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GQ코리아
“나, 지금 배달된 신문에서 무척 중요한 정보를 봤어. 오늘부터 음, 어제 본 쇼핑몰에서 세일이 시작된다는 거야. 하지만 모든 브랜드는 아니라서 신문을 오려놨어. 몇 시까지 나올 수 있지?”
으하하. 이 남자, 쇼핑중독자로군. 그렇지 않다면 아침 7시에 함께 출장 온 다른 회사 여기자 방으로 전화할 수는 없었을 거야. 공범자의 심경으로 나는 단숨에 그가 좋아졌다. 낯선 도시 싱가포르에서 3박4일 동안 나의 쇼핑메이트였던 그는 ‘GQ코리아’의 이충걸 편집장이다.
남성을 계몽하는 ‘불굴의 쇼핑애호가이자 물욕의 화신’
GQ는 보그와 뉴요커, 배니티페어 같은 잡지를 내는 미국 미디어그룹 콘데나스트가 발행하는 ‘남성 라이프스타일’ 잡지다. 미국에서 1957년에 창간돼 현재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14개 국가에서 발행된다. GQ코리아는 한국에서 ‘남자가 무슨 패션지?’라고 말하던 2001년에 창간됐다. 참고로, GQ코리아의 독자는 물론 열에 아홉이 남성인데, 그들은 잡지에 이런 독자편지를 보내온다.
“여직원들이 입을 모아 저를 칭송하더군요. 공무원 생활하면서 이런 옷차림 보기 쉽지 않다고 말이에요. 고리타분한 아저씨 같다는 선입관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거듭나는 그날까지 GQ가 계몽해주세요.”(김○표)
“그녀의 선물은 디올 가방으로 정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GQ에서 로로피아나의 캐시미어 니트가 나온 페이지를 살며시 접어 그녀에게 주리라.”(장○영)

GQ코리아는 이충걸이라는 사람의 인격이기도 하다. 초대 편집장이 그로 결정되자 (관련 업계에선) GQ가 파격과 날카로움, 부드러움과 위트로 다른 잡지를 앞서가리라고 예상한 이가 많았다.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공부한 그는 실험적인 문화매거진 ‘페이퍼’를 거쳐 ‘보그’의 피처 에디터(취재 기자)로서 다소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읽고 나면 분명 고진감래의 즐거움이 있는 글쓰기로 고정 팬을 확보한 스타였다.
1년 전, 다시 만난 그가 “나, 쇼핑에 대해 책을 낼 거야” 라고 했을 때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신동아에 ‘쇼퍼홀릭’이라는 쇼핑 칼럼을 쓰는 나는, 언젠가부터 문학과 지성의 뮤즈가 된 백화점과 청담동을 소재로 날마다 패션 에디터들과 학자들(인류학에서 경제학, 심리학 등)이 쇼핑에 대한 글을 쏟아내는 걸 보면서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들은 진정한 쇼퍼홀릭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대한민국에 쇼퍼홀릭이 일만여덟 명이 있다한들 그중 몇 명이 ‘내가 바로 쇼퍼홀릭이오’ 하고 커밍아웃하는 글을 쓰겠는가. 쇼핑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우울증 환자로 단정하고 프로작을 처방하거나 ‘된장녀’라며 돌을 던지는 사회에서 말이다. 즉, ‘미처 탐구되지 않았던 쇼핑에 대한 뜻밖의 기록을 쓸 수 있는 진지한 쇼퍼홀릭’이라는 매우 희귀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쓸데없는’ 자만심 같은 게 있었다. 그러다 ‘불굴의 쇼핑애호가이자 물욕의 화신’이자 남성인 이충걸 편집장을 만난 것이다.
그는 함께 쇼핑을 하면서 장소팔 고춘자 만담을 나눌 수 있는, 내가 만난 최초의 남성이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시계와 선풍기, 쌩하고 지나간 람보르기니 같은 것들을 동시에 포착하여 색과 디자인과 브랜드의 역사, 그것에 얽힌 에피소드를 재구성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가능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나는 이것이 트렌드이고, 말하자면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소비가 한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인 일상이고, 생의 유일한 사건이자 노동이고, 쾌락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