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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 37년 외길 윤현 아시아인권센터 이사장

“역사의 수레바퀴는 끝없이 돈다 그러나 누군가 굴려야 돈다”

  •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인권운동 37년 외길 윤현 아시아인권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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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 37년 외길 윤현 아시아인권센터 이사장

아시아인권센터 윤현 이사장이 자신의 37년 인권운동 일생을 사진으로 설명하고 있다.

▼ 정치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목사가 됐습니까.

“20대 초반에 6·25전쟁을 겪었는데 군인과 민간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좌익과 우익의 극한 대립으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북새통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건 신의 섭리이자 신이 내게 뭔가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뒤늦게 신학공부를 하게 됐죠. 그전에는 기독교인도 아니었어요.”

양심수의 빛, 메리놀 커넥션

▼ 인권운동에 뛰어들 때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요.

“앰네스티 한국지부 창립준비를 하려면 서울에 있어야 하는데, 당시 재직하던 교회가 전남 순천에 있었어요. 그래서 사표를 내고 서울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아내가 순천에서 양장점을 해서 돈을 제법 잘 벌던 때라 생활비를 책임지라고 하고 아이들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지요. 다행히 집사람이 ‘당신은 하고 싶은 일 하라’고 이해해줘서 고마웠습니다.”



▼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유신헌법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주도하던 장준하씨와 백기완씨가 비상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종교인과 대학생들이 속속 구속됐습니다. 같은 해에 민청학련사건이 터졌는데 당시 대학생이던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이부영 전 국회의원, 이강철씨 등이 구속됐지요. 앰네스티 각국 지부 회원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정치범과 양심수들 영치금을 넣어주고 변호사비와 가족 생활비를 대줬습니다. 이른바 386세대 이전 세대들이 민주화 투쟁할 때 뒷바라지를 한 것이지요. 또 국제앰네스티를 통해 전세계에 그들의 구속 부당성을 알려 공론화했습니다.”

▼ 군부독재 시절이라 어려움이 컸겠군요.

“앰네스티 한국지부 활동이 본격화한 1974년부터 한국지부 해산을 결의한 1985년 사이 중정(중앙정보부)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 불려간 것만 일곱 번입니다. 국제앰네스티라는 든든한 ‘백’이 있으니까 두들겨 맞지는 않았는데 대신 며칠이고 잠을 안 재워서 애를 먹었죠. 안기부에 불려간 건 ‘메리놀 커넥션’을 통해 국내 양심수, 정치범과 관련된 공소장 같은 자료를 해외에 보냈기 때문인데 그들은 ‘당신이 아니면 이런 자료가 외국으로 나갈 턱이 없다’며 괴롭혔습니다.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이 공소장을 들고 주영 한국대사를 만나 국제인권조약에 위배된다며 따지기도 했어요.”

▼ 메리놀 커넥션이 무엇입니까.

“국제앰네스티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 등 국내 정치범을 도우려면 우선 정확한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공소장, 사건 당사자와 가족들 사진입니다. 그땐 팩시밀리가 없어 자료를 해외로 보내려면 국제우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국내에 들어와 있는 천주교 메리놀수도회 미국인 신부들이 미국 군사우편(APO)을 이용해 자료를 캘리포니아 주의 맥노튼 주교(당시 천주교인천교구장) 집으로 보내면 주교의 모친이 다시 국제앰네스티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런 전달 루트를 가리켜 메리놀 커넥션이라고 했죠.”

메리놀 커넥션과 관련해 윤 이사장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이 김상헌씨다. 기독교인으로 UNDP(국제연합개발계획) 직원이던 김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윤 이사장의 일을 도왔다. 휴무일인 토요일이면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들러 공소장이나 가족들 탄원서를 일일이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윤 이사장은 “김씨는 오래전 UNDP를 그만뒀는데, 그 후 북한인권시민연합 창립멤버로 나와 30년 인연을 이어온 친구다. 몇 년 전 ‘타임’에 ‘아시아 영웅 100인’으로 뽑히기도 했다”고 말을 이었다.

윤 이사장은 앰네스티 한국지부를 설립 15년 만인 1985년 자진 해산하고 손을 뗐다. “인류 보편의 인권 문제를 해석하는 시각이 구성원 간에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오래전 일인데도 “내부적으로 노선갈등이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 갈등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1980년 5월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등 전두환 정권 시절은 우리 활동에 제약이 많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일부에서 해외활동을 접고 국내 민주화운동에만 집중하자며 사무실을 대학생 농성장으로 내주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갈등이 있었지요. 나를 포함한 일부의 견해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일절 배제하고 인권에만 집중하는 국제앰네스티 원칙에 충실하자는 것이었어요. 그런 갈등 때문에 1985년 임시총회를 소집해 한국지부 자진해산을 결의하고 물러난 겁니다.”

그렇게 앰네스티를 떠난 윤 이사장은 1996년 5월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설립하기까지 10년 동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와 인권에 대해 연구하면서 책을 내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주로 북한인권 문제를 다루는 국제네트워크 구축 방안을 고민했다. 그 결과가 북한인권시민연합과 아시아인권센터(www.achumanrights.org) 설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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