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호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과대망상증 중국,‘문명 훔치기’ 자충수까지…”

  • 권재현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07-11-08 10: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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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학술문화재단과 러시아 극동국립대가 공동 주최하는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가 10월1일부터 3일까지 남북한 및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렸다. 이 학술대회는 세 나라의 학자들이 연구한 고구려-발해 역사 교류를 통해 다시 한번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학술적으로 입증하는 장이 됐다.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중심으로 학술토론을 하는 남북한·러시아 학자들.

    “중국인들은 러시아가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렸을 때 ‘중국이 이미 1000년 전 송나라 때 개발한 것(화약으로 쏘는 불화살)을 러시아는 이제 겨우 개발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하의 중심은 늘 중국이고 주변 국가는 아무리 큰 나라라도 작은 섬에 불과할 뿐입니다.”

    러시아 고고학계의 원로인 70대의 다비드 브로디얀스키 극동대 교수의 말이다. 10월2일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회의 토론 현장에서였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가 모여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각국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을 펼치는 자리였다. 동북공정을 포함한 중국의 역사왜곡이 1981년 본격화한 다민족통일국가론의 영향 아래 치밀하게 전개된 패권논리의 산물이라는 서길수 서경대 교수의 발표에 대한 지지였다. 중국의 지독한 과대망상증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역사가 왜곡한다고 왜곡되나”

    학술회의 말미 토론에서 가장 연장자가 이렇듯 적극적 발언을 쏟아내자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성토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서길수 교수는 “예부터 중국은 ‘천하=세계’가 아니라 ‘천하=중국’이었다”며 다른 민족의 역사를 잡아먹으면서 이를 자신들의 역사로 둔갑시켜온 중국인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날 토론의 삼각 축 가운데 하나인 북한 학자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니 속국이니 하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서도 중국을 직접 거명해 비판하거나 ‘동북공정’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기자가 “서길수 교수의 발표에 대해 러시아 측의 의견은 들었는데 북한 측 의견도 듣고 싶다”고 질문을 던졌다. 잠깐 침묵이 흐르다가 7명의 북한학자 중 최연장자인 김유철(66) 김일성종합대 역사학부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노학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역사는 왜곡한다고 왜곡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진실은 변하지 않으며 반드시 객관적으로 밝혀지게 돼 있습니다.”

    함축적 의미가 담긴 두 마디였다. 북한의 오랜 혈맹이자 주요 에너지원 공급처인 중국에 대해 직접적 비판을 가할 수 없지만 학자적 양심을 외면할 수 없다는 고민의 일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학문의 자유조차 정치에 종속된 북한의 서글픈 현실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러시아 극동국립대 한국학대학 설립 12주년을 기념해 그 설립기금을 지원한 한국의 고려학술문화재단과 러시아 극동국립대가 공동 주최한 이번 학술대회에선 모두 15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고려학술문화재단의 장치혁 회장이 이끈 남한 대표단에선 서울대의 노태돈·송기호 교수와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 연해주 발해유적 발굴전문가인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가 발표를 맡았다. 북한에서는 정치건 김일성종합대 역사학부장이 이끈 7명의 김일성종합대 교수 중 김유철, 남일룡, 전동철, 리광희 교수가 발표에 나섰다. 러시아에서는 브로디얀스키 극동국립대 교수와 에우게니아 겔만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연구원 등 7명이 발표했다.

    김유철 교수는 ‘북위(北魏)와의 관계에서 본 고구려의 높은 대외적 지위’ 발표문에서 435~534년까지 고구려와 중국 북방의 패자였던 북위의 외교관계가 철저히 고구려 주도로 이뤄졌음을 규명했다.

