을 돌려주게도 했다. 구름다리 공지를 지나다 노동자를 때리는 일본인 감독을 팬 것이 화근이 되어 일본인 경무주임한테 취조를 당하기도 했는데,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그는 식민지 천하에서 정의란 있을 수 없고 피압박 민족한테 자존심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치국의 이익이 곧 정의이고 피압박 민족은 생존을 위해 통치 민족 앞에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같이 시비가 전도된 사회는 절대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입지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통감했다. 그는 결국 경찰을 사직했다. 일제 통치를 뒤엎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지는 못할망정 더 이상 비뚤어진 사회의 비뚤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자신의 존재가 보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1939년 그는 일본으로 고학의 길에 올랐다. 경찰 퇴직금은 고스란히 여행비용에 들어갔다. 교토(京都)에 발을 들인 순간 타향살이의 서러움과 고생이 시작됐다. 그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세탁소에 몸을 의탁하고 낮엔 배달 일을 하고 밤이면 YMCA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주인은 박재호의 식사량이 많다고 푸념이었다.

    “일은 서푼어치 하면서 소 깔 먹듯 하니 걱정이다. 너 같은 일꾼 하나만 더 있으면 우리 집이 거덜 나겠구나.”

    박재호에게 배고픈 설움은 컸다. 20세 한창 나이라 숟가락을 놓고 돌아앉으면 금세 배가 고팠다. 그러나 주인의 눈총이 무서워 한 끼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허구한 날 일은 소처럼 하고 밥은 소금 녹이듯 하려니 그 고통을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도 배달을 다녀와야 하므로 늘 발 편한 잠을 자지 못했고 잠도 부족했다. 차고 습한 방구들이라 한뎃잠을 자듯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좁쌀에 뒤웅박 판다’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로 인색한 주인은 장작을 아끼느라 일군이 자는 방에는 거의 불을 때지 못하게 했다.

    일본에서 고학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일본 유학 시기의 동창생들. 뒷줄 왼쪽이 박재호, 앞줄 중간이 박소진, 앞줄 오른쪽이 최성순이다.

    박재호는 끝내 도쿄행에 올랐다. 그곳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일자리가 마련돼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넉넉한 학비를 벌어 시름 놓고 공부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왕이면 도쿄에 가서 부딪쳐보리라는 용기 하나만 안고 떠난 걸음이었다.

    도쿄에 이른 그는 곧장 박소진(朴昭鎭)을 찾아갔다. 그는 종씨이자 주타이에 있을 때부터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주타이를 떠나기에 앞서 그의 형 박홍진(朴洪鎭)을 통해 동생 소진의 도쿄 주소를 알아뒀던 것이다.

    박소진의 선친 고향은 경북 경주군이고 그의 고향은 만주 지린성 수란현 대북차였다. 음력(1919년 12월20일)으로 하면 재호보다 한 살 위였지만 양력(1920년 2월9일)으로는 동갑이었다. 소진은 간다오성 왕칭현 하마탕에서 일본군 주방 일군으로 2년여를 지낸 경력을 갖고 있었다.

    도쿄에서의 상봉은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스스럼이 없었다.

    “잘 왔네. 따로 방을 얻을 생각일랑 접고 함께 있기로 합세.”

    박소진은 워낙 소탈하고 호남아다운 성격이라 만나자마자 친구를 잡아둘 생각부터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소진은 혼자서 방 한 칸을 세 내어 살고 있었다. 원래는 친구 최성순(崔性純)과 함께 들었는데, 박재호가 도착하기 얼마 전 최성순이 도쿄에 살고 있는 자신의 둘째형한테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박재호로서는 소진의 만류가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지 몰랐다. 당장 돈도 갈 곳도 없는 처지로서 체면을 챙기다가는 한지에 나가 거지가 될 판이었다.

    며칠 후 박재호는 박소진의 소개로 최성순을 사귀었다. 그도 1920년생으로 동갑이었다. 고향은 충북 충주. 여덟 살 나던 해에 지린성 수란현 횡도하자(橫道河子)로 이주해 한족 지주의 소를 먹이는 목동을 하다가 11세에야 겨우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최성순은 자기가 일하던 신전구대우(神田區大隅) 요미우리(讀賣)신문 판매소를 알선했다.

    신문배달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공부하기에 적합했다. 대신 월급이 적었다. 고작 16원, 그것으로는 여러 가지 용비(用費)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주인은 독자를 확장하라고 강요했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돈이 되는 쪽으로 생각을 돌려 요미우리신문 본사 발송부의 야간 노동을 택했다. 월급은 42원, 경비를 해결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노동시간은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였다.

