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손학규, 진대제, 이계안, 현명관, 정몽준, 김혁규‥. 이들은 ‘CEO 출신 정치인’이거나 ‘CEO형 정치’를 전도하는 정치인이다. 요즘 CEO형 정치인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뜨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독불장군’ ‘가진 자’ ‘분배 경시’의 이미지도 따라다닌다. CEO형 정치의 빛과 그림자, CEO형 정치가 한국 정치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봤다.
왼쪽부터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 이계안 열린우리당 의원, 김혁규 열린우리당 의원, 현명관 한나라당 제주지사 예비후보.
그러면 그는 누구이고, 어디서 살아왔을까. 그는 자신이 CEO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차기 대권(大權) 출마 여부에 대해 물으면 그는 “이제 이 나라는 CEO형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에둘러 말한다. 서울시장의 자격에 대해선 “CEO형 시장이 확실히 좋다고 시민들이 기대하는 것 같다”고 했다. 틈만 나면 ‘CEO’를 강조한다.
그의 말이 틀리진 않은 것 같다. 언제부턴가 국민은 CEO 출신 정치인에게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이번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들도 잘나가는 CEO들이었다. 황영기 우리은행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이 그들이다. 여야 가리지 않고 이들을 영입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으나 현재까지는 헛물을 켜고 있다.
삼성그룹 출신 CEO인 현명관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한나라당 제주지사 후보로 영입됐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지사에 출마했다. 바야흐로 CEO 정치인이 각광받는, CEO 정치가 꽃을 피우는 시대다.
“1등 보수는 삼성, 2등 보수는 한나라”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진정한 1등 보수는 삼성이고, 한나라당은 2등 보수”라는 얘기도 나온다. “1등 진보인 열린우리당과 2등 보수인 한나라당이 대적하기 때문에 막상막하”라는 것이다. 진보진영과 한나라당에 대한 재계의 ‘우월감’이 드러나는 표현이다.
제각각의 이력을 가진 CEO 출신 정치인이지만 한목소리를 내는 부분이 있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혹독한 평가에서다. CEO 출신들이 그 다음에 내세우는 논리는 ‘수혈론’이다. “국내 대기업은 세계 톱 클래스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수준이 한참 뒤처져 있다. 따라서 기업경영을 직접 해본 사람의 노하우를 정치에 전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CEO형 정치가 부각된 시점은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대기업의 위상이 해외에서 크게 올라가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한나라당이 제주지사 후보로 영입한 현명관 전 전경련 부회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제주지사선거를 “‘주식회사 제주’의 CEO를 뽑는 선거”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의 CEO들이 정치분야 등 가장 낙후한 공공분야로 진출해 발전을 끌어내야 한다”고 했다.
경기지사 선거에 출마한 진대제 전 장관도 인터뷰에서 정치권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털어놨다.
“국회에 갈 때마다 우리 정치는 너무 웃긴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다들 답답하게 미래가 아닌 과거만 이야기한다. 물론 옳고 그른 것은 가치의 문제인 만큼 여야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 누가 골프를 했고, 테니스를 했고 하는 문제로 정쟁(政爭)을 할 때인가. 이런 것은 말로만 하는 ‘이빨 정치’다. 정치가 반도체처럼 국가를 지탱해주는 등뼈가 되는 게 아니라, 국민의 발목을 잡는 ‘뒷다리 정치’로 전락한 것이다.”
역시 CEO 출신인 한나라당 김태환 의원(아시아나항공 부사장, 금호피앤비화학 사장 등 역임)도 정치권에 한마디 한 적 있다.
“기업에서는 투명경영, 신뢰, 성실을 기본 바탕으로 일해왔는데, 정치판에 들어와 보니 합리적 경영 기법이 거의 도입돼 있지 않고 너무 소모적이다.”
‘기존 정치권은 낙후해 있고 비효율적이며 답답하고 웃기는 곳’이라는 평가는 CEO 출신들의 거의 일치된 의견이다. “나는 정치판에서 살아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명박 시장의 ‘정치판’도 바로 그런 곳이다.