    동북아의 패자(覇者) 고구려

    고구려는 386년 건국된 북위와 반세기 가까이 교류가 없다가 435년 6월 먼저 사신을 북위에 파견해 양국 관계의 가교를 놓기 시작한 이후 100여 년간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김 교수는 그 근거로 △북위의 라이벌이던 북연(北燕)이 멸망하자 북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수만 대군을 동원해 북연왕 풍흥의 고구려 망명을 관철시킨 점 △고구려 장수왕과 문자명왕이 사망했을 때 북위 황제들이 상복차림으로 직접 애도식을 거행한 점(다른 나라 왕의 사망에 대해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고구려에 대해서가 유일) △반면 고구려는, 북위는 물론 중국의 어느 나라 왕에 대해서도 상복차림으로 애도식을 거행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 △510년에는 청주(산동성 광효현)에 고구려 건국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세운 점 △고구려에 대해서 한 번도 무력행사를 못한 점 등을 꼽았다.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남북한,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 교수는 “고구려는 봉건 중국 왕조들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그와 당당히 맞서 동방의 정국을 움직인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며 “이런 고구려를 두고 속국이니 지방정권이니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김일성대 역사학부의 고고학 강좌장(학과장)으로 고구려성 전문가인 남일룡(60) 교수는 지금까지 북한에서 이뤄진 고구려성 발굴 성과를 종합 정리한 논문을 발표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진행한 고구려성곽 유적발굴과 연구 성과’였다.

    남 교수는 평양 일대에 집중된 대성산성과 안학궁성, 청암동토성, 청호동토성, 고방산성과 황해도 황주성, 휴류산성, 태백산성, 장수산성 등의 발굴을 토대로 고구려성의 축조 시기, 해당 군현의 이름, 고구려성의 특징을 소개했다.

    특히 고구려성의 특징으로 △돌로 쌓은 산성 △치(雉·성벽 밖으로 돌출해 적군에게 측면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한 구조물)와 옹성(甕城·성문 주변을 ㄷ자 형태로 구축해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가할 수 있는 구조물) 등 독특한 성 축조방법의 창조 △평시용 평지 왕궁성과 전시용 방위산성의 이중 도성제 도입 △여러 성을 연결한 방어체제로서 전연성(前緣城), 종심성(縱深城), 위성(衛城), 해안성(海岸城) 방어체제의 구축 등을 꼽았다.

    그는 “고구려에 쳐들어온 한·수·당나라를 비롯한 외래 침략자들은 튼튼한 성 방어체계와 이를 토대로 용감히 싸운 고구려 사람들에게 참패를 면치 못했다”며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려는 시각에 맞섰다.

    역시 고구려성 전문가로 남 교수와의 첫 만남을 뛸 듯이 기뻐한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중국의 고구려 침탈과 동북공정’ 발표문을 통해 ‘고구려사=중국사’라는 중국 측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서 교수는 먼저 중국의 논리를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졌다(영토) △고구려는 독립국가가 아니고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주권)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인은 모두 중국 땅으로 들어갔다(인구)는 3가지 범주로 묶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고구려가 존속한 705년간 중국에선 35개국이 명멸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가 그 수많은 나라 중 도대체 어느 나라의 속국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필두로 반론을 제기했다. △중국인 스스로 고구려를 해동삼국으로 부른 점 △중국의 어떤 정사(正史)에도 없는 고구려본기가 한국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있는 점 △광개토태왕비문에 중국의 천자와 같은 뜻의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밝힌 점 △독자적 연호를 쓴 점 △천자만의 특권인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낸 점 등이었다.

    강력한 주권국가 발해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이란 논문에서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됐다’고 밝힌 점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에 ‘발해는 옛 고구려’라고 밝힌 기록 외에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기록을 공개했다.

