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5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1/5
  • 연암은 1780년 7월24일부터 28일까지 닷새 동안 홍화포(紅花鋪)에서 옥전(玉田)까지 118km를 이동했다. 7월28일 일기에 부록된 연암문학의 백미 ‘호질전’은 옥전에서 우연하게 베껴 쓴 작자미상의 절세기문(絶世奇文)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기간 중 백이숙제 사당과 병자호란 때 끌려온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고려보에도 들렀다. 연암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소소한 일화까지 기록했기에 필자가 ‘관내정사’ 코스를 답사할 때 감흥이 남달랐다. 필자는 2002년 2월에 이어 지난 2월과 5월, 세 번에 걸쳐 이 코스를 답사했다.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허세욱 교수가 뒤쫓는 연암의 연행도.

연암은 1780년 7월23일, 드디어 입관(入關)했다. 입관이라 하니 좀 거북하지만, 산해관을 통관했다는 얘기다. 중국 사람에게 ‘입관’은 큰 의미를 지녔다. 저 관문 밖은 이지(夷地), 곧 오랑캐의 땅이요, 관문 안은 중화(中華)의 땅인 것이다. 그건 단순히 지리적 경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민족의 계선이자 영토의 계선이고, 문화의 계선이었다.

연암이 7월24일부터 28일까지 이동한 홍화포(紅花鋪)에서 옥전(玉田)까지 118km는 여느 때보다 짧은 구간이었다. 앞서 ‘일신수필’이 실학의 외형과 내밀을 헤집어 담다가 명·청 간의 남북 민족전쟁을 되돌아보았다면, ‘관내정사(關內程史)’는 그 입맛을 크게 바꾸어 예술을 담론했고 정치의 핵을 방담했다.

그의 예술에 관한 담론은 계획적이거나 전문적이지 않은 촌평이다. 그러나 그 선후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묶어보면 어엿한 몸통이 된다. 회화의 기법에서 회화의 정신론, 회화의 평론에서 회화의 도구론까지 광범했다. 그러나 그 바탕은 실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無限神情 骨强梁

7월25일, 연암이 유관(楡關)에서 무령(撫寧)에 도착한 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까지 장성 밖의 황막하던 풍경이 굽이굽이 그림으로 점차 바뀌었다. 무령의 거리에는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편액이 즐비하더니만, 연암은 서학년(徐鶴年)의 호화 저택 앞에 말을 멈추었다. 언제부턴지 조선 사절들이 들러가던 곳이다. 거기 안방 문도리목에 전각된 윤순(尹淳)의 글씨를 보곤 기다렸다는 듯, 서예 담론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윤순(1680~1741)은 우리나라 숙종 때 판서 대관으로 ‘백하(白下)서첩’ 같은 동국진체를 남긴 명필로 서학년과도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암은 백하서첩에 남겨진 행운유수 같은 서예의 천재성을 긍정하면서도 자신과 동시대를 사는 여러 명필의 그것과 견줄 때 결점이 없지 않노라고 꼬집었다.

‘대체로 우리 조선에서 서예 하는 사람은 옛사람의 진짜 필적을 보지 못하고 평생 돌과 쇠붙이에 쓴 금석문만 대했을 뿐이다. 금석문이란 옛사람의 전형만 상기시킬 뿐 붓과 먹 사이에 어린 무한신정(無限神情), 곧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감, 그것은 타고날 때 얻어진 만큼 비록 그 글씨가 지닌 체(體)와 세(勢)를 방불하게 나타낼지언정 그 글씨의 내면에 서린 근골강량(픫骨强梁), 곧 세찬 힘줄과 뼈다귀를 필획에 건넬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먹을 흠뻑 묻히면 먹돼지가 되고, 먹이 마르면 마른 등나무덩굴이 되었다.’

우리 조선의 서예가 진적(친필)을 얻지 못한 채 다만 금석문을 베낀 폐해를 지적했다. 글씨의 체와 세는 흉내 낼지언정 무한신정을 얻기에 모자라다는 얘기다. 이에 앞서 윤순이 ‘백하서첩’에 밝힌 대로 ‘정신적인 획은 버린 채 외형적인 획만을 따랐다(恨棄心劃 取其法劃)’의 재론인 셈이다. 요컨대 서예의 순수한 창작을 위해 정감이 서리고 혼이 투입된 서예를 찬양했다. 동시에 필획만 있을 뿐 심획이 없는, 곧 먹돼지나 등덩굴 같은 임서(臨書)에 지나지 않는 서예를 경고하고 질타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예의 본질만 추구하지는 않았다. 창작자의 명분과 책임을 묻기도 했다. 역시 7월25일, 연암은 영평(永平·지금의 盧龍)에서 호응권(胡應權)이라는 소주(蘇州) 사람이 보여준 조선 화가들의 화첩을 열람하면서 당시의 조선 그림에 연호나 서명이 없음을 통탄했다. 작품의 주인공이나 창작 연대를 ‘강호산인(江湖散人)’ 같은 애매한 말로 얼버무리는 무책임한 풍토를 매몰차게 비꼬았다.

연암은 서예의 표현을 위한 도구론에도 일가견을 비쳤다. 서예의 주무기인 지필(紙筆)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도 조선산(産)과 중국산(産)을 비교해 그 우열을 논평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종이와 붓, 모두 중국 것만 못하다고 했다. 조선에도 백추지(白?紙), 곧 다듬질한 백지가 있고, 낭미필(狼尾筆), 곧 이리의 꼬리털로 만든 붓이 있다지만 중국의 일반적인 종이나 호주(湖州)의 양(羊)호필만 못하다는 것이다. 연암은 여기서 선주(宣州) 종이 같은 특정 산품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종이와 붓에 대한 기능론이나 방법론도 매우 실학적이었다. 종이는 먹을 잘 받고 필획을 잘 수용하는 데 그 기능이 달려 있고, 붓은 부드러워 마음과 손이 놀리는 대로 따라가는 데 그 효용이 달렸다고 했다. 지질이 질기고 두꺼워 찢어지지 않거나 미끄러울 만큼 굳으면 결코 상품(上品)일 수 없다 했고, 붓 끝이 뭉텅하거나 뾰족한 것 또한 상품일 수 없다고 했다. 딱하고 사나운 붓은 장난꾸러기 아이 같다고 폄하한 반면, 보드라운 붓은 부모의 뜻을 잘 받드는 효자 같다고 찬미했다.

1/5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연재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더보기
목록 닫기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댓글 창 닫기

2023/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