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도 나는 고서화만 고집해. 인사동에 나처럼 여유만만하게 옛날책 읽고 그림 보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난 세상 아무도 안 부러워. 역사상 가장 행복한 사람 0.1%에 들어간다고! 왜냐. 세기적 명품 속에서만 살거든. 내게는 천하절색 여자보다 더 좋은 게 그림이고 글씨야. 한 점 구해놓으면 잠이 안 온다니까. 자다 일어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지.”
40년 고미술 고집
역사가 줄줄이 흘러나오고 울분이 있고 자부가 있고 회한이 있고 기개가 있다. 공화랑 주인 공창호, 40년 넘게 인사동 터줏대감으로 고미술업에 종사했지만 아직 환갑이 채 안 됐다. 돈을 왕창 벌어 조자룡 헌 칼 쓰듯 원 없이 써봤고, 구치소에 갇히기도 했고, 공안사범이나 당하는 모진 고문도 당해봤고, 가까운 이들의 배신도 맛봤다.
10대 후반에 뛰어든 길이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생명을 이어오는 고서화와 도자기, 공예품들 속에서 살아와 그런지 여러 험한 일을 겪어냈다는 그의 낯빛은 거칠기는커녕 아이같이 말갛다. 공 대표가 흥분했듯 현재 우리나라 고미술시장은 상황이 심각하다. 컬렉터들도 화상들도 다 현대미술 쪽으로만 몰려가버렸다.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두어 평(6.6m2) 남짓한 그의 방엔 아닌 게 아니라 최고 그림들이 뺑뺑 돌아가며 걸려 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가리키며 그가 하는 말!
“여기 ‘蕙園’이 아니라 ‘heawon’이라고 씌었다면 누가 사는지 모르게 오늘 당장 팔려 나갔을 거야. 그것도 10배 값으로! 고미술품은 인제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10년 전 2000만원이던 걸 지금 1000만원이라 해도 비싸다는 말뿐이지. 단원이 3000만원 하는데 박수근은 30억이잖아? 100배 차이 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거꾸로 되지는 못할망정 비슷하게는 가야지. 그림 보는 안목이 짧기 때문이야.
서양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과연 단원의 100배 가치가 있느냐는 거지. 다들 서양 귀신에 붙들려 있어. 당장 입에 단 인스턴트 음식에 맛 들여서 묵은 장맛을 모르는 거지. ‘끈질기게 고미술 하면서 인사동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사람이 가끔 있어. 그런 사람 만나면 살맛이 나지. 나는 고미술에 미친 사람이거든. 돈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니야?”
공 대표의 외아들 상구씨가 곁에서 말을 거든다. 그는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 곁에서 미술품 보는 안목을 기르다가 고미술품 감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요즘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배운다는, 서른 된 청년이다. 놀랍게도 그 또래의, 아니 그보다 한참 윗대 나이라도, 젊은 세대가 고미술 감정을 공부하는 경우는 전무한 지경이라고 한다.
“뭐 이젠 화낼 단계도 지났죠. 친구들에게 청자매병을 보여주면 다들 좋다고는 해요. 그러나 값이 2억이라면 다들 ‘아욱!’ 하고 넘어가죠. 차는 2억짜리 아우디를 아무렇지도 않게 타면서 그래요. 고미술품 소장자들은 성향상 작품을 시장에 내놓기를 꺼려요. 유통이 활발해야 시장이 형성될 텐데 그게 안 되죠. 소장품을 시장에 파는 것을 아직 자존심 상하는 걸로 알거든요. 이름을 거론해서 안됐지만 만약 김종학이나 이우환 그림을 여기 단원이나 겸재 그림처럼 걸어놨다고 합시다. 이틀도 못 가서 팔려요. 그런데 이건 지금 3년 동안 한자리에 걸려 있어요. 날마다 들여다볼 수 있으니 공부하기야 좋죠. 빨리 팔려버리면 오래 볼 수가 없을 텐데…하하, 참. 인사동에 아버지처럼 고미술을 고집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늘 이렇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10년 이내에 고미술 활황이 돌아올 거예요.”
공 대표는 고미술 감정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인자다. 단원을 비롯한 열 명의 친구가 그렸다는 ‘고산구곡도’가 국보로 지정됐을 때 그는 일간지에다 대문짝만하게 그건 위작(僞作)이라는 글을 썼다. 자발적으로 그림동네의 투사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