    주경야독의 나날

    낮 시간엔 삼기(三崎)영어학교 연교(硏敎)학관과 준하대(駿河臺) 고등예비학교에 다니면서 중등학교 고급반에 편입할 공부를 했다. 밤엔 일하고 낮엔 공부하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꼬박 1년을 그렇게 하고 나니 신경쇠약증에 걸렸다. 병원에 갔더니 밤잠을 자지 못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낮에 하는 길닦이 막노동판에 나갔다. 하루 품삯이 3원일 때도 있고 3원50전인 때도 있어서 수입은 짭짤했다. 그러나 육체를 혹사하는 노동이라 도저히 밤에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때 지린성 융지현과 지린 등지에서 10여 명이 도쿄로 고학을 와 있었는데 그들의 생활처지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박재호와 생각을 같이한 사람은 그래도 박소진과 최성순이었다. 최성순이 만년에 쓴 자서전에서 당시 그들의 내심을 표현한 부분을 보자.

    이때 가장 가까운 동무라면 상술한 세 사람 박소진, 황재식, 박재호다. 우리는 모두 배일사상을 가졌고, 또 조선독립사업에 공헌하려 하였지만 그런 계통을 찾지 못하였다. 다만 사상적으로 일치하였고 하루 빨리 일본이 패망하기만 고대하였다.

    세 사람은 일본이 조만간에 망할 조짐을 피부로 느꼈다. 최성순은 후일 “그것은 당시 쌀이 통제되며, 휘발유가 통제되며, 학도병을 뽑으며, 심지어 400도 안경을 쓴 사나이까지 병정으로 몰아내는 것을 보고 짐작한 것이었다”고 썼다. 박재호도 1942년 2월2일자 일기에 “동양대화근(東洋大禍根)인 마귀(魔鬼)는 날로 하늘의 도(道)며 지성(至誠)의 힘으로 망(亡)하고 있는 이때 우리들 동아(東亞)에 있어서 그 유일한 화근의 적(敵)을 멸망(滅亡)시키고 저 하던 바 진심으로 기쁨을 마지않는다”라고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다. 동시에 반일구국사상을 의(義)로써 표현하면서 “이불의생유취천재, 숙약이의사유방백세(以不義生遺臭千載, 孰若以義死流芳百世·불의로 살면 천추에 더러움을 남기고, 누가 만약 의로써 죽으면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는다)”고 썼다.

    그들은 이같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갈망했지만, 어떻게 자주독립을 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 문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모든 조선 인민을 일본 제국주의의 발밑에서 끌어낼 수 있는 영웅을 찾으려 했고 그런 인물에 의거하여 조선을 구하려는 데 불과했다.

    동시에 김동인의 ‘젊은 그들’, 이광수의 ‘흙’, 이은상의 ‘무상(無常)’ 등을 돌려보며 애상에 젖기도 했다. 이은상이 사랑하는 동생 정상(正相)을 여의고 쓴 ‘무상’과 같은 인생에 대한 허무한 탄식은 앞날이 보장되지 않고 매일매일 고된 노동과 학습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1942년 박재호와 박소진은 만몽(滿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사립으로, 취직을 목적으로 한 단기 전문학교였다. 주요 과목은 한어(漢語)과 몽골어였고 졸업생들은 쉽게 취직이 됐다. 다재다능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무난히 도쿄고등예비학교를 거쳐 중학교를 졸업한 박재호는 원래 지망했던 와세다(早稻田)대 정경과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몽전문학교는 성적이 좋으면 1년이면 졸업할 수 있었으므로 조기졸업에 적합했다. 또한 구두시험으로 합격을 결정했으므로 입학도 쉬웠다.

    귀향길

    바로 그때부터 세 사람은 희망에 부푼 가슴을 안고 미래를 꿈꾸었다. 당분간 근검고학(勤儉苦學)하여 기량을 닦기로 명심하자,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뒤 각기 화베이(華北)로, 조선으로, 둥베이로 가서 누구든지 항일계통을 찾기만 하면 서로 소개를 하여 가입하자고 굳게 약속했다.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 장차 항일구국에 헌신하려는 마음을 다졌던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 진학하여 몇 달 안 된 1942년 5월22일, 박재호는 만주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그 한 통의 편지는 그에게 ‘평생을 통하여 잊지 못할 만큼의 큰 변동’(박재호의 일기에서)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친필 편지는 어머니가 중병에 누우셨으니 어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급보를 받은 뒤 이틀간 준비를 하고 5월24일 오후 귀로에 올랐다. 시모노세키(下關)행 열차가 도쿄를 떠날 때 차창으로 손을 저어 바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그는 끝내 눈물을 지었다. 누구랄 것 없이 고생살이 신세였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격동적인 생활과 정다운 순간들이었다.

    20시간 남짓 달려서야 기차는 시모노세키에 이르렀다. 그리고 밤 9시30분에 떠나는 부산행 여객선에 몸을 의탁했다. 여로의 피로와 몸의 때를 벗기려 목욕을 하고 잠을 청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부산에 도착했고, 다시 부산에서 신징(新京·오늘의 창춘(長春)행 급행열차를 탔다.

