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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한국의 명장

악기와 함께한 60년 나라의 음악을 완성하다

편종·편경 복원한 악기장 김현곤

  • 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악기와 함께한 60년 나라의 음악을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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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中農) 정도 되는 그의 집에서는 고등학교는 고향에서 다니라 했지만 그는 무작정 서울로 떠난다. 운명의 부름이었을까. 악기가 있는 서울로 달려간 것을 보면 악기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몰래 나무를 한 트럭 해다 판 돈 5000원으로 화물차 타고 남원에 가서 이리로, 거기서 통학차를 타고 대전까지 와서 역 앞 천막집에 끼어 밤을 밝히고 이튿날 기차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네요.”

전쟁 후 서울 중심가는 무법지대 같았다. 주먹이 판치고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과 반공포로, 피난민이 뒤섞여 각자도생하는 아수라장에서 수줍어 말도 잘 못하는 시골 소년은 자기 앞에 펼쳐진 넓은 세상에 환호한 듯하다.

“일제 때 서울로 간 고향 사람의 주소만 달랑 가지고 왔는데, 찾아가보니 도넛 장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 집에서 한 사흘 신세 지고 남대문 양키 시장을 기웃거리다 우연히 신의주 사람을 만나게 됐습니다.”

사람 사귀는 데 그를 따를 자는 없을 듯싶다. 반공포로로 내려온 신의주 사람과 이야기하다 거처할 곳을 부탁했다는데, 그는 아직도 그 사람의 이름과 학력, 고향에서 하던 일까지 상세하게 기억한다. 이후 그가 만난 예술가들의 이력과 그들의 애인, 시라소니 등 주먹들과 중구 일대 옛 가게들의 역사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전후 서울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간다.



“신의주 사람 소개로 찾아간 곳이 충무로 사진 가게인데 주인 김창호는 기자클럽에서 트럼펫 부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사진기를 수리해 팔고 사진을 현상하는 일을 했는데 저녁이면 가게에 음악가가 모여들었어요.”

이후 주인은 아예 가게를 신향사(新響社)라는 악기점으로 바꾸었다. 사진기도 잘 다루었던 김현곤은 악기점을 연다는 말에 가슴이 설다. 그만큼 음악과 악기가 좋았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악기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악기를 고쳐 파는 가게엔 자연히 음악가의 발길이 잦았다. ‘애수의 소야곡’을 지은 박시춘, 가수 남인수, 엄앵란의 아버지 엄재근과 클라리넷 주자였던 작은아버지 엄토미, 관악기라면 피리부터 오보에까지 못 부는 게 없고 색소폰도 뚝딱 만들어내던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이병우(속명 이병호. 안익태의 ‘코리아 환타지’에서 피리 독주도 했다)까지 당시 내로라하는 음악가를 죄다 만날 수 있었다. 작업복에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니던, 한양대 건축과에 재학 중인 젊고 여윈 이봉조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악기 수리의 달인 되다

신향사의 주인 김창호가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가게를 그만둘 무렵, 김창호의 선배인 문태민이 바로 옆에 연악사(硏樂社)를 열었다. 신향사에서 일 잘하는 김현곤을 눈여겨본 문태민은 그를 연악사로 끌어왔다.

“그분도 신의주 출신으로 미군부대 클럽에서 색소폰과 아코디언을 연주했어요. 연악사는 신의주 시절의 음악 단체인데, 그 이름을 지금 제가 쓰고 있지요.”

종로3가 지금 그의 국악기점에 연악사라는 이름을 단 것은 그의 긴 인생에서 그 시절이 화양연화(花樣年華)여서일까. 신향사 시절 선린상고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던 그는 연악사로 옮기면서 학교도 그만두게 될 정도로 바빴다.

“연악사는 규모도 컸지만 문 사장은 가게는 제게 일임하고 자신은 음악과 여자에 빠져 사는 분이었어요. 제가 안팎 살림을 도맡게 되었지요.”

그 무렵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학교 악단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여학생이었다. 명동의 음악감상실과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며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워나갔다. 6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하루에 한두 번은 그 여학생을 떠올릴 정도로 깊이 각인된 사랑이다. 스무 살이 되자 그는 독립을 꿈꿨다.

“온갖 악기를 다루고 거래하다보니 악기점은 잘할 자신이 있었지요. 참 신기한 게, 어떤 악기든 만져보면 알겠더라고요. 소리에 대해서도 말소리는 몰라도 악기 소리는 절대음감 비슷하게 알아맞혀요. 어린 시절에 들은 음악 덕택인 것 같습니다.”

한량이던 큰형은 풍물잡이들을 불러 동네에서 크게 풍물판을 벌이는가 하면, 축음기도 갖고 있었다. 전라도의 명창과 뛰어난 연주자들을 접할 수 있었고, 그때만 해도 자주 벌어지는 굿판과 서당에서 시조창을 부르는 가객들의 노래도 그의 뇌리에 남아 있다.

“집 뒤에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아버지 친구 중 퉁소를 잘 부는 어른이 있었어요. 그분이 우리 집 대나무를 잘라다 퉁소 만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가마솥에 삶아낸 대나무에 달군 쇠꼬챙이로 구멍을 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현곤은 그가 부는 퉁소 소리에 왠지 모를 슬픔에 겨워 ‘눈물이 막 나는’ 소년이었다. 또 밤이면 삼(마)을 삼는 여인네들이 들려오는 단소 소리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기억도 있다. 그런 그이기에 음악과 악기에는 본능적으로 끌렸고, 어느 악기든 잘 이해하고 잘 다루었다. 거기다 신향사 시절부터 가게 운영도 5년쯤 해보니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자만심이었던 게지요. 자금은 충무로에서 알게 된 고학생 친구가 일하는 진선미다방의 주인 윤갑숙(소설 의 작가) 씨가 대주었어요.”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에서 원(園) 자를 따다가 ‘미원악기’라는 이름으로 악기점을 차린 김현곤은 전국 미군부대의 악기는 다 싹쓸이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어떤 악기를 사야 할지 아는 눈과 귀, 무엇이든 고칠 능력도 있었다.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들에게서 흘러나온 스트라디바리 같은 오래되고 고가인 바이올린에다 전후 건설붐에 새집을 지으면서 헌 악기가 쏟아져 나올 때라 돈벌이는 널려 있었다. 그러나 젊은 사장은 사업보다 연애에 빠져 있었다. 만날 여학생과 데이트하며 사업을 등한시한 바람에 3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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