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랍게도 그것은 언뜻 초기의 피카소가 비치는가 싶더니, 서구의 모더니즘 작품에서 보이는 반(半)추상의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요즘의 작품 분위기도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저변의 맥락을 접고 봤을 때 쉽사리 출품작들과 작가를 연관시키기 어려웠다. 한 작가의 초기 작품이 동시대 중국 현대미술과 이렇게 간극이 크다는 사실은 그만큼 변화의 폭이 큼을 의미한다.
필자는 그 생소한 느낌을 좇아 ‘오늘날 독특한 스타일로 자리 잡은 중국의 현대미술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중국 현대미술이 한국의 미술시장에 등장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고 보면 이런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중국의 현대미술을 잘 모른다. 단지 아는 것이 있다면 그들의 작품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엄청난 미술시장 열풍을 견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돈방석에 앉은 중국 미술
이러한 지적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에게 소개되는 중국 현대미술의 지층이 그만큼 얇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동서양의 문화 교류를 주도하며 풍부한 문화적 자산을 축적한 나라다. 그런 중국의 미술문화 지층이 얇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전근대와 근대의 중국, 그리고 현대의 중국은 매우 분절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확실히 중국 현대미술의 지층은 얇다. 그 근거는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중국 현대미술은 1990년대 이후의 아방가르드 미술이다. 1980년대를 거치며 성장한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은 1세대부터 현재 3세대 작가까지 굵직한 비엔날레를 비롯한 세계적인 미술행사와 담론의 장에서 중국 작가들의 위상을 높였다.
중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리셴팅(栗憲庭)은 중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세 시기로 분류한다. 문화혁명기를 거치며 정신적 상처를 받은 1세대, 냉소적인 2세대, 급변하는 사회체제에 둘러싸인 3세대가 그것이다.
천안문사태와 정치 팝
오늘날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가들은 중국 팝아트의 선구자 왕광이(王廣義), 장샤오강, 팡리쥔(方力鈞), 웨민쥔(岳敏君)이다. 3세대 류예, 류샤오둥(劉小東), 쩡하오(曾浩), 쩡판즈(曾梵志), 지다춘(季大純) 등도 급부상 중이다.
중국 역시 20세기 초반에 서구화를 통해서 근대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1949년 중국공산당 집권 이후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문화혁명(1966~1976)을 겪으면서 잠재해 있던 예술적 표현은 개혁개방을 맞아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왕광이를 필두로 하는 이성회화파와 장샤오강을 중심으로 한 생명지류파 등이 활약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1989년 2월에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열린 ‘중국/아방가르드(China/ Avant-Garde)전’은 1985년 이후에 벌어진 중국아방가르드 미술의 집결판이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사태는 이 흐름을 뒤바꿔놓았다. 사회에 대한 냉소와 조롱이 뒤섞인 중국의 현대미술은 이 시기 이후 정치적 팝과 냉소적 사실주의 경향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