    열차는 대구를 지나고 경성(京城)을 거쳐 바람처럼 달렸다. 차창 밖으로는 고향산천이 끝없이 흘러갔다. 비스듬히 기대앉아 산이며 물, 풀과 나무며 고향 하늘을 유유히 흐르는 구름 한 조각이라도 놓칠세라 바라보았다. 그 산천, 그 토양, 그 동포….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모두 의미 있고 한숨 깊은 존재였다. 만주에, 혹은 구미(歐美)에, 혹은 일본에, 그리고 이 세상 그 어디서나 표류하고 방황하는 동포들은 모두 이 강산의 정기를 타고났고 이 강토의 전통적 기운을 품고 난 형제들이다. 저 언덕 밭 한 뙈기, 저 강 속의 물고기 한 마리, 저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저 길 옆의 풀 한 포기…. 그것은 그대로 조국의 살결이었다. 그는 달리는 열차에서 이렇게 개탄했다.

    금수(禽獸)의 연자(燕子)며 가축도제 집을 떠났다가 찾아오는데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우리 인간은어찌하여 내 고향 내 조토(祖土)로 돌아오지 못하는가

    그리고 1943년 1월2일에 그는 귀향길을 회상하면서 한시 한 수를 지었다.

    신출조선지토(身出朝鮮之土 조선의 땅에서 난 몸)식우이방지수(食于異邦之水 남의 땅 물을 먹으며)기유수십지년(己有數十之年 벌써 수십 년을 살았건만)동동회모지극(憧憧懷慕之極 갈수록 그리운 마음 사무치노라)

    가족과의 재회

    아침에 부산을 떠난 신징행 열차는 늦은 저녁 안동에 도착했다. 다시 밤 내내 만주의 광야를 달려 펑톈을 경과한 열차는 이튿날 오전 신징에 도착했다. 부산을 떠나 꼭 2박3일의 노정이고 거기에 바다에서의 하룻밤 뱃길까지 합하면 사흘 낮이었다. 신징역 부근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그는 곧장 주타이현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공교롭게도 차에서 주타이농장 주임 유화춘을 만났다. 술에 취해 자위단한테 걸린 것을 박재호가 경찰서에 있을 때 도와줬던 바로 그 주임이었다. 주타이농장이란 주타이현성 시교에 있는 지금의 신리춘이다. 경영자는 조선인 박태진(朴泰鎭)이었고 초대 농장 이사는 윤은주(尹殷柱)였다. 유화춘은 후임이었다.

    박재호네는 바로 그 농장에서 소작을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화춘은 그의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한테서 박재호는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아버지가 거짓말을 꾸며 아들을 부른 것이었다. 도쿄를 떠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건강 회복만을 빌고 빈 그로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중도 낭패를 보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날 밤 박재호네는 경사가 났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모시고 백형네 식구와 둘째 형수와 질녀 춘자(春子) 등과 밤늦도록 오순도순 이야기를 했다. 나라도 남의 나라이고 마을도 남의 마을이고 초가삼간도 세든 남의 집이었지만 부모형제의 정만은 남의 것이 아니었다.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이튿날 박재호는 ‘악마의 세상에서 할 일’(박재호의 일기에서)을 찾으려고 했다. 관내(關內·산해관 이남 중국 내지)로 가서 항일진영을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집을 버리고 떠날 형편도 못되었다. 충효는 일치한다고 했으니 주타이에서도 충분히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오래지 않아 그는 1942년 10월10일 주타이가공소(九台街公所)의 조선인 고용원으로 취직했다. 민적(民籍), 배급(配給) 등 조선인에 관한 사무를 모두 다뤘다. 월급은 64원. 대우는 그런 대로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의 직권을 이용해 자신의 호적부터 다시 등기했다. 누가 한 일인지는 몰라도 그의 집 호적등본에는 ‘정목(井木)’이라는 일본화 창씨가 기재되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던 차에 1942년 신징 일본대사관에서 누적자(漏籍者) 취적(就籍)을 하러 온 기회를 빌려 창씨를 버리고 원래의 박씨 성으로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원 호적에는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오기동 3계리 박형환’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새로운 호적에는 서울 중구 재동 일가 10번지 호주 박형환으로 고쳤다.

    그리고 재호(在虎)로 등기되어 있던 자기의 이름마저 재호(在浩)라고 했고, 지금도 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재호(在虎)와 재호(在浩)는 한자만 다를 뿐 우리말 표기로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재호(在虎)가 범이 있다는 뜻으로 용맹한 사나이를 지칭한다고 하면 재호(在浩)는 크고 광대하고 넓은 뜻으로 당시 그의 포부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1944년 12월13일에 스스로 호(號)를 뇌묘(磊?)라고 지었다. 뇌(磊)는 솔직하고 당당하고 공명정대하다는 뜻이고, 묘(?)는 아득하게 넓다는 뜻으로 그 이름 재호(在浩)의 전개라고 할 수 있으리라. 광복 후 그는 호를 의식(義植)이라고 적기도 한다. 뜻을 심는다는 의미다.

