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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대 누운 국정원, 어디로 가나?

부검剖檢의 칼 맞을 것인가 부활復活의 칼 휘두를 것인가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수술대 누운 국정원,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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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워싱턴타임스’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해 닉슨 대통령을 사임케 했다. 이 보도 직후 ‘뉴욕타임스’의 세이무어 허시(69·현재 ‘뉴요커’ 기자)기자도 대단한 특종을 기록했다. 허시 기자는 탐사보도 전문기자로 유명한데, 그는 베트남전 종군 당시 ‘베트남판 거창 양민학살사건’인 밀라이 마을 학살사건을 보도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다(1969년).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CIA(중앙정보국)가 미국인을 불법으로 사찰하고 있다는 기사를 썼다.

CIA와 FBI(연방수사국)는 미국을 대표하는 양대 정보기관이다. 세계적으로는 CIA가 유명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는 FBI의 힘이 더 셌다. CIA는 1947년 창설됐으나 FBI는 그보다 40년 정도 앞선 1908년에 설립됐다. CIA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활약한 군 정보기관 OSS(전략정보국)에서 퇴역한 군인들로 구성됐다. OSS는 유럽과 동북아에서 주로 활동해왔으므로 CIA도 첨예한 냉전 상황이 펼쳐진 동북아와 유럽 등 국외에서 활동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을 단속했던 FBI는 미국 최고의 수사정보기관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FBI 국장을 맡은 이가 에드가 후버다. 후버 국장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24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48년간 FBI 국장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반세기 동안 FBI 국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점이 잡힌 신임 대통령은, 전임은 물론이고 전 전임 대통령 때부터 FBI를 이끌던 후버를 사퇴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후버 국장은 국외(國外) 정보기관으로 창설된 CIA가 빠르게 성장하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국외 정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미국인이 소련 등 적국에 협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CIA는, 이들을 내사하고 수사할 권한을 달라고 했다. 후버 국장은 이 요구를 일거에 꺾어버렸다. 거의 모든 정치인의 약점을 쥐고 있던 그는 국회의원들을 움직여 미국 내 수사권은 FBI만 갖는다는 안보법을 제정케 한 것. 그후 지금까지 FBI는 수사권을 독점해왔고 CIA는 수사권이 없는 정보기관이 됐다.

NYT 허시 기자의 대폭로



1973년 베트남전 휴전 때까지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CIA는 ‘그린베레’로 불리는 미 특전사와 함께 베트남에서 전선 공작을 펼쳤으므로 미국 내 반전주의자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CIA는 반전주의자들의 통화를 감청하고 우편을 검열하는 방법으로 이들에 대한 파일을 만들었다. 때로는 반전주의자 집에 침입해 빼낸 자료로 파일을 보강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각국의 정보기관은 이보다 더한 공작을 했고 CIA는 전쟁에 참전한 조직이었으므로 이런 활동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CIA의 이러한 활동은 법적 근거 없이 수사권 또는 내사권을 행사한 것으로 명백한 위법활동이었다. 허시 기자는 수사권도 없는 CIA가 미국 내에서 정보 및 수사 활동을 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조야가 발칵 뒤집혔다. 그렇지 않아도 정보기관의 통신감청을 염려해온 정치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1975년 1월 상원에서는 프랭크 처치 의원을 위원장으로 한 ‘정보활동에 관한 정부의 활동을 연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the Senate Select Committee to Study Governmental Operations with Respect to Intelligence Activities)’라는 긴 이름의 특위가 구성됐다. 약칭 ‘처치 특위’다. 국민적 관심 덕분에 처치 특위는 CIA와 FBI, NSA(국가안보국, 감청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 최대의 정보기관) 등 여러 정보기관에 많은 양의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관계자를 불러 조사했다.

그로 인해 각 정보기관이 펼쳐온 공작과 불법행위가 공개돼 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처치 특위는 조사 결과를 모아 1976년 4월 방대한 양의 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해체됐는데, 이 보고서에는 CIA가 쿠바의 카스트로를 비롯해 반미국가의 지도자를 암살하려고 한 충격적인 공작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CIA를 중심으로 한 미국 정보기관은 X파일 사건을 겪은 국정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처치 특위가 해체된 1976년 5월 상원이 정보위원회를 만들고, 1977년 7월엔 하원도 정보위원회를 설치해 CIA 등에 대한 감독과 통제에 나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의회에 정보위원회를 설치하게 한 시대상황이다.

1972년 2월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 사상 최초로 미중 정상회담을 열어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5월에는 소련과 훗날 ‘SALT-Ⅰ(솔트 원)’으로 불리게 된 전략무기감축협정을 타결지었는데, 이로써 두 나라는 사상 처음으로 양국이 갖고 있던 핵무기 중 일부를 해체했다. 이듬해 미국은 파리에서 베트콩 및 월맹과 베트남전을 정전하는 협상을 마무리했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WTO(바르샤바조약기구)가 첨예하게 대립해온 유럽에도 ‘춘풍(春風)’이 불었다. 1972년 12월, 유럽 냉전의 양축을 이룬 서독과 동독이 불가침을 약속하는 역사적인 기본조약을 맺었다. 그러자 핀란드를 중심으로 한 중립국들이 유럽의 긴장 완화를 위해 NATO와 WTO 가입국을 아우르는 제3의 조직 CSCE(유럽안보협력회의)를 만들려 했다(1975년 발족). 유럽에서도 냉전을 끝내고자 하는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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