    발해 멸망 후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이 981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 옛 땅에서 살던 발해 유민”이라고 밝힌 점과 송나라가 그 답서에서 “정안국은 본래 마한(고구려의 별칭) 종족”이라고 밝힌 점이다. 송 교수는 이를 통해 발해의 고구려계승성이 건국 시기부터 멸망 이후까지 계속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송 교수는 발해의 문물제도에서 당나라 문화는 후대에 영향을 준 것이고 말갈 문화는 기층민의 문화인 반면 와당 문양, 불상 양식, 온돌 등의 고구려 문화요소는 초기에서 후기까지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발해는 고구려 전통문화의 기반 위에 세워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전동철(45) 교수도 ‘발해는 강력한 주권국가’라는 발표문에서 발해를 중국의 속국으로 보는 중국 측 견해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대륙의 맹주로 자처하던 강대한 당나라와 맞서 승리한 긍지와 자부심, 당당한 자세에서 국가 창건을 선포한 발해 건국의 기본세력인 고구려 유민들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강대국 건설을 지향했으며 짧은 기간 내에 강력한 주권국가를 일떠세웠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발해국왕들이 ‘하늘의 자손(天孫)’의식을 표명했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으며 △‘황상’을 칭했고 △황제국의 관직제도인 ‘3사(태사, 태부, 태보) 3공(태위, 사도, 사공)’ 도를 운영했고 △726년 당나라와 제휴한 흑수말갈을 징벌하고 732년 장문휴의 당의 등주를 공격한 점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 국립대학교 한국학대학 학생들이 한국학대학 설립 12주년 기념공연을 하고 있다.

    이들 논문처럼 직접적이진 않지만 발해와 한반도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논문도 발표됐다. 중국을 비롯한 다른 한자문화권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는 성씨인 박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발해와 신라의 활발한 교류 가능성을 타진한 노태돈 서울대 교수의 ‘고려로 넘어온 발해 박씨에 대하여’라는 발표문이 그것.

    노 교수는 박혁거세에서 비롯한 신라 진골 귀족의 성씨로만 등장하던 박씨가 ‘고려사’ 중 발해 유민의 이름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고려 태조 8년과 21년 각각 1000호와 3000호를 이끌고 고려로 건너왔다는 발해 유민 박어(朴漁)와 박승(朴承)이다.

    노 교수는 고려로 넘어온 발해의 고관 귀족의 경우 왕이 성을 내려줬을 때는 어김없이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성이 처음부터 박씨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노 교수는 발해인뿐 아니라 고려인 중에서도 고려왕이 박씨 성을 하사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신라에서만 발견되던 박씨가 발해까지 넘어간 것은 그동안 발해와 신라가 당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말려 적대적 관계로 지냈다는 기존 통념과 달리 상당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이 경우 신라의 천정군(지금의 함남 덕원군)에서 발해 책성부(지금의 중국 지린성 훈춘시) 사이에 39개의 역을 뒀다는 신라도(新羅道)를 통해 신라인이 발해로 건너갔을 가능성과 733년 신라와 당이 연합해 발해와 전쟁을 벌였을 때 포로가 된 박씨 성의 귀족이 발해 상층부로 편입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러시아의 3대 발해 유적

    이번 학회에선 연해주의 3대 발해 유적지로서 크라스키노 성, 체르나치노 고분군(群), 고르바트카 성에 대한 발굴 성과도 집약됐다. 크라스키노 성과 체르나치노 고분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위에 위치하고 고르바트카 성은 블라디보스토크 남서쪽 두만강에 인접해 있다.

    발해시대 고분군으로는 연해주에서 처음 발굴된 체르나치노 고분군을 공동 발굴한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와 유리 니키틴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연구원은 이 무덤 떼에서 지금까지 170여 기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무덤 양식과 분포. 북쪽엔 전체 무덤의 68%를 차지하는 말갈계 널무덤(토광묘·흙구덩이를 파고 직접 유해를 안치하거나 나무관에 넣어 매장한 무덤)이 집중 분포했고, 남쪽에선 고구려계 돌방무덤(석실묘·관을 안치하는 돌방을 설치한 무덤)이 나왔다. 그 가운데에는 돌을 시신 아래에 깐 돌깐무덤(부석묘)이 분포했고 돌방무덤 사이사이에서 시신 주변에 돌을 둘러싼 돌돌림무덤(위석묘)이 발굴됐다.

