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쁨은 잠시 피었다 지는 봄날의 꽃 같은 거고, 삶은 우리들이 밥 먹는 것처럼 아주 구체적인 비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인간의 삶을 시로 적어놓은 거지요. 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인가. 선생이 직접 뽑은 선생의 시선집 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부제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이다. 선생은 인간의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늘의 시인이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그 그늘이 바로 나의 그늘이고, 어쩌면 앞으로 나의 그늘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과 더불어, 그 그늘을 떼어버리고는 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의 슬픔은 자신의 기쁨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는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시 ‘슬픔이 기쁨에게’ 중에서
새벽기도를 하면서 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울고 있었다. 불 꺼진 교회당은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의 공간이다. 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고 그들의 슬픔만을 보고 슬펐다. 새벽에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깨어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밤새워 슬픔의 길을 걸어온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꽃밭
일상에 지쳐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달콤한 꿈의 기쁨에서 깨어난 나에게 새벽은 언제나 기도하면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오늘이 바로 어제의 슬픔이 드러나는 날이라는 걸 알려주었지만, 그건 기쁨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기쁨은 슬픔의 길을 걸어가다 잠시 드러나는 물거품 같은 것이다.
선생은 그 물거품을 그냥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론 꽃으로 피어나고, 맹인부부가 구걸하기 위해 어설픈 연주를 하는 길거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만이 선생의 시가 아니다. 거기에 배어 있는 아름다운 것들, 선생은 그걸 그대로 쓰고 우리에게 읽어주는 것이다. 시를 읽어주는 선생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 떨림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기뻐한다. 역설적으로 선생을 읽는 순간 나는 기쁘다. 나도 모르게 나의 가슴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 입은 짐승을 달래주는 선생의 시는 따뜻한 손길이다.
초기 시집인 ‘슬픔이 기쁨에게’에 담긴 슬픔과 눈물의 시편, 그 시원은 어디인가. 당연히 모든 시인이 그러하듯 선생의 유년시절을 알아야 한다. 선생에게 유년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마치 짧은 시를 쓰듯이 몇 장면을 이야기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짧게 눈을 감기도 했다. 이제 육순에 가까운 선생은 아주 먼 옛날의 일들을 선명하게 펼쳐 보여주었다.
“제가 살던 시골집 마당에 꾸며진 꽃밭이 떠오릅니다. 어머닌 거기에 꽃을 많이 심었지요. 채송화, 백일홍, 수국 같은 꽃들, 그리고 감나무 같은 유실수들이 있던 공간입니다. 거기에 꽃을 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런 꽃밭이 내 유년의 기억에 남아 있고.”
꽃을 심는 어머니의 모습은 슬픔을 심고 있는 시인의 모습과 다름없다. 선생의 슬픔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라면 궤변이거나 과언일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선생의 그 어린 공간에 어머니가 심어놓은 것은 채송화나 수국 같은 꽃이라기보다, 나중에 선생이 그 꽃의 이름을 시로서 호명하는 그런 이름 모를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마당에 꽃을 심는 존재다. 그 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그런 숨겨진 의미가 아이의 마음에 자란다.
“그리고 눈사람이 떠오르네요. 제가 살던 대구는 분지이기 때문에 저 어릴 땐 눈이 무척 많이 내렸지요. 그래서 아이들과 눈사람을 많이 만들었는데, 지금처럼 따뜻한 장갑이 드물던 시절이라 고무신에 손을 넣어 눈을 굴리고 밀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찍은 흑백사진이 한 장 있는데, 사촌누나, 형들과 함께 엄청 크게 눈사람을 만들고 그 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