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야구장에서는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장애 정신과 의사와 ‘사고뭉치’ 청소년들의 힐링 캠프

  • 류미 | 국립부곡병원 신경정신과 의사

    입력2014-04-22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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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6월 월간 ‘신동아’에는 휠체어 타는 정신과 의사 류미(39) 씨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경남 창녕 국립부곡병원 신경정신과 의사인 류씨는 고3 때 불의의 사고로 양쪽 발목의 연골이 괴사한 이후로 10분 이상 서 있거나 30분 이상 걸을 수 없다.

    그는 기자로 일하다 퇴사하고 서른이 넘어 가톨릭대 의대에 편입했지만 인턴, 레지던트 과정에서 숱한 실패를 맛보았다. 순탄치 않았던 인생 역정을 전하면서도 그는 유난히 표정이 밝았다. 그는 “장애는 불가능한(disabled)이 아니라 도전받은(challenged) 것”이며 “발목이 내 인생을 ‘발목’잡았지만 주저앉지는 않았다”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인터뷰 말미에 ‘야구’와 ‘청소년’이라는, 향후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2년 만에 류씨가 나타났다. 어느새 ‘야구’와 ‘청소년’이라는 ‘작전’을 완수한 후였다. 서울동대문경찰서에서 중학생을 상대로 야구를 가르치는 ‘푸르미르야구단’ 프로그램의 ‘멘탈 코치’로 합류한 것.

    경찰이 ‘특급’으로 분류하는 사고뭉치부터 새터민,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지만 학교 성적이 좋아 도리어 꿈을 포기하게 된 아이까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류씨가 기록한 푸르미르야구단 아이들의 변화 일기는 4월 말 책 ‘동대문 외인구단’(생각정원)에서 공개된다. 그중 일부를 ‘신동아’ 독자에게 미리 선보인다.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전공을 살려 야구 선수의 ‘멘탈 코치’가 되는 건 어떨까 고민 중이에요. 또 요즘 중고교생 상담에도 관심이 가요. 오늘 오전 파주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왔는데, 정신병을 앓는 분은 완치되기 어렵지만 아직 어린 중학생들은 제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뀔 수 있잖아요.” (류미, ‘신동아’ 2012년 6월호)



    어제까지의 일은 전부 괜찮다

    “야구장에서는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경찰에서 호열이는 ‘특급’으로 분류된 아이였다.

    북한도 무서워서 남침을 하지 않는다는 대한민국 중학생. 호열이는 경찰도 쉽지 않다고 낙인을 찍은 아이다. 80㎏은 족히 나갈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앳된 보조개가 있다. 학교에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랑 따로 왔네?”

    “아, 네… 저는 ‘등정’을 먹어서요.”

    ‘등정’을 먹다니, 이게 무슨 말이지? 섣불리 모르는 티를 낼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아이에게 이 사람은 내 편이 아니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아이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아이들의 언어부터 조금씩 사용해보면 어떨까. ‘등정’의 말뜻은 여전히 오리무중. 순발력을 발휘해서 상황을 유추해본다. ‘등정’을 먹어서 따로 왔다고 하니 어쨌든 학교에서 온 것은 아니리라.

    “그럼 어디서 왔는데?”

    “아, 피시방에서 왔어요. 열흘 동안 ‘등정’ 먹었으니 그동안은 버텨야죠.”

    열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혹시 ‘등정’은 등교 정지의 약자쯤 아닐까. 나도 호열이의 용어를 써보기로 한다.

    “뭐 때문에 등정을 먹었는데?”

    경찰의 경고와는 달리 호열이는 생각보다 밝았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지금 보니 긴 바지를 두 단 정도 접어 입었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거겠지. 외모에도 관심이 많고, 남들에게 주목받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다.

    “아, 그거요. 제가 전자담배를 피웠거든요.”

    역시 아이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전자담배라면 어른들이 금연하기 위해 피우는? 타르는 없고 니코틴만 있어서 인체에 무해하다고 알려진? 설마 그 정도로 골초일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웬 전자담배지?

    “전자담배를 피면요, 연기가 나니까요. 멋있잖아요. 냄새가 안 나니까 들통은 안 나고요.”