기업인, ‘을’에서 ‘갑’으로
CEO 출신들이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권위주의 시절, 그들은 구색 맞추기용에 불과했다. CEO 출신 정치인으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를 꼽으라면 쌍용그룹 창업주인 성곡 김성곤(1913~75)을 먼저 들어야 할 것 같다. 6~8대 국회의원,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지낸 공화당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공화당의 돈줄’이었다.
그는 1971년 10·2항명 파동으로 내쫓기듯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당시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안을 둘러싼 갈등이 사단이었다. 그는 야당의 해임안을 부결시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거스른 뒤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조사관들에게 마스코트였던 콧수염을 뜯겼고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결국 박 정권에 의해 의원직을 잃고 정계에서 퇴출됐다.
성곡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정치인은 늘 ‘갑’이었고 기업인은 늘 ‘을’이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그는 이 관계를 단숨에 역전시키고 싶어했다. 정 회장은 1992년 77세의 고령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그 도전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말해오던 정 회장에게 생애 최악의 실패를 안겨줬다.
한국 현대사에서 숱한 기업인이 정치권에 몸을 담았다. 11·12대 의원을 지낸 왕상은(협성해운 회장), 역시 11·12대 의원을 역임한 권영우(대원교통 회장), 13·15대 의원 이정무(대구백화점 대표), 14·15대 의원 이재명(대우그룹 사장), 14대 의원 김동권(쌍마그룹 회장), 15·16대 의원 주진우(사조그룹 회장)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때만 해도 정치권은 기업인을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 입문시켰다. 극명한 예는 벤처기업 CEO로 잘나가던 이찬진 당시 한글과 컴퓨터 사장의 정치 입문이다.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던 그는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해 1997년 11월부터 1998년 5월까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국회의원을 했다. 그의 정치 참여는 당시로선 짜릿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찬진씨 본인은 정치에 웅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현재 드림위즈 대표인 이씨는 “한글과 컴퓨터 사장으로 있을 때 가장 큰 문제이던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참신한 얼굴을 찾던 상대방(신한국당)의 뜻과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에 대한 소회를 묻자 그는 “짧은 기간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며 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치 참여에 대해 그리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나는 애당초 30m를 달리기 위해 정치권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은 왜 마라톤을 안 뛰었냐고 평가하더라”고도 했다. ‘다시 (정치권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은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어쨌든 그는 스스로 인정하는 “성공하지 못한 CEO형 정치인”이다.
이처럼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권은 CEO 출신 정치인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CEO형 정치인의 뚜렷한 성공 족적을 찾기도 어려웠다. 한켠에선 “장사꾼은 장사나 잘하면 되지”라는 비아냥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기업인과 정치권은 ‘갑’과 ‘을’의 관계가 역전된다.
‘부(富) 창출’ CEO형 정치의 키워드
IMF 구제금융 사태는 한국사회에 ‘경제제일주의’ ‘국가경영주의’의 광풍을 몰고 왔다. 정부와 공공부문에서 ‘대기업을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국가도 지방정부도 ‘경영’해야 할 대상이 됐다. 이런 가운데 여야 정치권은 몇 차례의 ‘부패 스캔들’로 이미지가 크게 구겼졌다. 정치인은 구태(舊態)의 상징이 됐다. 자연스레 CEO가 ‘대안’으로 부상했다. 주종(主從)이 바뀐 듯하다.
열린우리당 김혁규 최고위원. 미국에서 가방 무역회사를 설립, 성공신화를 일궈낸 CEO 출신 김 의원은 경남지사 시절 스스로 ‘경남주식회사 사장’으로 불렀다. 10년간의 도백(道伯) 생활 동안 경상남도를 하나의 기업으로 보고 경남에 부가가치 높은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이윤 창출을 시도했다. 기업인의 최대 덕목인 ‘부(富)의 창출’을 정치의 키워드로 삼은 것이다. 국제 자동차 경주대회를 경남 진해에 유치한 것도 CEO형 정치인으로서 그의 성향이 발휘된 사례다. 그는 경남지사로 취임한 뒤 과감한 조직개편과 인원감축 등 구조조정을 단행, 공무원 3650명을 감원하기도 했다.