    정석배 교수는 “발해 백성 중 귀족계층인 고구려계와 평민층인 말갈계가 한데 어울려 살았지만 거기에 뚜렷한 위계질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설명했다. 무덤의 머리방향이 대부분 북서쪽을 향한 점도 특기할 점이다.

    고르바트카 성을 발굴한 에우게니아 겔만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연구원은 2150m 길이의 이 성이 연해주 지역 발해의 최고 지방 소재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방어용 외에 홍수를 막기 위해 건설됐으며, 그 내부에서 온돌을 갖춘 주거시설은 물론 12종의 재배식물과 29종의 연체동물 잔해,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각종 광물질이 대거 발굴됐다는 점에서다.

    1980년 처음 발견된 이후 연해주에서 가장 많은 발굴조사가 이뤄진 크라스키노 성에 대해선 알렉산더 이블리에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연구원이 발표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14기의 가마와 종루, 법고, 누각을 포함한 절터가 나왔으며 발해 동경성(현재의 중국 훈춘)과 5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상당 규모의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몽골 고고학자들과 공동 발굴한 몽골 동쪽 친톨고이 발가스 성터에서 요나라 시대 유물과 함께 발해시대 기와와 토기, 온돌 등이 발굴됐다며 이 유적이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뒤 그 유민 700여 호를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정주성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북한 학자의 발표 중에 가장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은 고고학자인 리광희(43) 교수의 ‘새로 발굴된 고려왕궁-대화궁터에 대하여’다. 김일성종합대는 지난해 창립 60주년을 맞아 12세기 초 고려의 평양 천도 추진계획에 따라 건립된 평양시 용성구역 용추1동의 대화궁(大華宮)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펼쳤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중국 산시성 윈청시 관제묘(관우의 묘)에 걸려 있는 중국 삼국시대의 전국지도. 한반도 지역을 뺀 고구려의 영토가 그려져 있어 고구려(오른쪽 위)를 중국의 일부로 여기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리 교수는 “대화궁은 해발 160m의 나지막한 산봉우리를 진산으로 삼고 거기에서 좌우로 뻗어 나간 2개의 능선과 그 사이의 짧은 능선으로 이뤄진 ‘명당’에 자리 잡았다”며 “대화궁이라는 이름도 당시 풍수설에 따르면 크게 번성할 지세라는 대화지세(大華之勢)에서 따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화궁은 앞에 위치한 제1궁전 구역과 뒤쪽으로 300m가량 들어간 구역에 위치한 제2궁전 구역으로 나뉜다. 이들 궁전은 능선을 따라 총길이 2.5km의 성벽으로 둘러싸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서쪽에 1개, 북쪽에 2개의 성문이 발굴됐다.

    리 교수는 “대화궁은 고구려의 안학궁과 마찬가지로 기본 건물을 배치하고 그 양옆에 나래 채를 곁붙이는 건축방식으로 지어졌으며, 이는 발해의 상경용천부부터 고려의 만월대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발해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리는 물질적 증거”라고 했다.

    “고려 정부의 평양 천도 시도는 하루 이틀 사이에 계획되고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것은 고려 태조 왕건 이래로 고구려를 계승한 강력한 나라를 세우려는 의지에서 출발해 거행된 평양 중시 정책의 연장이며 고구려의 옛 수도에 수도를 옮김으로써 계승관계를 더욱 뚜렷이 하고 그에 따라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을 일떠세우려는 고려 사람들의 일관된 지향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리 교수는 “회랑이 건물 앞면에 배치된 것은 이 시기에 새롭게 보이는 독특한 건축형식이라는 점”이라면서 “이런 건축형식의 출현 시기는 대화궁이 지어진 12세기 초 이전으로 봐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대화궁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급속하게 지어진 것처럼 그 파괴 또한 인공적으로 철저히 파괴됐다는 점. 리 교수는 “이번 발굴에서 고급 자기나 귀금속 세공품 관련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특정 건물터에 기와를 집단 매몰했으며 발굴된 기와와 잡상이 단 1점도 성한 것이 없는 것으로 봐서 묘청의 난 직후 조직적으로 파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서길수 교수는 ‘중국의 고구려 침탈과 동북공정’ 발표문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북한 학자들뿐 아니라 러시아 학자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북한 학자들은 공식석상에선 말을 아꼈지만 학술대회 중간 휴식시간이나 학술대회가 끝난 뒤 만찬장에서 국내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관련 자료를 요청하며 큰 관심을 표명했다.