    박재호가 자기의 이름이며 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나름의 정의와 진리에 대한 무한한 추구에서 비롯됐다. 그는 일기에서 ‘아직도 고애(苦哀) 중임에 처음부터 고안(考案)하던 정(正)과 의(義)를, 또는 진리(眞理)를 찾노라 헤매는 중에 적는다’고 했다. 식물을 심듯 마음에 뜻을 심음으로써 그 목적을 위해 실천한다는 것이다.

    최성순과의 깊은 인연

    박재호는 가공소에서 기획계 계장이 되었다. 그만큼 맡은 일을 차질 없이 잘했다는 말도 된다. 일제의 기관에서 착실히 일했다면 일제의 주구 노릇을 잘했다는 것과 같다고 하리라. 물론 그에 대해 본인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맡은 일은 조선인 거주민에 대한 호적과 배급이므로 민족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반에 편리를 주었고, 배급 사무에서도 배급 방침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거민한테 편리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치할 정도로 소극적이면서도 가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일단 거주민이 다른 곳으로 이주할 때면 양식통장을 바치고 이주지에 가서 새로운 양식통장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박재호는 조선인이 이주하게 되면 배급을 더 탈 수 있도록 양식통장을 한 달 뒤에 바치게 했다. 그리고 숙직을 서는 날이면 기계기름 원료로 공출한 피마주를 대량 아궁이에 넣어 불사르기도 했다. 징병에 걸린 박용덕(朴榕德)을 빼돌리고 영신농장(永信農場)에 민족주의자가 있다고 하는 권모씨의 고발을 묵살해버리기도 했다.

    1943년 3월1일부터 가공소에서 경제계 사무를 전임하는 한편, 협화회 상무, 신문지국 경영과 남산학교 만어(滿語) 강사를 겸했다. 총 수입은 약 200원이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동창 최성순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최성순과의 만남은 박재호에게 재기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성순을 통해 박소진이 만몽학교를 졸업하고 베이핑(北平·지금의 베이징)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북지(北支)라고 하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는 고장이었다. 그곳에서는 항일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쉽게 항일세력에 합류할 수 있는 곳이다.

    최성순은 박재호가 돌아온 다음해에 만몽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1943년에 결혼하고 공부를 계속하려니 돈 근심이 태산 같았다. 운송배달로는 둘의 입을 달래고 공부까지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다 도쿄가 공습을 받기 시작했고, 징용이요 학도병이요 하는 통에 학교가 뒤숭숭해졌다. 그래서 졸업을 몇 달 앞둔 1944년 1월 아내를 데리고 만주 지린성 융지현 우라가로 돌아왔다.

    박재호는 자기가 만주어 강사를 맡고 있는 주타이 남산국민우급학교(南山國民優級學校)에 최성순을 소개했다. 그때부터 최성순은 교원으로 있으면서 박재호의 지기(知己)가 됐다. 박재호는 최성순에게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교육자의 탈을 쓴 한심한 선생들의 작태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노화교육에 맞서 조선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최남선의 ‘고사통(故事通)’을 서울에 주문해 교재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참된 교육의 취지는 인생이 무엇이며 미래가 무엇인가를 알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박소진을 만나다

    1944년 11월, 베이징에서 박소진이 자오허(蛟河)에 있는 부모를 만나러 가는 걸음에 주타이에 들러 박재호를 찾았다. 공개적인 신분은 왕정위의 괴뢰 중화민국 허베이(河北)성 싼허(三河)현 경찰국 독찰원(警察局督察員)이었지만 비밀 신분은 조선독립선봉대(朝鮮獨立先鋒隊) 총대장이었다.

    박재호가 떠나고 최성순이 떠난 다음 도쿄에 남은 박소진은 우연한 기회에 곽지원이라는 사람을 사귀게 됐다. 그는 중국 국민당 대일(對日) 공작특파원이었다. 그의 소개로 허베이성 싼허현으로 가서 국민당 싼허현 당위원 맹지영을 만났고, 박소진은 국민당 중앙조직부 베이징 주재 연락원으로 임명받았다. 1944년 2월, 박소진은 베이징에서 국민당 정식 당원이 됐고, 국민당 중앙조직부 선무공작위원회 산하의 새로운 조직인 조선독립선봉대 총대장에 임명됐다.