“서울대까지 나온 놈이…”
서울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열린우리당 이계안 의원은 현대캐피탈 회장 출신이다. 그는 “이명박 시장과는 성격이 다른 CEO 출신”임을 강조한다. “이 시장은 개발독재 시대에, 나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세계화된 시장에서 CEO를 지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명박 시장에 대한 그의 평가다.
“1976년 내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했을 때 이명박 시장은 현대건설 부회장이었다. 이듬해에 사장이 되더라. 오랜 기간 같이 일했고 많이 보고 배웠다. 이 시장은 청계천 복원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내놓았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청계천을 걸어본 시민은 좋아한다. 고객이 좋아하는 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임기 4년을 고려할 때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았다. 가령 뉴타운 개발을 봐라. 뒷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법, 제도, 예산의 뒷받침 없이 계획만 내놓아서 땅값을 엄청나게 올려놨다. 사업 타당성을 맞추려면 중대형 아파트나 주상복합 건물을 지어야 한다. 그러면 원래부터 거기 살던 사람은 못 살게 된다. 한 군데라면 몰라도 26군데다. 이제 변두리도 남아 있지 않다. 괴나리봇짐이나 싸서 서울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거환경 개선 사업인데, 핵심인 원주민은 떠나게 되어 있다.”
이계안 의원은 1998년 46세에 현대자동차 사장이 됐다. 그에게도 ‘샐러리맨의 우상’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현대그룹의 구조조정 작업과 경영전략이 모두 그의 머리를 거쳤다고 할 만큼 그는 ‘현대의 재사(才士)’로 통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도 특별나다. 현대차 사장으로 승진했을 때 부친에게 인사를 했더니 부친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서울대까지 나온 놈이 처자식 먹여 살리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냐?”
이 한마디에 자신의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는 것이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도 대표적인 CEO출신이다. 그의 이력은 그 누구보다 화려하다. 경기고·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국비 유학생 1호,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 삼성전자 CEO, 세계 최초 16MD램(RAM) 개발, 정보통신부 장관‥. 그는 늘 선두였다.
진 후보는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IBM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대학시절부터 마음이 끌린 반도체 분야의 선진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198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48세에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이 됐다. 진 전 장관은 ‘미스터 칩’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기존 정치인과 다른 입당식을 선보였다. 로봇이 입당원서를 제출한 것. 그랬다가 ‘공공부문 예산으로 제작된 로봇을 개인의 입당식 이벤트에 활용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기득권층일 수밖에 없는 CEO는 복합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진 전 장관에겐 ‘강남의 상징 타워팰리스 거주’ ‘자녀 국적 문제’ 같은 부정적 이미지도 있다. 유림종합건설 회장을 지낸 김양수 의원, 심로악기 회장을 지낸 심재엽 의원도 CEO 출신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CEO 출신 정치인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 ‘일을 할 줄 안다’는 점이다. 이는 평생 효율성을 추구하며 달려온 이력이 낳은 결과다.
“공무원 출신은 이렇게 못한다”
이명박 시장의 친형인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은 스스로를 가리켜 ‘대한민국 최초의 순수 CEO 출신 국회의원’이라고 말한다. 그는 1961년 코오롱 공채 1기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주)코오롱 사장 자리에 올랐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몸담았다. 당 안팎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이다.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정치인’으로 꼽힌다. 그는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탄핵역풍이 불 때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최병렬 대표가 물러난 뒤 당 대표 경선으로 분위기 일신을 노렸다. 그러나 방송사에서 한나라당의 대표 경선 토론을 방송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나라당에는 위기였다.
이때 한나라당에는 “방송사와 싸우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이상득 당시 총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총장은 당직자들을 이끌고 방송사를 찾았다. 70대의 이 총장은 아들뻘 되는 방송사 관계자 앞에서 나이가 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번만 봐주소”라며 거의 읍소하다시피 했다. 결국 방송사는 방침을 바꿔 한나라당 대표 경선 토론회를 중계방송했다. 방송사와 싸우는 건 쉬운 일이었다. 방송사를 설득하는 것은 그보다 100배 어렵지만 ‘실리’가 훨씬 많은 일이었다. 한 당직자의 회고다.