    그러니까 폼은 내야겠고, 들키기는 싫은 호열이의 타협점이 전자담배였다. 호열이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은근히 내가 자신과 놀아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일단 나는 호열이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 내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 아이는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사실 이번 ‘등정’도 전자담배하고 또 다른 것도 있어서 그렇게 됐어요. 제가요, 우리 반 애한테 돈을 좀 달라고 했거든요. 많이도 아니에요. 500원요. 그거 안 갚았다고 담탱이한테 이르는 애들이 있다니까요. 참, 어이없어서.”

    “야구장에서는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휄체어 타는 의사 류미 씨.

    그래도 돈을 달라고 하는 건 나빴다, 라고 단죄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듣기로 한 날. 나는 말하는 대신 듣는 쪽을 택한다. 학교를 못 가는 열흘 동안 이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어른은 아무도 없지 않을까.

    ‘등정’이라는 낙인이 찍힌 아이는 말할 권리가 없다. 혼날 의무만 있다. 한 번쯤은 말할 권리를 줘야 아이도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나는 푸르미르야구단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본다.

    “친구들도 좋아하니까 여기 와서 야구하는 것은 어때?”

    이 말을 꺼내자 호열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처음에 나는 생각했다. ‘학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 여기 푸르미르야구단에 나오면 좋을 텐데. 와서 신나게 야구도 하고 어울리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나의 생각이었다. 호열이는 대답이 없다. 나는 호열이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된다. 전자담배 연기로라도 폼을 내고 싶어 하는 호열이가 등교 정지 조처로 일주일 내내 친구들을 못 보다가 야구하겠다고 운동장에 떡하니 나타난다? 시쳇말로 쪽팔려서 못 한다. 당연히 내키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제가 보고 싶어도 너무 기다리지는 마세요. 보시다시피 제가 좀 바쁘잖아요.”

    아! 저 말은 안 나올 거라는 이야기구나. 후다닥 인사를 하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호열이. 그 후로 나는 호열이를 계속 기다렸지만 운동장에서 호열이를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야구하는 의사

    하루는 명광이가 훈련에 지각을 했다. 유니폼은 입었는데 발에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감독님, 제가 다리가 아파서 훈련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쪽에서 쉬어. 안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나온 것은 참 잘했다. 다른 아이들이 훈련하는 모습 잘 봐. 보는 것도 훈련 중 하나니까.”

    박승민 감독이 명광이의 어깨를 다독인다. 명광이가 고개를 푹 꺾고 벤치에 앉는다. 나는 명광이와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기회다 싶어 명광이 옆에 가서 앉는다.

    “많이 다쳤니?”

    “아니오. 그냥 조금 삐었어요.”

    “빨리 나아야 야구도 할 텐데. 명광이는 야구 재미있어 하잖아.”

    “네….”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을 조물거릴 뿐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오늘은 명광이가 내 친구네. 나도 몸이 안 좋아서 운동을 못 하잖아. 나랑 좀 놀아주면 어때?”

    “네….”

    “명광이는 책 좋아하니?”

    “별로 안 읽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푸르미르야구단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려고 하거든.”

    그제야 명광이가 관심을 보인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온다는 게 신기한 것 같다.

    “만화책은 봐요. 그림이 많은 책도 좀 보고요. 우리 책에도 그림을 많이 넣어주면 읽어볼게요.”

    방금 ‘우리’라고 말했다! 아까와 달리 눈빛이 반짝이고 목소리도 커졌다.

    “그림 넣는 것은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닌데 어쩌지. 대신 출판사에 명광이가 한 이야기를 전달해볼게.”

    “네.”

    나는 왜 명광이가 소심하다고만 생각했을까. 이야기를 나눠보니 자기 생각을 조곤조곤 잘 전달한다.

    “명광이는 꿈이 뭐야?”

    “의사가 되는 거요.”

    “정말? 나도 의사잖아. 반갑다.”

    “선생님이 의사이신 줄 몰랐어요. 그런데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죠?”

    명광이의 첫 질문. ‘의사=공부’라고 물으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좀 그렇기는 하지. 명광이는 공부를 잘하나 보네. 의사가 되려는 걸 보니 말이야.”

    말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공부는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 선생님이 의사잖아.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

    명광이는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조바심이 난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명광이가 다시 말을 할까.

    “명광이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어?”

