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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⑪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자, ‘정관(靜觀)’!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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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주의’의 바랜 꿈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1894년 중국에서 조선으로 송환돼 능지처참된 김옥균의 시체. 양화진 처형장에 효수해놓은 것을 찍은 것이다.

박영효도 옥균을 말렸다. 상하이에 가지 말라고. 박은 10년 전 갑신정변의 동지로 한배를 타고 도망쳐 온 망명객이다. 두 사람은 성격과 스타일이 다르고, 개화혁명을 위해 손잡은 것말고는 어딘지 잘 맞지 않는 대조적인 인간형이었다. 그래서 같은 도쿄 하늘 아래서도 남처럼 지냈다. 조선 정치인들의 불화와 분열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에 이르는 병’일까. 시리도록 외로운 망명객의 처지에도, 서로 손잡고 기대지 않고 각개약진으로 일관했다. 박영효는 옥균이 죽은 뒤 춘원(春園) 이광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술이다. 실로 외교에는 능했다. 문장력, 화술, 시, 글, 그림,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德)이 모자라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략이 없다는 것은 순진하다는 의미다. 박영효의 인물평을 뒷받침하는 사건도 있었다. 1882년 1월8일자 일본 ‘초야(朝野)신문’에 난 기사를 보자. 서울의 대원군이 며느리 명성황후의 정권과 암투를 벌일 때 일본 망명객 옥균과 박영효에게 사람을 넣어 제휴의 손길을 내민 적이 있었다.

‘조선에 사는 오가와라는 일본인이 국왕의 아버지 대원군을 찾아갔더니 대원군이 조선 정부의 개혁에 대해 말했다. 오가와는 대원군의 비밀 지령을 받아 박영효와 김옥균에게 각각 전달했다. 김옥균은 이를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금방이라도 사람을 데리고 서울에 달려가 대원군의 뜻에 보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박영효는 근직(謹直) 온후하고 평소 세상일에 손을 뗀 채 선학(禪學)에 빠져온 사람답게 이를 반대하고, 오히려 김옥균의 경거(輕擧)로 조선에 대환(大患)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면서 김옥균을 만류했다. 그래도 김옥균은 그 충고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귀국을 서둘렀다.’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로 금릉위라 불렸다. 권력투쟁의 맥락을 꿰뚫어보는 안목에서 확실히 옥균보다는 한 수 위였다. 복합적으로 보고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박은 옥균에게 상하이에 가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망명객이 이홍장을 설득하고 그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꿈도 꾸지 말아야 해.”

옥균은 반박한다.

“이홍장을 만나 중국과 일본이 제휴해서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이홍장도 이해할 거야. 세 나라가 이해관계를 평화롭게 조절하면 조선의 독립이 성취되고 조선 중국 일본의 동맹, 즉 삼화(三和)가 이루어질 거라 믿네.”

“이홍장이 우릴 알아주지도 않거니와, 설령 중국의 힘을 빌려 명성황후 정권을 몰아낸다 해도 중국에 종속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야.”

박영효의 반박이 이어지지만 결국 옥균을 말리지 못한다. 결과를 놓고 보면, 김옥균은 유랑에 지친 탓인지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상향을 그려놓고 현실을 꿰어 맞추는 어리석음이라고 할까. 역시 박영효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이다.

이 무렵 옥균은 부쩍 ‘삼화주의’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이것은 원래 후쿠자와의 발상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삼국이 손잡고 화목과 발전을 도모하면 아시아에 평화가 자리잡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비전이다. 그러나 김옥균이 삼화주의에 관심을 둔 때는 후쿠자와가 그 구상을 버린 지 한참 뒤였다.

후쿠자와는 이미 조선과 중국을 나쁜 친구, 즉 ‘악우(惡友)’로 규정하고, 악우와 놀다 손해 보느니 서양과 손잡고 악우에게 칼을 들이대 서양 제국주의의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에 기울어 있었다. 그야말로 ‘모략이 없고’ 순진한 옥균이었다.

왕명칙서를 지닌 자객

사신(死神)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옥균은 무엇인가에 쫓기듯 상하이 여행을 강행했다. 총리와 대신을 지낸 오쿠마 이누카이나 고토 같은 거물 정객에게도 찾아가 중국 여행을 떠난다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도쿄 유라쿠초 집에서 짐을 싸갖고 나와 해변의 시바우라(芝浦)에 있는 ‘해수욕’이라는 여관 겸 요릿집에 며칠을 묵었다.

1894년 3월9일 저녁 9시58분, 옥균은 시나가와(品川)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오사카로 향했다. 수행원은 주일 중국공사관 통역 오보인(吳?仁), 수행 보디가드 격의 청년 와다(和田延次郞)와 사진사 겸 수행원 가이(甲裴軍治) 단 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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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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