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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선생님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해학과 운치로 금기 풍자한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라”

  • 이재만 변호사 ljmad52@hanmail.net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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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업무라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온갖 인생 잡사를 카운슬링하고, 법적인 어려움을 대신 처리해주는 일이다. 특히 형사사건 중 이성간에 얽히고설켜 발생한 사건에는 법률 이론만으로는 풀릴 수 없는 복잡미묘한 진실이 가로놓여 있게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심장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정서적인 반응이 열쇠가 될 때가 많다. 이런 지혜를 구하는 법은 법전 속에는 없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아름다운 고전문학 속에 길이 있는 경우가 있음을 보게 된다.

어쩌면 선생님은 학생들이 고전문학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양한 시문 중에서 예민한 학생들의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시문을 택하셨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고전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학생들은 차츰 정철, 소동파, 두보의 시문을 비롯해 유교 정전인 논어, 대학에까지 관심을 갖고 고문의 지혜를 공부하게 됐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변론서를 쓸 때 논어의 구절을 떠올리면 동시에 자연스럽게 선생님이 떠오르곤 한다.

선생님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우리를 깊이 있는 문학의 세계로 인도해주셨다. ‘선생님도 과연 모르시는 게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열강을 하실 때는 마치 큰 선비의 말씀을 듣는 듯 수업 내용이 힘있게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지금 변호사 업무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정말로 수업준비를 많이 하신 분이 아니었던가 싶다. 선생님의 충분한 수업준비가 쌍화점, 만전춘 등을 자유롭게 학생들에게 가르치시는 원천이었음을 훗날에야 깨닫게 됐다.

또한 선생님은 고려속요 ‘가시리’를 가르치실 때에는 “마음으로 느껴보라”고 한마디 하시고는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보셨다. 극도의 자기희생과 감정절제로 재회를 기약하는 ‘가시리’를 자세한 설명을 통해 좀더 잘 알 수도 있겠지만 말 없는 강의로 더 큰 깨침을 얻기도 한다. 공즉만(空卽滿), 즉 ‘텅빈 것은 꽉 찬 것과 같다’는 말처럼 말 없음과 말 있음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법정에서는 당연히 말과 글로 의뢰인의 고충과 번민과 이유와 사연을 피력하지만 어떤 사건의 경우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복잡미묘함 때문에 가슴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말과 글이 실체적 진실의 세계를 모두 반영하지는 못한다는 걸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다시 듣고 싶은 강의

변론을 하다 보면 자신의 처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의뢰인이 있는가 하면 한마디도 안 하는 의뢰인도 있다. 언젠가 구치소에서 특수강도죄로 구속된 대학 휴학생을 접견한 적이 있는데, 그 학생은 몇 분 동안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말하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당시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의 억울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처지를 변호인에게 충분히 느끼게 해줬다.

달변의 해박한 강의와 무언(無言)의 강의가 하나로 통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사춘기 시절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의 자유로운 강의 덕분이다.

흔히들 지금은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한다.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큰 스승이 없다는 뜻이다. 혹자는 선생다운 선생이 없다고도 한다. 상업주의에 물든 입시 위주 교육 때문이다.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李載滿

1952년 서울 출생

배재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행정대학원 졸업

1992년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1995년 변호사 개업

연세대 법학연구소 자문위원·법무대학원 초빙강사, 세계스포츠선교회 법률고문, 대한변호사협회 이사


그러나 예민한 사춘기 시절, 선생님의 한마디에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예가 흔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반드시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뛰어난 실력을 갖춰야만 스승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충실히 준비하며 가르침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시는 분이라면 훌륭한 스승이라는 명예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내가 기억하는 최상덕 선생님은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가르침에 열심히 노력하셨고, 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주신 분이다.

이성보다 감성이 혼재된 이 세상에서 가슴에 메아리치는 큰 울림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설레던 예민한 사춘기 고교시절, 우리들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행동하도록 가르쳐주신 선생님과 모교가 있던 정동골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과 재회를 노래한 고전을 소재로 한 선생님의 강의를 다시 듣고 싶다. 선생님의 청아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신동아 200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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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 변호사 ljmad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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