    동북공정의 허구

    서 교수는 1981년 탄지샹(潭其·#53284;) 당시 상하이 푸단대 교수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제기한 이후 중국의 일련의 역사왜곡이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상세히 소개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청나라 때 확정된 영토에 존재한 모든 민족의 역사는 곧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말한다.

    이 이론은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범위를 바탕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이 토지에 살던 선민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바이서우이(白壽彛)의 주장을 발전시킨 것으로 1980년대 이전까지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서 교수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이론이 국가 차원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9년 개혁개방에 들어가면서 중국 정부가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에 관심을 돌리면서부터였다. 이들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8.41%밖에 안 되지만 그 수가 1억을 넘는데다, 그들이 차지한 땅이 중국 국토의 60%를 차지한다. 따라서 개혁개방으로 느슨해진 분위기를 타고 이들 소수민족이 분열의 움직임을 보일 경우 중국의 통합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우선 그 실천기구로서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을 1983년 설립한다. 이 기구는 중국과 육지로 국경을 접한 14개국과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인근 해역국가와 국경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룬다는 명분 아래 관련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바꿔치는 작업을 펼친다. 2002~2007년까지 이뤄진 동북공정도 그 일환이었다.

    2002~2005년 한국고대사 관련 동북공정 논문이 고구려 관련 5편, 발해 관련 6편 등 12편이지만, ‘북방문물’ ‘박물관연구’ ‘동북사지’ 등 중국 동북 3대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은 고구려 관련 150편, 발해 관련 50편 등 219편에 이른다는 점은 동북공정이 일회적이거나 지방정부 차원의 것이 아니라 중국 정부 차원의 조직적 움직임임을 뒷받침한다.

    장치혁 고려학술문화재단 회장

    “중국도 수긍할 수 있는 역사 연구의 장 만들 것”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이번 국제학술대회의 산파는 장치혁(張致赫·75) 고려학술문화재단 회장이다. 장 회장은 한국과 러시아 민간우호 외교의 산증인이다. 그는 러시아 극동국립대에 지상 5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을 건립, 기증함으로써 1995년 10월2일 최초로 해외에 정규 5년제 한국어학과, 한국역사학과, 한국경제학과 3개 학과로 이뤄진 한국학대학이 설립되는 기틀을 제공했다. 또한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2억8000만평의 농장 조성사업 추진, 연해주 일대 발해 유적지 조사 및 보존사업 지원, 1994년 러시아 대홍수 때 30여만달러 지원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우호훈장, 블라디보스토크시로부터 명예시민증, 극동국립대로부터 명예국제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합그룹 창업주인 장 회장과 연해주의 인연은 그의 부친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 회장의 부친은 항일독립투쟁을 펼친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며 광복 후 단국대를 설립한 산운 장도빈(汕耘 張道斌) 선생. 산운은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 및 주필로 활동하며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1912년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망명해 권업회(勸業會)의 기관지 ‘권업신문’에 항일 논설을 기고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산운은 이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륙으로 100km쯤에 위치한 우수리스크의 옛 지명이 쌍성자(雙城子)인 것에 주목해 답사하다 1913년 크라노야르 성터와 절터를 발굴했다.

    장 회장은 부친과 연해주의 이런 인연을 살려 한국과 러시아 간 학술문화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앞장섰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1981년 설립한 산운학술문화재단의 명칭을 1991년 고려학술문화재단으로 바꿔 그 가교로 삼은 것도 러시아인에게 좀 더 익숙한 명칭(고려)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극동국립대에선 이런 장 회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한국학대학 건물의 명칭을 ‘산운 장도빈 기념관’으로 정했고 2005년 한국학대학 내 발해연구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도 적극 협력했다.