    조선독립선봉대는 적지에서 지하공작으로 조직된 부대였다. 총대장이 적당한 인물을 지대장으로 임명하고, 그 지대장은 지혜롭게 지대원을 확장토록 되어 있었다. 박소진은 황재식, 천지성(泉志成·서울 출생으로 신징법정대학 재학시 일본인 학생 구타사건으로 중퇴), 이맹덕(李孟德·만주 출신), 홍본영(洪本營·만주 출신), 김병선(金炳善·신의주 출신으로 일본군 탁현 주둔 복영(福永)대대 통역) 등과 선봉대 총지휘본부를 구성하고 교포 애국청년 포섭공작 등을 목표로 정했다.

    박소진의 만주행은 겉으로는 친지방문 명목이었지만 속마음은 선봉대 확장에 있었다. 그는 대상자로 박재호와 최성순을 꼽았던 것이다. 최성순은 자서전에서 당시 박소진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44년 11월에 베이징에 있는 박소진이 자오허의 자기 부모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주타이에 내려 나와 박재호를 찾았다. 당시 그는 빈궁한 나의 생활을 보고 위폐(僞幣·만주국 돈) 1000원을 주며 생활에 쓰라는 것이었다. 비록 죽마고우라 하지만 이처럼 돕는데 대하여 나는 감격했다. 그가 떠날 때 주타이역전 주점에서 나와 재호를 보고 ‘앞으로 우리는 기어올라(높은 직무를 말함) 일본놈의 정황을 잘 장악함으로써 우리의 공개적 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독립선봉대에 투신

    박재호는 1945년 봄 경찰에 복귀했고 경위보(警衛褓)급으로 주타이 경찰과 직할(直轄) 파출소 대리소장을 담당했다.

    박재호는 자신이 경찰에 복직한 이유에 대해 ‘반일활동에 경찰직이 유리하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가공소 업무는 조선인의 호적이나 양식 배급, 가공소의 인사나 민가의 문패 설치 등에 국한돼 있지만 경찰은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기 편리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미뤄볼 때 그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경찰에 취직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원래부터 북지(北支)로 갈 마음으로 가슴을 불태웠던 박재호는 조국 광복을 더욱 강렬히 희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45년 7월 박소진은 두 번째 만주행에 올랐다.

    모든 것이 안정된 후 한방(박소진의 별명)은 고원씨와 상의하여 선봉대 확장차 두 번째로 만주행을 결심했다. (퉁랴오(通遼)에서 만난) 박소진과 박재호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한방이는 바짓단 속에 꿰매고 다니던 ‘朴韓邦을 朝鮮獨立先鋒隊總隊長에 任命함’이라는 사령장을 꺼내 묵묵히 건네주었다.

    박재호는 한참 동안 정신없이 그 사령장을 보고 또 보더니 “박한방이란 사람이 누구지?” 하고 물었다.

    “한방이란 이름은 비밀공작을 위한 나의 가명일세. 만약 자네가 나를 체포하면 적어도 두 계급은 특진하고 상금도 많이 받게 되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동지가 되어주는 길밖에 없네.”

    박소진의 말에 박재호는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체포해서 왜놈들의 영화를 누릴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를 오라고 하였나? 예끼, 실없는 친구!” 하며 기뻐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두 친구는 말없이 잠시 마주 쳐다보며 울었다. 박소진은 “백만대군을 얻는 것보다 나에게는 자네를 동지로 맞이하게 된 것이 더욱 소중하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선 박재호가 경찰직에 있으면서 일본을 돕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교포 청년들의 모임을 만들고 시기적절할 때 삼삼제 낙하산식 포섭방법(한 사람이 3명 이상 포섭하지 않으며, 한 사람에게 포섭된 세 사람은 서로 모르게 한다는 뜻으로 횡적으로는 절대로 연관이 없도록 하는 극비 조직 확대 방법)으로 포섭해서 움직이지 말고 시기를 기다렸다가 북지쪽에서 선봉대가 밀고 들어오면 합세하여 조국을 위해 싸우자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박재호를 조선독립선봉대 제1지대장으로 임명하고 미리 준비해둔 선봉대 총대장 직인이 찍힌 명주천에 박상길(朴尙吉)이라고 적어주었다. 이는 만일 탄로가 나더라도 명주천을 주웠다고 해명하면 위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몽전문학교 일년 후배인 최성렬(최성순)로 하여금 하구대현에 있는 보통학교 교원직을 그만두게 하고 퉁랴오로 보내 취직시킨 뒤 퉁랴오 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 학도병을 상대로 지하공작을 벌이는 문제를 박재호와 협의했다.

    재호가 돌아간 지 일주일 만에 성렬이 한방을 찾아왔다. 이리하여 한방은 계획대로 최성렬을 제2지대장에 임명하고 공작 요령을 가르쳐준 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어느 한 독립운동가의 일생’ 208∼212쪽). 최성순은 그때의 일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45년) 7월의 어느 날 밤에 소진은 재호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오래지 않아 북에서 소련군이 진출하고 남에는 중국군이 진출하게 된다. 그러면 둥베이의 명맥인 대호산(大虎山), 사평(四平), 펑톈 등지에서 격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만주 1886부대의 조선인 제2후보생을 장악하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총구를 돌려야 한다(槍口向後轉).’

