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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책, 아저씨의 책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언니의 책, 아저씨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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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책, 아저씨의 책

인생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책, ‘살다’와 ‘강산무진’.

일본 지바대학 철학과 교수인 나가이 히토시가 지은 ‘어린이의 마음으로 철학하기’(길)는 어린이철학, 청년철학, 성인철학, 노인철학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린이들은 삼라만상이 너무나 신기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어린이철학의 근본문제는 ‘존재’다.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고민한다. 그래서 청년철학의 근본문제는 ‘인생’이다. 성인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세상의 구조를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이다. 이들은 삶의 방식이나 인생의 의미와는 별개로 사회 속에서는 행위 결정의 방법을 문제로 삼는다. 노인철학의 궁극적 주제는 ‘죽음’이고 또한 ‘무(無)’이다. 그것을 통하여 한 번 더 어린 시절의 주제인 존재가 문제가 된다.”

나가이 교수에 따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는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그 어떤 종류의 질문이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왜 나쁜 일을 하면 안 되는가?’ 따위다. 하긴 한 살씩 더 먹을수록 ‘왜?’라는 의문부호가 점점 줄어드는 걸 느낀다. 아는 게 많고 이해심이 커져서라기보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 지구는 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가이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청년철학, 성인철학, 노인철학은 각각 문학, 사상, 종교로 대용될 수 있으나 어린이철학을 대용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어린이철학이야말로 가장 철학다운 철학이다.”

맞는 말이다. 주위를 보라. 생각의 초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느냐에 따라 읽는 책도 다르다.



영악한 언니들의 시대

1980년대는 성인철학의 시대였다. 대학 언저리만 가도 모두 ‘세상의 구조를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를 고민했다. 그들은 정치철학과 사회사상에 심취했고 ‘철학에세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자본론’ 등을 열심히 읽었다. 출판계는 1980년대를 사회과학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존재’와 ‘인생’의 문제를 뛰어넘어 곧장 세상으로 시선을 돌려버린 ‘웃자란 어른’이 많았다. 그들은 내공이 쌓이기도 전에 내지르기에 바빴다. ‘386세대’가 그들이다.

그렇다면 2000년대는? 굳이 고르자면 청년철학의 시대다. 요즘은 사회의 모순을 없애고 세상을 개조하겠다며 덤비면 철부지 취급을 받는다. 그보다는 누가 먼저 이 험난한 세상에 어떻게 적응해서 살아남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실 포착 능력은 언니들이 오빠들보다 한 수 위다. 요즘 팔리는 책을 보라. 영악한 언니들의 시대다.

2004년 출간된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남인숙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는 30만부 가까이 팔린 베스트셀러다. 올해 4월에 나온 ‘여자생활백서’(안은영 지음, 해냄 펴냄)는 두 달 만에 5만부 이상 팔렸다. 이 책은 이런 것들을 가르친다. ‘나쁜 남자를 유혹하라’ ‘작업 기간은 2주를 넘기지 마라’ ‘스킨십 도중 딴생각 하지 마라’ ‘휴대전화에 저장된 그를 지워라’ ‘다리털만 밀지 말고 다른 털도 관리하라’…. 요즘 언니들은 이런 책을 돈 주고 산다. 왜? 책 속에 답이 있다. 더는 촌스러운 걸 순수하다고 착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서른 살 여자가 스무 살 여자에게’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능력 있는 여자는 스캔들을 꿈꾼다’ ‘성공하는 여자는 당당하게 때론 뻔뻔하게’처럼 20대 싱글 여성을 겨냥한 자기계발서들은 제목부터 속물 냄새를 물씬 풍긴다. 아니 이들은 ‘속물이 돼야 성공한다’는 메시지로 당당하게 때론 뻔뻔하게 서점가를 장악해가고 있다.

그러나 세월은 비켜가지 않는다. 청년기를 건너뛰고 어른으로 웃자란 그들도, 성인이 되기를 마냥 유예하며 살아가는 그들도 언젠가는 인생의 끝에 다다른다. 그 허무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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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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