    “큰 병원의 의사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어서 더 반갑다.

    “왜 큰 병원이야?”

    “크면 좋잖아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는다. 이 상황에서 웃으면 명광이가 다시 말을 거둘지 모른다.

    “그러면 야구는 어떻게 할 거야? 야구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의사가 되면 야구는 못 하겠죠. 어쩔 수 없이 하나는 포기해야죠.”

    명광이의 입에서 ‘포기’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 아이는 그동안 무슨 일들을 겪었을까. 하지만 이 아이들은 누구보다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과거보다 미래가 더 중요한 시기다. 나는 명광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조바심이 난다.

    “왜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의사라고 야구를 못 하나 뭐. 사회인야구단도 많아.”

    명광이가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본다. 명광이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줘야 한다.

    “야구도 하고 의사 일도 하면 되지. 그래, 야구하는 의사. 그러면 되겠다. 명광이가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하는 의사가 되면 되겠네!”

    “그런 방법이 있네요.”

    이 순간 왜 내가 더 기분이 좋았을까. 그제야 명광이도 씩 웃는다.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있던 아이가 이제 고개를 들고 푸르미르야구단의 훈련 과정을 지켜본다. 명광이는 물론 푸르미르야구단의 모든 아이가 꿈을 포기하기보다 누가 뭐라든 자신의 꿈을 소중히 아끼며 당당하게 나아가기를 응원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푸르미르야구단 생활은 아이들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지각쟁이들을 알아서 모이게 했고, 성질부리던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게 했다. 자신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챙길 줄 알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게임만큼 아니 게임보다 재미있는 게 야구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경찰서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도 바꾼 것일까. 해단식을 위해 경찰서에 들어오면서 오늘의 마무리 투수 영훈이가 먼저 말문을 연다.

    “부장님, 저희 경찰서에 그냥 놀러와도 돼요?”

    그 티 없는 질문이 황당하다. 경찰서에 놀러오다니.

    “야, 너는 경찰서가 무슨 놀이터냐. 놀러오게.”

    내가 반문하자 영훈이는 오히려 정색한다.

    “왜요. 여기 오면 야구도 하고, 끝나면 맛있는 것도 먹고 좋잖아요.”

    영훈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도나도 “선생님, 저희 여기 또 놀러와도 돼요?”라고 연신 외친다. 어이없기는 하지만 경찰도 그 모습이 싫지만은 않은 것 같다. 싱긋 웃는 걸 보니 “그래, 놀러 와라, 놀러 와” 라고 말할 것도 같다. 역시 그건 나의 오산. 대한민국 경찰이 그렇게 호락하지 않다.

    “이 녀석들. 사고 쳐서 들어오려고 그러지.”

    아이들도 지지 않는다. 분위기 메이커 재진이에게 유주가 장난으로 시비를 건다. 해단식을 하러 가는 길에도 농담을 멈추지 않는 아이들. 무거운 분위기라고는 없다. 아이들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야구의 힘이기도 할 것이다.

    우울증이 생기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최근 세로토닌이라고 하는 신경전달물질 부족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 알려졌다. 놀랄 만한 사실은 몸을 쓰는 행동, 운동 그 자체가 세로토닌 같은 호르몬을 분비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사람에게 운동을 하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자체로 처방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몸을 쓰면 피곤해져야 할 것 같은데 더 기운이 솟는 이 신비한 역설. 8개월 동안 나는 이론으로만 알던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푸르미르야구단이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보란 듯이 모였고 연습했고 즐겼다. 이유는 어쩌면 간단했다. 어떤 사연을 가졌든 아이들은 출구가 필요했다. 아이들에겐 출구가 없었다. 피시방이 재미있는 이유는 꼭 게임이 재미있어서라기보다 그곳이 시험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운동장에 오면 아이들은 해방됐다. 그곳에는 성적에 따른 차별도 줄 세우기도 없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강요도 없었다. 병살타를 쳐도 삼진이 돼도 신났다. 성적이 떨어져서 잔소리를 듣고 스트레스 받는 것에 비하면 병살타나 삼진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어른 친구

    “승운아, 너는 백만장자라면 어떻게 할래?”