    동시에 그는 자기의 옷섶에서 국민당 당증인지 무엇인지 명주천에 먹 글자를 쓰고 관인을 박은 증건을 보여주었다. 그해 7월16일 나는 박소진의 소개로 만주 1886부대 군속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박재호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썼다.

    박소진은 베이징에서 중국 국민당 지하조직과 연계를 맺고 입당하여 ‘조선독립선봉대’를 조직하던 중 몽골 퉁랴오에 와서 나와 동창동지 최성순을 찾아 (그의 자형 권오상씨도) 비밀회의를 했다(1945년 7월 중순). 미구에 연합군이 총공격을 할 것에 대비하여 각기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다가 일단 통지가 있으면 선양에서 합류하여 조국 광복을 위한 무장진군을 하자는 것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광복

    만남이 있은 후 박소진은 베이징으로 돌아가고 최성순은 퉁랴오에 남았다. 주타이로 돌아온 박재호는 비밀리에 동지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만간 일제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이 되리라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다. 일제가 최후의 발악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신했다. 그는 승리하리라는 믿음에 부풀어 비밀리에 항일무장단체를 만들었다. 바로 조선독립선봉대 제1지대다. 그 성원은 다음과 같다.

    양재룡(梁在龍) 현공서 토목고장(土木股長)김덕량(金德梁) 현공서 총무과최중렬(崔重烈) 현공서 연무고(煙務股)백순흠(白順欽) 현공서 인사고마장각천(馬長各川) 현공서 농업고윤기준(尹基俊) 현공서김자길남(金子吉男) 현공서 특무고 감독경위(特務股監督警尉)진고륜(陳孤?) 현공서 특무고 감독경위김임출(金任出) 현공서 사법고 평경부(司法股平警付)계승수(桂承秀) 현공서 보안고(保安股) 평경부김월서(金越瑞) 현공서 보안고 평경부임영순(任榮淳) 현공서 병사실(兵士室) 평경부이지방(李志芳) 현공서신농(神農) 주타이가공소남상진(南相鎭) 협화회 보도부(協和會輔導部) 만선일보지국최영화(崔泳華) 사법대서(司法代書)양조희(梁朝熙), 장용림(張用霖), 차건(車健), 이희동(李熙?), 김원경(金元經), 박재복(朴在福)

    이들은 쌀 가공업을 하는 구성공사(九盛公司)에 근무했다. 박재호는 또 남산학교, 흥농합작사(興農合作社), 여관(旅館), 음식점, 세탁소 등에도 동지들이 있었다면서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광복은 그들이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무정부 상태의 혼란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아시아를 강점하던 일본은 본토에 원자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투항했다. 대세는 변하여 한민족은 36년이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드디어 광복을 맞았다. 박재호는 광복을 맞아 미친 듯이 애국가를 부르다 잠이 든 친구들의 행복 어린 모습을 보면서 ‘해방(解放)’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그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해방이란 무엇인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던 우리가 마음대로 모든 것을 보게 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던 우리가 해방의 종소리를 듣게 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던 우리들이 “우리나라 만세!” “조선독립 만세!” “둥베이 광복 만세!”를 목청껏 외치게 된 이것이 바로 해방일 것이다. 야수와 같은 왜놈들이 반만년의 역력한 역사를 가진 단민(檀民)을 총칼로 짓밟아 왔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조선은 독립국가로 거듭나게 되었고 조선의 만백성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부르고 싶은 노래 애국가와 ‘단군기념가(檀君紀念歌)’를 마음껏 부르게 되었다.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고난의 나날에 우리는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참으로 사람다운 자유의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 번째의 압박과 침략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이 우리를 위하여 줄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위대한 해방을 영원히 유지해야 한다. 영구히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자! 이것이 곧 영구한 해방일 것이다.

    박재호는 이 글을 쓴 시간을 단기(檀紀) 4279년 2월1일 오후 12시15분이라고 적었다. 그는 광복을 맞은 순간부터 일제의 연호인 소화(昭和)와 괴뢰 만주국의 연호인 강덕(康德)을 버리고 단기와 서기로 일기의 시간을 표기했는데, 그것도 단기를 앞에 두고 서기는 괄호 안에 참고수치로 기록했다. 그만큼 조국과 민족이 그에게 중요한 존재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광복을 맞은 한민족의 기쁨과 흥분은 잠시였다. 전후의 새 질서는 금방 잡히지 않았다. 친일파는 단죄가 무서워 부랴부랴 도망을 쳤다. 관공서나 경찰서에서 같이 근무하며 죄를 진 사람들은 박재호를 보고 함께 떠나자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일제의 관공서에 근무했고 경찰로도 있었지만 양심에 꺼리끼는 일은 하지 않은 그였다. 오히려 여러 가지로 한국민을 도와줬으므로 광복 후 친일파를 숙청할 때도 그는 별고가 없었다.

