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위대한 시대라 위대한 개인도 많다. 하지만 위대한 개인 중심의 사회가 갖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면 그도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확보된’ 위대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보통 사람들의 어리석음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는 ‘정의와 다원적 평등’이라는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획일적 평등주의에 내포된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공동체의 특성을 감안한 다원적 평등을 제안했다. 공동체 특성에 따라 평등의 절대량은 상대화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탄력 있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거리에서의 인권과 목욕탕에서의 인권은 그 프리즘이 다를 수밖에 없다.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있던 사람이 그대로 거리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목욕탕에 들어온 사람이 옷도 안 벗고 탕 속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권리’라는 보편적 권리와 숭고한 정신을 추구하고 관리하라고 설치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왜 그렇게 내리는 결정마다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섣부르게 추진해 우리 사회에 분쟁과 갈등, 반목과 언쟁이라는 열매를 뿌려대는 것인지 모르겠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취지도 좋고 맡은 일도 대체로 다 좋아 보인다. 그런데 가끔 뒷맛이 안 좋은 것은 인권위가 몰고오는 반향의 열매가 쓰기 때문이다. 인권위가 무슨 말만 하면 우리 사회는 패가 갈린다.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고 신장시키겠다는 취지의 단체가 내어놓는 논평이나 발언인데, 그로 인해 보혁(保革) 갈등이 생기거나, 계층간의 반목이 생기거나, 사회적 약자와 강자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 참 신기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좋은 선생인데, 실상은 매일같이 학생들 싸움만 시키는 선생 같아 보일 때가 있다. 인권위의 방침에 대해 반대는커녕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분위기를 인권위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랬다가는 인간의 권리에 대항하는 일종의 ‘꼴통보수’로 전락해버리는 작금의 ‘분위기’가 과연 인권위가 바라는 바람직한 인권환경인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보혁 갈등, 계층간 반목 양산
몇 해 전, 프랑스의 한 남자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변론한 일이 있다.
“저는 아파트에서 대마초를 기르는 사람에겐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 없습니다. 제가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면 그는 필시 대마초를 더 많이 기르고 더 많이 피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는 아버지였고, 대마초를 기른 이는 그의 아들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아버지는 아들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그것이 대마초를 기르는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것은 인권이 인간의 보호막이 아니라 되레 무기가 되어 가족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이루는 인간관계를 파괴한 경우이다.
우리에게는 인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인권을 가지고 무엇을 하며, 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저버린다면 인권도 파괴적일 수 있다.
학교에서의 인권에 대해 살펴보자. 어떤 형태의 학교이건 간에 학교가 추구하는 권장사항이 그 학교의 정체성이다. 학교는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을 권장하는 곳이다. 최소한의 법적 한계가 끌고 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권장사항이 끌고 가는 공동체다. 그렇지 않다면 학교는 필요없다.
‘최소한의 법적 한계’는 대한민국 헌법 분량으로 볼 때 얼마 되지도 않는다. 학생이건 교사건 이를 복사해서 허구한 날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서로 몇 합 겨뤄보고, 그래도 안 되면 틈나는 대로 헌법 위반 여부를 놓고 언쟁을 벌이고, 학교 변호사 제도를 두는 그런 학교를 우리는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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