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중국의 힘을 빌려 부패한 정부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김옥균. 현실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부족했지만 모략이 없고 순진했다.
“상하이에 가지 마시오, 절대로. 위험하오.”
옥균이 중국에 간다고 하자 후쿠자와는 만류했다. 이날의 만남은 두 사람의 ‘영결(永訣)’의식이 되고 만다. 기이한 인연이었다. 10년 전 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인천에서 치도세마루를 타고 일본에 도망쳐 왔을 때, 처음 머문 곳이 바로 도쿄의 미타(지금의 게이오대학 일대)에 있는 후쿠자와의 집이었던 것이다. 첫 유숙지를 내준 사람과 최후의 작별인사. 운명의 수미일관이라고 할까.
후쿠자와는 정치인 고토 조지로와 함께 옥균의 인생을 바꿔놓은 인물이다. 옥균이 그들을 만난 것은 1882년 생애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였다. 후쿠자와는 이미 일본에 서양 사정을 소개하고 문명개화를 부르짖어, 선각 지식인 중에서도 국사(國師)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가 김옥균의 가슴에 개화 쿠데타의 불을 붙였다.
고토는 이타가키 다이조와 함께 조선의 쿠데타를 지원해서 중국의 영향력을 누르고 일본 세력권을 넓히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고토는 옥균에게 명성황후 정권을 뒤엎을 쿠데타에 필요한 자금을 대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고토와 이타가키는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중국이 전쟁을 벌이자 도쿄에 주재하던 프랑스 공사 생퀴지를 만나 은밀히 ‘조선의 쿠데타 자금 100만달러’를 요구한 것이다. 두 일본 정객은 “조선에서 쿠데타가 나면 아시아에서 중국세력은 몰락한다. 바로 프랑스가 바라는 바 아닌가?”라며 미리 내는 ‘수익자 부담금’조로 쿠데타 자금을 대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안 일본 정부가 위험한 외교 도박으로 여겨 방해하는 바람에 고토의 공작은 흐지부지됐다. 모두 갑신정변 이전의 비화다.
김옥균의 중국행을 만류한 사람이 또 있다. 당시 외무차관 하야시다. 옥균이 하야시를 만난 때는 중국과 조선의 설날이던 2월9일. 하야시는 말했다.
“가지 마시오. 중국은 조선 정부의 환심을 사려 애쓰고 있으니, 조선 정부의 원수인 당신을 억류하거나 붙잡아 넘기려 할지도 모르오. 중국이 조선에 줄 선물로 당신만한 것이 또 있겠소?”
옥균은 10년 유랑 끝에 이판사판이 되어 있었다. 돈도 건강도 동나고, 너구리 같은 일본 정객의 지원도 더는 기대할 수 없었다. 중국에 가서 세 치 혀로 마지막 담판을 벌이면 승산이 있을 듯싶었다. 설득 수완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중국의 이경방과 그의 양부 이홍장(李鴻章)을 협력자로 돌려 세울 수 있다고 과신했다. 옥균이 말했다.
“중국이라도 상하이의 조계(租界)는 중립지역이므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하야시는 반박한다.
“중립지라는 것은 외국인이 자국의 법률로 보호받는 땅을 말하오. 그러나 당신이 거기에 가면 일본의 보호도 못 받고, 오직 중국과 조선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소. 위험천만이오.”
그래도 옥균은 막무가내였다. 하야시는 옥균의 주장과 표정을 나중에 이렇게 전했다.
‘김옥균은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갈 모양이었다. 나가사키에서 이일직(李逸稙·명성황후 일파가 김옥균 암살을 위해 파견한 자객.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의 사람(암살범 홍종우(洪鍾宇)를 지칭하는 듯)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받을 돈이라도 있어서 만나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실은 이일직이 노리는 바가 있어서, 김이 중국에 가니까 거기 편승해 무언가 일을 꾸미는 성싶었다.’ (고균 김옥균 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