    노자라도 가진 사람들은 너도나도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노자를 마련할 수 없어서 귀국일자를 뒤로 미뤘다. 추석을 앞둔 때라 누렇게 영글어가는 한 해 농사를 차마 버리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귀국민을 반겨줄 만한 조국도 없었다. ‘민족의 조국은 양분의 양상이 분명해지고 자체 곤경에 빠져 우리를 돌볼 경우가 아니었다.’(박재호의 ‘주타이현 조선민족사’에서)

    그리고 둥베이는 일시적으로 무정부 상태의 대혼란에 빠져 들었다. 광복 직후 3일 만에 신징에서 현정권(縣政權)이 들어섰으나 무효로 되었다. 그리하여 원래의 위만주국 관공서가 임시로 유지회(維持會)와 치안대(治安隊)를 조직했다.

    그런데 광복과 함께 재중(在中) 조선인은 일본인과 똑같이 중국인에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됐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일제의 민족 이간책 때문이었다. 일제 치하의 만주국에서 조선인은 일본인 다음으로 허울뿐인 2등 공민의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둥베이 땅에 새 질서가 채 잡히지 않은 동안 분노한 중국인들은 도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욕하고 때리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죽였다. 그러한 상태가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뒤미처 둥베이 땅을 무대로 벌어진 국공 양당의 국내 전쟁이 4년 동안 지속됐다.

    조선인 자치기관을 만들어

    박재호는 동포들이 당하는 참혹함과 억울함을 외면하고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었다. 자신과 가정의 안위만 생각하고 훌쩍 떠날 수도 없었다. 그는 동포대중을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만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험한 세상에서 견디는 이유’라는 제목의 일기에 아래와 같이 밝혔다.

    가도 오도 못하는 이 내 신세여간다면 어디로 가고 안 가면 또 어디에 있을 건가나는 아직 큰 바람도 있지 않다다만 생명이나 유지한다면 만족이다여기도 동포를 위한 일터가 있다어디로 간다는 말인가함부로 가는 자가 일꾼인가여기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면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고 나도 가고야 말리라그러나 아직은 손도 부족이고 갈 처지도 아니다여기에 나의 직장이 있고 일할 자리가 있다

    새로운 시대에 박재호는 이전의 박재호가 아닌 새로운 일꾼으로 거듭났다. 묵은 사유를 가진 어제의 일꾼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이상을 가진 새 일꾼이 된 것이다. 그는 광복이 되어 나흘째 되던 8월19일, 주타이현 내의 여러 계층과 종파의 동포인사들을 결집해 과도기적인 조선인 자치기관을 만들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오직 자력소생(自力蘇生)과 유지발전의 길을 모색하려는 의도였다. 후에 그 조직은 독립당 산하 주타이현조선인회(일명 교민회(僑民會)라고 함)로 되었다. 양조희(梁朝熙) 옹이 회장이 되고 박재호가 상무 부회장(후에 회장)을 맡았다. 8월 말에 독립군 출신의 장승해(張承海, 일명 用霖)씨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봉사하기로 결심한 두 청년 박춘덕(朴椿德)과 김이남(金二男)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각 지방에 분회를 조직해 주타이현 내 조선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교민회가 조직됐다.

    (교민회의)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중국 당국과 우리 민족의 생계를 위한 일들을 추진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순 교민의 입장에서 중국 내정에 개입하지 않았기에 국민당과 공산당 두 개의 적대적 정부와 두 개의 적대적 군대의 허용(許容)을 받았다. 또 둘 다 우리를 의심도 했으나 결국은 존속하게 되었다. 1947년이 되자 (국민당 통치시기) 우리는 향상(向上) 발전하기 위하여 각 조직(민회와 청년 및 구제회)을 정돈하였다.

    가 : 민회조직회장 : 장용림 1947년 가을 청산당함부회장 : 박재호 1947년 가을 회장대행총무 : 방성원(方成園)농사 : 우종현(禹種賢)민생 : 이희동(李熙?)사업 : 김원경(金元經)문서 : 김의근(金義根)

    나 : 청년단현 본단장(縣本團長) : 박재호현 간사장(縣幹事長) : 김의근현 간사(縣幹事) : 박춘덕 김훈봉(金壎鳳)현 아래 지단장(支團長)으로는 허우진툰(后巾屯)에 장선덕(張善德), 인마허에 전두칠(全斗七), 우수린(樹林)에 황수범(黃壽範), 강삼진(姜三眞), 자자툰(賈家屯)에 백순흠(白順欽), 난툰(南屯)에 김의근(겸직)이었다.

