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소리 명창 왕기창·기철·기석 형제(왼쪽부터).
“가야금을 주시더군요. 거기엔 제 이름과 향사란 글자가 적혀 있었어요. 지금도 그 가야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죠. 처음엔 가야금과 소리를 같이 하는 게 너무 어렵고 힘들어 방황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그런 절 잘 다독이고 기다려주면서 이끌어주셨죠.”
서울국악예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국악과에 입학했다. 판소리 전공으로 입학한 학생은 그가 처음이었다. 판소리 학사 1호인 셈이다.
▼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창극단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당연히 창극단 입단이 오랜 꿈이었죠. 형이 있었던 곳이고, 동생(왕기석)이 있었으니까요.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연수단원으로 입단했어요. 동생도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을 텐데 저 때문에 포기했어요. 집안 형편상 둘 다 대학을 보낼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항상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동생 왕기석 씨는 창극단 연수단원 시절,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인 남해성 명창을 만나 제자가 됐다.
“아무튼 졸업하면서 창극단에 들어가려는데, 제가 교직을 이수했다는 이유로 모교에서 오라고 하는 거예요. 향사 선생이 전 재산을 털어 만드신 학교였으니, 선생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가야 했죠. 그래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창극단 공연이 있으면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보기도 하고, 혼자 가서 보기도 했어요.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었던 거죠.”
인연과 악연
▼ 교사 시절 기억 남는 제자가 있다면.
“영화 ‘서편제’의 오정해는 예쁜 데다 소리까지 잘했어요. 김소희 선생의 마지막 제자여서 특히 관심을 갖고 가르쳤죠. 영화 ‘휘모리’ 주인공을 맡아 연기한 김정민도 재능 있는 제자였어요. 둘 다 소리꾼으로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는데 영화판으로 가면서 기대했던 만큼 실력이 늘지 않아 아쉬움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판소리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공로죠.”
그는 조상현 명창의 제자이기도 하다.
“대학 1학년 때 남원 판소리 명창대회에 참가했는데, 선생이 심사위원이셨어요. 제 소리를 듣더니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그러곤 향사 선생을 찾아가 ‘내가 키워볼 테니 내게 달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향사 선생이 제게 ‘왕대밭에 왕대가 자라는 법’이라며 보내주셨어요.”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서편제)의 예능보유자였던 조상현 명창의 첫 번째 이수자가 됐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그 후 깊은 갈등의 골이 생긴다.
“1990년대 후반, 선생이 전남대 국악과 겸임교수로 계시면서 전공자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대학에서 제게 일반 학생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는 교양강좌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어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선생이 그걸 크게 오해하셨어요. 오해를 풀려고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엄청 화를 내면서 손찌검까지 하시더군요. 얼마나 맞았는지 한쪽 고막이 터지고, 다른 쪽 귀에선 피가 날 정도였죠.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고, 그동안은 소리를 할 수도 없었어요. 인공 고막이 자리를 잡기 전까진 작은 자극도 주면 안 되었으니까요.”
그 무렵 형도 간경화로 작고했다. 깊은 상심에 빠진 그는 소리를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일어섰다.
▼ 1999년 뒤늦게 창극단에 입단했는데.
“1998년 국립창극단에서 처음으로 완판 창극 춘향전을 올렸는데, 그때 오디션을 통해 객원단원으로 출연했어요. 은희진 명창, 동생, 그리고 제가 이도령 역을 했죠. 그때 무대에 서면서 계속 무대에 서고 싶다는 깊은 열망을 느꼈어요. 그런데 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창극단 단장이던 안숙선 선생도, 그때까지 저를 붙잡아두던 학교에서도 제게 입단을 적극 권하는 거예요. 그래서 입단하게 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