“정해놓은 목표를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무서운 의지가 느껴졌다. 체면을 차리거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공무원 출신이면 절대 이렇게 못한다. 전형적인 기업인 마인드였다.”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은 CEO형 정치인의 장점인 추진력, 효율적 일 처리, 높은 생산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CEO형 정치인은 강압과 권위로 다스려지던 정치·행정 조직에 ‘효율성’을 도입한 공로도 있다. 군 출신과 보스형 정치인들이 다스리던 정치조직에 ‘시스템적 정치문화’가 스며든 데는 CEO형 정치인의 기여가 컸다.
이 시장은 서울시 산하 시립미술관을 야간에도 개장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자율성의 고부가가치’에 일찍이 눈뜬 기업문화가 접목된 것이다. 오전 10시 문을 열어 오후 5시에 문을 닫는 시립미술관은 낮에 일하는 대다수 시민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경기 북부의 역사를 바꿨다”
이 시장은 시청 회의석상에서 에둘러 말했다. “내가 이번에 전시회에 가보고 싶은데 낮에는 바빠서 안 되고 밤에 가야 하는데….” 시립미술관은 이 시장을 위해 특별 개장했다. 며칠 뒤 그는 “내가 아는 사람도 밤에 가고 싶다는데”라며 이 문제를 다시 언급했다. 몇 달 후 이 시장은 시립미술관측으로부터 야간에도 개장하겠다는 보고를 듣는다. 이 시장의 얘기다.
“사실 시장이 지시하면 된다. 밤 9시까지 열라고 하면 가장 빨리 해결된다. 그러나 내가 시장직을 떠나면 도로 5시로 당길 것이다. 억지로 명령을 받고 한 것이니까. 두세 달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장점을 체험해서 자발적으로 결정하도록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CEO형 정치인에게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은 뛰어난 ‘국제감각’이다. CEO 출신은 아니지만 ‘CEO형 지사’를 표방한 손학규 경기지사(영국 옥스퍼드대 박사)는 외국 첨단기업의 경기도 유치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중국이나 대만으로 갈 뻔한 100억달러짜리 LG필립스 공장을 파주에 유치한 것은 ‘경기 북부의 역사를 바꾼 일’로 평가받는다. ‘한류우드’ ‘차이나 타운’ ‘영어마을’ 등 그가 벌이는 사업은 대체로 ‘세계 속의 경기도’라는 그의 콘셉트와 일치한다. 재선 국회의원 A씨는 세계화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광복 직후 ‘세계화’에 가장 앞서 있던 정치인은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이승만은 미국, 김일성은 소련의 사정에 정통했다. 결국 그 두 사람이 집권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세계화에 가장 앞선 세력은 군대였다. 박정희는 미국 유학파였고 당시 군대는 미국의 선진 조직 시스템을 최초로 받아들인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지금은 기업인의 글로벌 감각이 가장 깨어 있다. ‘가장 세계화된 세력이 당대를 리드한다’는 법칙은 그리 틀린 적이 없다.”
2002년 대선에 실패한 직후 열린 한나라당 워크숍에서 한 대학교수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보수 진영은 진보 진영이 갖지 못한 ‘세계화’라는 뛰어난 장점을 지녀왔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보수층은 이 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세계적 축제인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세계화의 상징’ 정몽준을 진보 진영에 뺏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회창에겐 세계화의 이미지가 없었고, 노무현은 정몽준과 단일화함으로써 ‘세계화’의 후광을 누렸다. 한나라당이 질 수밖에 없었다.”
‘세계화된 CEO형 정치인’은 때를 잘 만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CEO출신 정치인들이 가진 기업경영 마인드가 정치문화와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CEO는 이해타산이 빠르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당장 손해를 좀 보더라도 의리와 호기를 중시하는 풍조가 있다. ‘돈’에 대한 접근법도 다르다.