    다 : 구제회(救濟會) 주임은 박재호가 겸임

    지방분회와 청년지단은 자체로 조절하되 대체적으로 변함이 없었고 구제회는 과동난(過冬難)을 해결하기 위함이었기에 자연 해소되었다.(박재호 저 ‘주타이 조선민족사’에서)

    당시 청년단은 어떤 일을 했는가. 민국 35년(서기 1946년, 단기 4279년) 12월15일에 발간된 지린성 주타이현 한교청년단보(韓僑靑年團報) 제2호에 실린 청년단의 강령과 당면 임무를 보면 청년단의 역할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단보는 이렇게 기록했다.

    강령

    一 우리는 심신을 수련하여 우리 청년의 소임을 다하려 함.二 우리는 중한 양국간의 공고한 우호관계를 가지려 함.三 우리는 우리 사회의 낡은 껍데기를 벗기고 새 생활운동을 추진하려 함당면 임무一 정신적 단결과 물질의 제공으로 우리 단체를 공고히 할 것二 정신적 수련과 신체의 단련을 즉시 실시할 것三 모든 행동을 우리가 솔선수범할 것四 국문(한글) 보급운동(문맹퇴치)을 전개할 것五 소년들의 지도교양을 실시할 것六 제약부위(濟弱扶危)의 실천을 적극 전개할 것七 우리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며 대동단결할 것八 강제혼인의 제도와 허례폐풍(虛禮弊風)을 반대할 것九 타지 청년단체와 연락을 긴밀히 할 것十 주타이현 한국교민회를 지지할 것十一 확건운동을 활발히 시행할 것十二 일본화의 습관을 철저히 폐지할 것十三 한중 양 민족의 친선의 구현을 촉진하기에 노력할 것본단인사(本團人事) 본단장 : 朴在浩간사장 : 金義根간사 : 朴椿德 金壎鳳

    동포 위해 구제회 결성

    광복 1주년에 즈음하여 박재호는 지난 1년 동안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과거에 같이 살던 사람들과 같이 살며, 또한 여전히 이곳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신진 각계 인사들과 선배들과 손을 잡고 이 과도기 또는 혁명기에 미력이나마 공헌하고 있다.

    (주타이현 조선인회 본부 성원에는) 별별 인물이 혼잡하여 형세가 자못 곤란하였다. 자연 도태와 강력한 인물 개조로 일은 잘 되어 갔다. 나는 상임간사의 직무를 내놓고 외무부장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성심성의로 모든 유혹과 위험을 무릅쓰고 일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돌진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우리의 당면한 문제해결에 한 힘이 되기를 바란다. 이리하여 둥베이의 새 건설에 협력하고 나아가서 조국건설을 위해 전력을 다해볼까 생각한다. 나는 평화가 곧 도래하며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이 곧 실현될 것임을 믿는다. 그것을 위해서 동포들은 하나같이 단결하여 자강자립할 것을 바란다.

    이와 같이 비장한 각오를 지닌 그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희망을 갖고 분투했다.

    그러나 형세는 갈수록 준엄했다. 국공(國共) 양당(兩黨), 양군(兩軍)의 격렬한 내전은 둥베이 전체를 전화(戰禍) 속으로 밀어넣었다. 특히 주타이는 정권 교체와 군사 진퇴가 빈번한 고장이 됐다. 따라서 조선인은 생불여사(生不如死)의 처지에 놓였다. 사람들은 포화를 피해 농토를 버리고 피란 다니기에 바빴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이들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의 의심 대상이 되어 가볍게는 문초를 당하고 중할 경우 죽임을 당했다. 조선인은 국공 양대 세력의 틈새에 끼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때 박재호는 동포대중을 위한 사업에 모든 것을 바쳤다. 동지들을 규합해 산더미처럼 쌓인 난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위만(僞滿·만주국) 때 일제의 힘을 빌려 한족(漢族) 지주의 토지를 강제 수매해 수전을 개척한 인마허 농장에서는 광복과 함께 갈등이 되살아나 중국인과 조선인 간 유혈사건으로까지 연장선을 그어갔다. 중국인이 농산물을 훔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징에 가서 대한민국 청년무장을 불러와 벼 도적을 총살했다. 그 보복으로 한족은 상류에서 인마허 강둑을 터뜨렸다. 농장의 논 전체가 물에 잠겼고 곡식 한 홉 거두지 못했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다.

    박재호는 구제회를 결성했고 친히 주임을 맡았다. 그리고 전 현의 민회를 동원해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쌀이 있는 사람은 쌀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내서 함께 엄동설한을 이겨나갔다.

    등 돌린 동족들

    단기 4280년 2월3일 오전 10시, 천지간에 어디랄 데 없이 백설이 휘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박재호는 농사부장 우종현과 함께 전(全)만주 교민회 총회 참석차 주타이를 떠났다. 다음날 창춘에서 선양행 급행열차로 갈아탔다. 3등표라서 이른 아침에 떠난 열차가 오후 5시 선양에 도착할 때까지 곤욕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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