    대부분의 아이는 이 질문을 던지면 신나한다. 마치 돈을 손에 쥔 것처럼 ‘사업을 한다’‘집을 산다’는 아이가 많고 조금 배포가 큰 아이는 ‘기부를 한다’고 답한다. 승운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저는 해외로 가고 싶어요.”

    말수가 없고 신중한 아이 아닌가. 모험심이 많은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이유를 묻는다.

    “그냥 여기 말고 다른 데로 가고 싶어요.”

    해외란 그러니까 ‘여기 말고 다른 데’의 대명사였다. 비슷한 질문을 한 번 더 던진다.

    “이번 방학 때 꼭 하고 싶은 건 뭐니?”

    “여행이요.”

    낯선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왜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학교 스트레스, 공부 스트레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승운이는 주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어깨가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혹시 부담감이 크니, 라고 물으면 그저 고개를 떨구면서 “괜찮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승운이는 말하자면 초자아가 강해서 자아를 억압하는 상황이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성돼 있다. 이드는 쾌락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요소. 본능에 가깝다. 자아는 이드의 요구와 현실 상황을 고려하며 적절한 타협안을 찾는 중재자. 현실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초자아는 도덕, 양심, 규범 같은 곳에 내재화된 것을 말한다. 이 셋은 물론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드가 너무 강하면 욕망에 따라 통제되지 않는 삶을 산다. 초자아가 강하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초자아가 지나치게 강할 경우는 엄격한 심판관이자 가혹한 비판자인 부모가 마음속에 사는 것과 같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인 승운이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저렇게 초자아가 발달하게 됐을까.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 주변의 시선 같은 것이 자아를 억압했을 것이다. 물론 그로써 좋은 성적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그러면 또다시 시작되는 기대, 부담, 다시 한 번 억압…. 아이는 자신을 억압해야지 주변의 칭찬을 받는다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있다. 승운이가 설문지에 작성한 답변에도 어두운 내용이 많았다.

    만일 내가 지금 나이보다 10살 위라면 [두렵다]

    내가 가장 자신하는 것은 [없다]

    내가 요즘 제일 걱정되는 것은 [공부]

    이런 승운이의 소원은 무엇일까.

    첫째 소원은 [세상이 공평해지는 것]

    둘째 소원은 [없다]

    셋째 소원은 [없다]

    승운이의 소원은 단 하나, 세상이 공평해지는 것이었다. 야구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우등생 승운이, 항상 듣는 것은 칭찬뿐인 승운이의 소원이 세상이 공평해지는 것이라니. 승운이는 불공평한 세상에서 자신은 혜택을 받는 축에 속하는 아이다. 승운이는 어찌 보면 불공평한 세상의 앞줄에 서 있지 않은가.

    앞줄에 있어도 행복하지 않다. 왜일까. 일단 내가 앞줄에 있다고 해도 내 앞에는 또 누군가가 있다. 그 말은 내 차례에서 앞으로만 나가야 하지 절대 뒤로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등생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공부’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등생이라는 것은 부담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답이 익숙한 아이

    어쩌면 우등생의 스트레스가 더 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등생은 스트레스 받는 것을 표 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표 내면 주변사람이 걱정하므로 해서는 안 된다. 이쯤 되면 출구가 없다. 이중고다. 어른을 실망시키는 나쁜 아이가 될 수 없다. 결국 방법은 하나다. 참는다. 참고 공부한다. 또 참고 공부한다.

    성적이 유지되거나 오르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성적이 떨어지면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마음이 오그라들어 있는데 어른들은 ‘실망했다’고 말한다. 실망한 어른들 때문에 마음은 또 다시 작아진다. 성적을 유지해야 본전인 현실. 당연히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다가올 미래는 두렵기만 하다.

    푸르미르야구단은 애초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는 아이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 다양한 아이가 첫 면접에 왔지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는 연습과정부터 불참했다. 대신 성적은 별로 좋지 않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꾸준히 참여했다. 말수가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 밝고 성적은 중하위권인 아이가 많았다. 승운이는 푸르미르야구단에서 별종이었다.

    아이러니였다. 소위 부적응자를 교화하려고 시작한 푸르미르야구단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기쁨을 얻은 아이는 승운이였다. 해방구가 없는 것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무도 승운이가 공부 외의 다른 길을 꿈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승운이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지금, 나는 그때까지 아무도 승운이에게 던질 생각조차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승운이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니?”

