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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민의 쓴소리

“국가인권위는 ‘개인인권위’나 ‘소수자인권위’로 개명하라”

  • 이경근 한국외대 부속외고 교사 soli-deogloria@hanmail.net

“국가인권위는 ‘개인인권위’나 ‘소수자인권위’로 개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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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는 ‘개인인권위’나 ‘소수자인권위’로 개명하라”

시민단체의 요구로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민 전체의 인권 향상보다는 소수자들의 인권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인권’ 학생이 주말에 외출했다고 하자. 학교 밖에서는 나인권 학생이 휴지를 버렸을 경우에만 규제가 따를 수 있다. 휴지를 줍지 않았다고 해서 과태료를 물리거나 문제 삼는 경찰은 없다. 하지만 학교 안에 들어오면 학생은 휴지를 줍는 행위에 대해서도 긴장관계에 놓이게 된다. 선생님들은 주변에 휴지가 있으면 주우라고 말하고, 일부 적극적인 선생님은 솔선수범해서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주우면서 학생이 이런 행동을 따라 하기를 기대한다.

사회는 주로 의무행위에 대해 강제하는 공동체이고, 학교는 권장사항을 강제하는 공동체다. 그래서 사회에서 허용되는 행위가 학교 안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수 있다. 학교는 인권의 중요성을 가르치면서 또한 인권을 강제해야 하는 모순된 면도 있다.

심지어 인권신장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수업시간에도 인권은 유보된다. 인권신장에 관한 수업을 받을 때조차 휴대전화 벨소리를 진동으로 바꾸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인권침해일 가능성은 작다. 휴대전화 신호음을 진동으로 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지만 그 자유는 주변의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알맞게 조정되고 유보된다.

인권위 반대 = 인권 반대?

언제부터인가 사회 분위기 때문에 대한민국 교사들은 마치 ‘국가공인 인권침해사’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자괴심을 갖게 됐다. 지금 대한민국 교사들은 월급 받아가면서 ‘휴지 줍기’라는 인권침해 행위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학교는 휴지를 버리지 않는 소극적 자유 유보에 머무르지 않고 휴지가 보이면 줍자고 말할 수 있는 공동체다. 미용학교에서 머리 자르는 것을 인권침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공동체마다 인권의 프리즘은 다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인권위라는 용어에 대해 다소 주눅이 들거나 때론 ‘속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사실 이건 나로선 굉장히 중요한 기분이다. 특히 인권위의 어떤 결정이나 방침에 대해 내가 반대발언을 하거나 혹은 그런 마음을 품을 때 나는 인간의 권리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는 상황이라 그렇다. 그 이유는 바로 지나치게 넘치는 인권위의 레토릭(rhetoric)이다. ‘인권’이라는 용어는 사실 반박을 제어하는 엄청난 레토릭의 산물이다.

내가 만일 대한민국 국방부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고 가정하면 나는 군(軍)에 반대하는 것이 될 터이고, 만일 교육부의 방침에 반대했다면 대한민국 교육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다소 국지적인 반대와 달리 소위 ‘인권위에 대한 반대’는 그 스케일이 전면적이고 거대해진다.

다시 말해 인권위의 어떤 방침에 대해 유보하는 발언을 하면 나는 자연스레 어떤 위원회 자체나 그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라는 굉장한 보통명사에 반대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고 만다. 굉장히 무모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나는 이게 불만이고 억울한 느낌도 있다.

단체명마다 나름의 정치적 레토릭이 일정 부분 있지만 인권위야말로 그 작명(作名)의 레토릭을 극도로 누리고 있는 단체다. 인권위가 가진 논쟁과 담론의 주도권과 기득권은 가히 폭발적이다. ‘인간의 권리’를 추구하는 단체에 배짱 좋게 맞붙을 수 있는 인간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실은 내가 인권위라는 이름의 레토릭에 불만을 갖는 까닭은 내가 거물이라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레토릭이 ‘인권’을 왜곡 내지는 변질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간의 결정을 보면 인권위원회는 레토릭의 명수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할 만큼 지혜롭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는 ‘성적 소수자’, 군복무 거부자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는 기가 막힌 환유(換喩)를 생산해내거나 일반화하는, 매우 지혜로운 조직이다.

문제는 그 지혜가, 성적 소수자를 위한 방침에 유보적 견해를 갖고 있거나 반대하는 어떤 개인을 자신도 모르게 다수의 횡포를 모의하는 주모자로 낙인찍는다는 점이다. 어떤가. 양심적 병역 거부에 반대하는 또 다른 개인은 어쩌면 한 양심적인 인간을 그저 반대하는 또 다른 양심이기 십상 아닌가.

또 다른 예로 동성연애 현상 전반에 대해서 무슨 토론이 벌어질 때를 들 수 있다. 동성연애에 대한 토론과 담론의 장에서 절대약자는 반대편에도 있다. 우리 사회는 이성애가 됐든 동성애가 됐든 일단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찬반 그 자체로 유불리(有不利)가 생기는 오늘의 현실은 인권위가 바라는 사회상과 본질적으로 정면배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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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근 한국외대 부속외고 교사 soli-deoglor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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