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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대중문화 보충수업 ⑤

시상식에서 빛난 스타들의 말, 말, 말

“전도연은 나의 기적, 집사람은 나의 운명”

  • 이승재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jda@donga.com

시상식에서 빛난 스타들의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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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같으면 “함께 연기한 전도연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하고 건조하게 한마디 던지고 말 것을, 황정민은 사뭇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하는 전도연” “너랑 같이 연기하게 된 건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었어”…. 뭐랄까요. 무슨 연애편지를 읽어주는 것 같죠.

같은 겸손의 표현이라도 “사람들에게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나를 소개합니다” 훨씬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배우 나부랭이’라는 다소 과격한 단어 구사가 공적인 자리에서 밝힌 소감을 한 차원 더 개인적으로, 더 진솔하게 들리도록 만들기 때문이죠. 어떻습니까.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저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저와 함께 일한 모든 분께 주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위의 틀에 박힌 수상소감에 비해 영악할 정도로 창의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황정민은 기막힌 호흡조절까지 구사합니다. 동료 여배우 때문에 가슴이 설렌다고 하면서, 일단 시상식을 보고 있는 시청자를 약간 긴장하게 만듭니다. 시청자들은 “아니, 저 배우, 유부남이면서 저렇게 말해도 돼?” 하고 내심 걱정하죠(이래서 시청자는 걱정도 사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황정민은 기가 막힌 반전(反轉) 전략을 구사합니다. 곧바로 ‘너는 내 운명’이라는 자신의 출연작 제목을 절묘하게 비틀어 “‘황정민의 운명인 아내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말함으로써 감동을 두 배로 만듭니다. ‘병 주고 약 주는’ 이런 말하기 방법을 이른바 ‘냉탕-온탕’ 전법이라고도 하죠.

# ‘망원경’ 아닌 ‘현미경’처럼 하라!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현미경’ 같은 수상소감입니다. ‘망원경’ 같은 소감보다는 ‘현미경’ 같은 소감이 훨씬 경쟁력 있습니다.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망원경’처럼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소감보다는, ‘현미경’으로 하나하나 뚫어지게 살펴보듯 아주 구체적인 단어와 표현을 사용한 소감이 빛난다는 것이죠.



지난해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흑인 가수 레이 찰스의 생애를 그린 영화 ‘레이’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흑인배우 제이미 폭스는 어린 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기가 막힌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순수한 사랑 그 자체인 4피트 11인치 키의 제 딸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딸은 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죠. ‘아빠, 아빠가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아빤 여전히 훌륭해요’라고요.”

‘4피트 11인치’, 제이미 폭스는 딸의 키를 정확히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이 세심하고 가정적인 아버지임을 은연중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린 딸의 말을 직접 인용해서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울컥하게 만들고 있죠. 구체적인 단어나 표현은 이렇게 힘이 강합니다.

제이미 폭스는 영화 ‘레이’에서 레이 찰스의 실제 모습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표정과 제스처를 구사하면서 피아노 연주까지 모두 직접 해냈습니다. 그는 물론 배우가 되기 전부터 피아노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부단한 노력과 준비가 따랐습니다. 실제로 그의 할머니는 폭스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게 했다고 하죠. 제이미 폭스는 지금의 자신이 있도록 만들어준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데요. 같은 고마움의 표시라도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 감동적으로 표현합니다.

“제 딸아이는 할머니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어요. ‘마리’라는 이름인데요. 제 할머니 이름이 에스텔라 마리 탤리입니다. 할머니는 오늘밤 여기 오시지 못했어요. 할머니는 제 최초의 연기스승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죠. ‘똑바로 좀 서 있어.’ ‘어깨 좀 제대로 펴.’ ‘뭔가 사리분별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 과거 저는 불량스러웠어요. 그럴 때 할머니는 말씀하셨죠. ‘그래도 뭔가 잘나가는 사람처럼 행동하거라.’ 그리고 제가 바보같이 행동할 때면 할머니는 저를 때리셨어요. 회초리로 마구 때렸죠. 할머니가 저를 회초리로 때린 건 정말 오스카 수상감이었어요.(웃음) 그리고 할머니는 저를 때린 후에는 저와 이야기를 하시면서 왜 회초리를 들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주셨어요. 할머니는 지금도 저와 이야기하세요. 오늘도 할머니는 저와 이야기를 할 거예요. 제 꿈속에서 말이죠. 그런데 오늘은 할 이야기가 너무도 많아서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할머니, 사랑해요.”

제이미 폭스의 얘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때론 모질게 채찍질하면서 불량한 자신을 어떻게든 성공시키려 했던 할머니에 대한 감사 표시를 구체적인 일화를 들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개했죠. 그의 수상소감 속에는 할머니의 구체적인 캐릭터, 희로애락이 담긴 에피소드, 감동적인 한마디, 그리고 할머니와 자신의 시간을 초월한 교감(交感)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영화인 것입니다.

폭스는 할머니가 숨을 거두고 지금은 없다는 사실도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다”는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오늘도 꿈속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거예요”라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아름답게 전달합니다. 그는 단 한마디도 “할머니에게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할머니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지 듣는 이들에게 수백배 증폭시켜 전달하는 절묘한 테크닉을 구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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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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