    승운이는 짧고 굵게 “네”라고 말했다.

    공부 외에 장기가 있는 아이. 이 아이가 두 가지 재능이 있으니 행복한 고민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경우 99%는 공부를 위해 다른 장기가 희생된다. 승운이가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먼저 승운이의 초자아가 강력하게 브레이크를 걸 것이다. ‘야구를 좋아하지만 잘하는 공부를 포기하고 야구인의 길을 간다는 것은 우등생답지 못한 일’이라고. 만에 하나 승운이가 그 벽을 뚫고 야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고 하면 주변의 반응이 어떨까. “아, 그랬니. 네가 야구를 좋아했구나.” 이렇게 말하는 어른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열에 아홉은 “네가 제정신이니? 배가 불렀구나. 갑자기 너처럼 공부 잘하는 애가 웬 야구니” 하면서 정색하지 않을까.

    푸르미르야구단 해단식 자리에서 승운이의 얼굴이 유난히 쓸쓸하다.

    “승운아, 다음에 또 야구할 기회가 오겠지. 야구장을 갈 수도 있고 말야.”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승운이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급해져서 나도 모르게 그만 발설하고 만다. ‘진짜요?’ 하고서 흥분하면 좋을 텐데 승운이는 끝까지 섣부른 대답은 하지 않는다.

    “네, 감사합니다.”

    좋아도 좋다고 말하지 않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아이. 자신의 바람보다 어른이 원하는 정답을 말하는 데 익숙한 아이. 승운이는 푸르미르야구단의 유일한 좌완 에이스다.

    이런 나를 보고 ‘너는 아이가 없어서, 학교 현장에 직접 있지 않아서 속 편한 소리를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는 맞지 않는 몽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푸르미르야구단 활동을 지켜보면서 나의 이런 생각은 더 공고해졌다. 학교에서 주눅 들어 있던 아이가 공을 던지고 잡으면서 누구보다 신나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공만 잡으면 신나는 아이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자신은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밝은 쾌남 재진이. 덩치는 프로야구 선수급이지만 순하고 착한 유주. 묵묵히 포수 일을 하면서 기계 쪽에 관심이 있다고 수줍게 말하던 진영이. 감정에 솔직한 성격이지만 주장을 맡아 하면서 누구보다 팀워크를 먼저 생각했던 승현이. 그 나이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큰 시련을 겪었으면서도 운동장에만 오면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던 명광이. 그리고 자타가 공인하는 우등생이지만 꿈꾸는 유일한 세상은 공부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라고 하는 푸르미르야구단의 에이스 승운이….

    누구 하나 특별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 특히 야구장에서는. 어떤 포지션이든 중요하지 않은 포지션이 없다. 투수의 실책은 야수가 막아줘야 하고, 야수의 실책은 그다음 이닝에서 타자가 점수를 내면서 날려줘야 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모두 내가 필요한 존재구나, 특별하구나,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게 된 아이는 이제 여유가 생겨 다른 아이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올 2월, 나는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됐다. 어떤 아이라도, 성적이 꼴찌이거나 사람들이 다 욕하는 아이일지라도 마음속에는 빛나는 별 하나가 있다는 생각. 철없다고 할지 몰라도 푸르미르야구단을 마치고 나서 이 생각은 더 강해졌다. 무력감에 빠져 있던 의사에게 아이들이 준 선물이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밝은 에너지. 에너지를 받은 나는 어쩌면 예전의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푸르미르야구단을 거친 아이들이 예전의 아이들이 아닌 것처럼.

    그라운드에서 만나기 전 우리는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몇 년째 싸우는 나. 공부 스트레스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인 아이들. 수많은 부상과 재활의 시간을 보내고 은퇴한 박 감독. 그라운드에서 우리는 누구도 타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그라운드에서 우리는 야구 하나로 뭉친 선수였고, 감독이었다. 한 팀이었다. 아이들에게는 해방구였고, 나에게는 에너지였다. 그리고 박 감독에게는 또 다른 세상으로 도약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헛스윙을 하고, 땅볼도 숱하게 놓치다 마침내 삼진을 잡고, 홈런을 치면서 우리의 상처는 자연스레 아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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