이명박 시장의 경우 정치권 입문 후 ‘왕소금’이라는 말도 들었다. “공짜를 즐기면 공짜 인생이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난 3월 이 시장의 방미(訪美) 기간 중 논란이 된 ‘돈 없는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발언도 사실 이 같은 충돌이 와전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 시장은 “정치인이 돈을 너무 쉽게 쓴다. 땀 흘려 번 돈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마이너스로 신고했는데 나보다 돈을 더 펑펑 쓰더라”고도 했다. 이런 마인드에서 나온 발언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장은 매우 질박한 언어를 구사한다. 이른바 ‘노가다 언어’다. 기업 경영에선 커뮤니케이션이 바로바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엔 군더더기가 없다. 그러나 정치인의 언어는 다르다.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법이 없다. 에둘러 간다. 여기서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이 시장의 잦은 설화(舌禍)는 CEO시절부터 몸에 밴 솔직담백한 언어습관이 한 원인일 수도 있다.
기업은 실적에 따라 등수가 매겨지는 무한경쟁 시스템이다. 일 잘하는 사람, 능력 있는 기업만 살아남는다. CEO형 정치인은 이런 체제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일 못하는 국민을 정리해고하고 도태시켜선 안 된다. 약자를 더 끌어안아야 한다. 성장도 중요하지만 국민통합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정치다.
양극화와 CEO형 대통령
윤덕홍 전 교육부총리는 사석에서 “CEO형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유를 윤 전 부총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양극화 갈등이 심각한 한국에는 CEO형 대통령이 적합하지 않다. 교육자의 관점에서 볼 때 정치지도자는 3가지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첫째, 엘리트를 집중 육성해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 둘째, 빈곤층이나 노동자 등 약자를 잘 돌봐야 한다. 셋째, 이 셋째가 사실 가장 중요하다. 엘리트와 약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를 잘 조정해야 한다.
대통령이 엘리트인 재벌을 지원하면 약자는 ‘특혜다’라고 반발할 것이다. 약자에 신경을 많이 쓰면 엘리트 쪽에선 ‘분배만 한다’고 비판할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되려면 이 같은 상호모순적인 정책을 조화롭게 이끌어갈 수 있는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CEO는 엘리트 육성만을 목표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감원은 극단적인 약자 배척인데, CEO는 감원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CEO형 정치인이 설령 분배에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은 그를 잘 믿지 않는다. CEO는 태생적으로 ‘엘리트 편’이기 때문이다. 결국 엘리트와 약자간 갈등 조정 기능에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 CEO는 연간 수조원의 매출을 일으키고, 수천~수만명의 직원을 진두지휘한다. 전세계를 활동무대로 삼고 일하다 보니 사물을 보는 안목도 넓다. 반면 명령하고 지시하는 행위가 몸에 배어 있다. 정치에 입문해 ‘황제 스타일’을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정치는 봉사다. 명령하는 버릇과는 상극이다.
CEO 출신인 C의원의 보좌관은 “CEO는 국회의원직과 맞지 않다”고 평가한다. “CEO 출신은 팔을 걷어붙이고 일하는 사람이다. 일하는 사람(행정부)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은 체질상 안 맞다. 많게는 수만명 단위로 사람을 부리다 보좌진 몇 명 거느리고 일하자면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CEO의 장점으로 꼽히는 ‘효율성 추구’가 정치에서는 절대가치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정부와 기업은 존재이유가 다르다. 정치에선 자원배분에서 효율성보다는 인간적 가치가 우선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논리로 CEO의 지방자치단체장 출사를 탐탁지 않게 보는 시각도 많다. 한 광역단체 공무원은 “CEO는 주주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한 사람이다. 과연 공직에 대한 의식은 어떤지 모르겠다”고 했다.
‘인간적 향취’가 더 필요하다
정치를 바꾸겠다며 쏟아져 들어오는 CEO 출신들이 정치권을 어느 정도 개혁할지는 미지수다. 이미지만으로 과대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현재까지 행정부, 자치단체, 국회에 진출한 CEO형 정치인들은 최소한 ‘부패정치 청산’엔 기여하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대다수는 돈 문제에 깨끗하다.
이들은 “정치가 국민을 위해 뭔가 해내고 있구나” 하는 기대를 갖게 해준다. ‘생산적 정치’는 많은 사람이 갈구해오던 바였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이라는 정치의 ‘본령’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CEO형 정치인들은 아직 ‘확실한 대안(代案)’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머리’만 보이고 ‘가슴’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국민은 그들에게서 ‘인간적 향취’를 더 느끼고 싶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