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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5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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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수확, ‘열상화보’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영평의 서문. 맨 위에 ‘望京’, 곧 서울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횡편이 박혀 있다.
수필가 김혜자 제공

이렇듯 서예를 곡진하게 담론하고 조선과 중국의 지필을 품평한 날 밤, 연암은 영평에서 꼴불견을 만나 속이 몹시 뒤틀렸다. 글쎄, 저녁을 먹은 뒤 등불을 밝히고 바람을 쐬던 중 어느 집에서 ‘고려진공도(高麗進貢圖)’를 새기고 있는 작업 현장과 맞닥뜨린 것이다. 조선 사절의 붉은 도포를 입은 서장관(書狀官·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에, 검정 갓을 쓴 역관, 거기다 담뱃대를 문 비장과 곱슬머리 군뢰들이 몇 량의 수레를 앞뒤로 몰고 기다랗게 열을 지은 그림이었다. 졸렬한 솜씨에 엉성한 구성, 원숭이 같은 하인배의 형용이 연암의 자존심을 구겨놓았다.

연암은 그날 밤, 뜻밖에 조선 유명 화가들의 작품 목록이 적힌 ‘열상화보(洌上畵譜)’를 입수했다. 그것은 한중 예술교류를 증언하는 경이적인 자료였다. 아까 소주 사람 호응권이 보여준 화첩과 관련 있으나 꼭 그 화첩의 목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속에는 김정(金淨)의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를 비롯, 김식(金埴)의 ‘한림와우도(寒林臥牛圖)’, 이경윤(李慶胤)의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 이정(李霆)의 ‘묵죽도(墨竹圖)’, 이징(李澄)의 ‘노안도(蘆雁圖)’, 윤두서(尹斗緖)의 ‘연강효천도(煙江曉天圖)’, 정선(鄭?)의 ‘산수도’와 ‘사시도’ ‘대은암도(大隱岩圖)’, 조영석(趙榮?)의 ‘부장임수도(扶杖臨水圖)’, 김윤겸(金允謙)의 ‘도두환주도(渡頭喚舟圖)’, 심사정(沈師正)의 ‘금강산도’, 강세황(姜世晃)의 ‘난죽도’, 허필(許?)의 ‘추강만범도(秋江晩泛圖)’ 등 17명 화가의 그림, 총 30폭의 목록이 수록됐다.

여기에 수록된 조선 화가들은 대부분 조선 중기나 조선 후기 초엽 사람들이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매우 불안했던 조선 중기엔 이정·김식·이경윤·김명국 등이 중국 절파(浙派)의 진경산수 화풍을 수용했고, 윤두서·정선·심사정·강세황·이인세·조영석·김윤겸·윤덕희 등 조선 후기 화가들은 한국적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개척하면서도 미불·예찬·문징명·동기창 같은 중국 실학풍 회화를 융합했다. 조선 사절의 빈번한 연행(燕行)으로 중국과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회화 교류는 더욱 넓어졌다. ‘열상화보’는 17세기부터 시작한 조선과 중국의 회화 교류가 18세기에 들어 확대됐음을 기록하고 있다. 묘하게도 이러한 회화 교류는 북학, 곧 실학의 걸음과 평행선을 달린다.



‘호질전’ 탄생 비화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면 죽지 않는다

영평. 서문 위의 성루터에서 서쪽의 들과 강을 조망한다. 연암은 여기서 김황원의 ‘부벽루시’를 상기했다.

연암이 ‘관내정사’에서 회화의 정신론·표현론·도구론·책임론 등 꿈틀거리는 담론을 넉넉히 펼쳤지만, 7월28일자 일기에 연암 문학의 영혼 격인 단편 소설 ‘호질전’이 부록된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호질전’은 한국문학의 대어다. 연암은 그날, 옛날 무종국(無終國), 곧 주나라 문왕의 아들 소공(召公)의 봉지(封地)였던 옥전에서 묵었다. 정말 나그네로서 우연한 숙박이었다. 여느 날처럼 덤벙대는 푼수, 정진사와 함께 어슬렁어슬렁 거리 구경에 나섰다. 어디서 생황에 맞추어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따라가 보니 네 벽이 서화로 가득 찬 곳에서 주인이 부처 앞에 분향하고 있었다. 연암은 그이와 수인사했는데, 소주 사람으로 이름은 심유붕(沈有朋), 나이는 마흔여섯이었다.

그 집 대청 바람벽에 족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연암은 흰 종이에 세필로 씌어진 장문의 글을 보고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고 탄복하며, 그 출처를 물었다. 필자를 알지 못하고, 다만 옥전에서 멀지 않은 계주(텺州) 장날에 산 것이라 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종이와 붓을 준비해 쫓아갔다. 고깃덩이를 만난 고양이처럼 연암은 앞부분을, 정진사는 뒤쪽을 맡아 정신없이 베껴 썼다. 심씨는 점잖은 조선의 두 선비가 허겁지겁 베끼는 꼴을 보고 의아했다. 연암은 이렇게 변명했다. ‘조선에 알려서 조선의 독자가 포복절도하게, 아니 먹던 밥을 벌 날 듯 튀게 하려고, 아니 갓 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우두둑 끊어지게 하려고.’ 연암다운 호기와 풍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연암은 애써 ‘호질전’ 창작 책임을 비켜갔다.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훑어본즉 정진사의 몫에 오자와 탈자가 많아 문리가 통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노라고 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저작에만 몰두했던 유학 대가 북곽선생과 정절부인인 과부 동리자 사이의 온갖 위선과 문란한 생각을 질펀하게 그린 뒤, 북곽이 사람 아닌 호랑이의 혹독한 질타를 받는 내용의 풍자 단편 ‘호질전’은 연암이 귀국한 뒤, 1783년에야 완성됐다. 그의 핑계대로 그날 밤 정진사가 한눈을 팔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호질전’은 없었을 것이다. 또 재구성, 재창작의 정확한 범위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손질이 없었더라면 ‘호질전’이 누리는 오늘의 평가는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정진사가 한눈을 팔지 않았더라면 ‘호질전’을 놓칠 뻔했다. 그런 의미에서 ‘호질전’을 박지원의 창작으로 보는 데 굳이 인색할 까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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