    장 회장은 “학문의 영역에선 민족주의를 일절 배격하고 객관적, 과학적인 사실만을 통해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며 “남북과 러시아, 그리고 이번에 참석하지 못한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모두 이런 정신으로 동북아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에 매진해주기 바란다”고 희망했다.

    그는 또 이번 학술대회가 각국의 민족주의 성향을 자극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했다.

    “제 부친 시절에는 인디펜던스(independence·독립)가 가장 중요했지만 21세기는 인터디펜던스(interdependence·상호의존)의 시대라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흔히 21세기가 국경 없는 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연해주야말로 20세기적 국가주의를 탈피해 미래지향적 공존과 번영을 꿈꾸는 보더리스(borderless)의 공간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장 회장은 이번 학술회의가 그런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패권주의에 기초한 역사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공통의 역사를 토대로 동북아인들이 모두 평화롭게 어울려 살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자는 뜻이라는 것.

    “중국의 동북공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를 공존공영의 토대로 삼기보다는 중국의 패권주의를 유지,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학술회의를 남북한과 러시아 학자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올해는 아쉽게 시간이 안 맞아 불발했지만, 내년에 평양 또는 서울에서 열릴 학술대회에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도 참가시켜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 역사 연구의 장을 만들겠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단대공정(연대가 불확실한 하-상-주의 역사연표 만들기)-탐원공정(전설시대인 삼황오제 시대의 역사화)-요하문명론(중국 문명의 최초 기원을 황하문명에서 요하문명론으로 바꿔치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 만들기’의 배후에 청나라 때 최대 판도를 자국의 역사로 삼으려는 패권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론적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초 중국은 앙소문화-용산문화로 이어지는 황하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 자랑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동이족의 근거지로 분류했던 만주 지역에서 그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흥륭와문화-홍산문화로 대표되는 요하문명이 등장하자 이를 중국 문명으로 훔쳐가기 시작했다.

    “역사에서 강자보다 센 것은 진실”

    그 와중에 쑤빙치(蘇秉琦)로 대표되는 일군의 학자들이 Y자 문명론을 펼쳤다. 산서(山西)성 북동부에서 하북(河北)성으로 흐르는 상간하(桑干河)를 경계로 북쪽 네이멍구(蒙古)자치구 대청(大靑)산 일대의 북방초원문화(흉노문화)와 동쪽 대릉하(大凌河) 일대의 홍산문화, 그리고 그 남쪽 황하문명의 앙소문화가 Y자 꼴로 만나 중화문명을 이룬다는 이론이다. 이에 따르며 중화문명은 북방초원문화, 홍산문화, 앙소문화를 3대 요소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이 3대 요소가 요하문명론으로 건너가면 염제 신농씨 집단의 중원문화(앙소문화), 황제 집단의 홍산문화, 우(虞)집단의 동남연해문화(양자강문명의 대문구문화)로 탈바꿈한다. 중국 고대신화에 역사를 끼워 맞추려다 보니 벌어지는 상호모순이다.

    10월2일은 마침 노무현 대통령이 육로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러 간 날이었다. 남북한 학자들은 모두 “오늘같이 뜻 깊은 날 남북의 역사학자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어 얼마나 좋으냐”며 덕담을 나눴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오전엔 남한의 전대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총영사가 참석했고 오후엔 북한의 심국룡 나홋카 주재 총영사가 참석했다. 군항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는 1992년까지 일반에 개방되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의 총영사관은 발해 때부터 일본과 배편이 오가던 항구가 있던 나홋카에 설치된 반면 한국 총영사관은 1992년 10월에 생겨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

    학술회의가 끝날 무렵에 찾아온 북한의 심 총영사는 만찬석상에서 “역사에선 강자가 센 것이 아니라 진실이 세다.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순간 역사를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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