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봄의 꽃사태와 개심사의 연못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04-23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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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심사는 봄꽃 구경하고 산책하기 딱 좋은 곳이면서 구도자가 세속과 절연해 심검(尋劒)하는 곳이다.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서산 개심사의 꽃.

    아내가 신발부터 신는다. 마음은 벌써 바깥에 나가버렸다. 아, 봄인데 뭐하지, 라고 말할 때부터 조짐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1층 없는 아파트 2층에 있는 우리 집 베란다 앞으로 벌써부터 봄이 꽃으로 변신해 들이닥친 지 오래였다. 가을이 낙엽이고 겨울이 눈이라면, 봄의 형식은 꽃이다. 꽃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욕망, 견딜 수 없는 갈증, 참기 어려운 갈증이 생긴다. 그럼에도 피곤하다는 걸 핑계 삼아 이윽고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려는 순간 아내는 봄빛을 닮은 점퍼를 입고 물병 하나를 들고, 그대로 엎어져 있다가 나중에 혼나든지 아니면 따라오든지 양자택일하라는 단호한 신호를 남긴 후 신발을 신는다. 나는, 그제야 엉거주춤 일어선다.

    곧, 산이다. 일산에서 20여 분 북쪽으로 가면 저 설악이나 월악의 장엄한 악산에 견줘 산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야트막한 산이 몇 군데 봉기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심학산이다. 파주출판도시를 조성한 이후 그 특색 있는 건물군의 배경으로 심학산이 견실하게 떠받치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는데, 인근으로 교하 신도시에 운정 신도시 등이 들어서면서 작지만 단단한 이 산을 찾는 행렬이 늘었고 최근의 신드롬에 의해 심학산 전체를 3km 남짓하게 산책할 수 있는 둘레길까지 열려 한나절 바람 쐬며 소요하기에 좋다 해 꽤 많은 사람이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열의 끄트머리에 나도 끼게 된 것이다.



    소원 담은 문구

    산! 이렇게 부르기에는 작은 산이지만 그래도 언필칭 산이라, 따사로운 봄볕 때문에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무렵 정상에 이르렀다. 빙 둘러보니 일산에서 김포, 다시 거기서 저 멀리 개성 쪽으로 해 다시 파주 교하 운정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이런 정도의 산책이라면 일삼아 자주 할만한 일임을 금세 깨닫는다. 장비 챙기고 행장 꾸려서 저 멀리 드높은 악산을 매번 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야말로 동네 뒷산이라는 말에 딱 알맞은 포근하고 따사롭고 야트막한 산이다.



    그 오르는 길에 절이 하나 있어 산간약수 한 모금 바라고 잠시 들렀다.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절 한구석에 붙어 있는 소원을 담은 문구를 읽어보았다.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마음속 바람을 한 뼘 정도 되는 나뭇조각에 써서 붙여놓았다. 읽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이 났다.

    구체적인 사안 없이 ‘가화만사성’ ‘소원성취’ ‘관세음보살’ 이렇게 쓴 사람도 있고 합격, 취업, 이사, 득남, 결혼 같은 인생사 거치는 동안 꼭 이뤘으면 하는 일을 적은 사람도 있는데, 더러는 갖고 있는 아파트나 공장 부지가 하루빨리 팔리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고 추진 중인 복잡한 사업상의 계약이 원만히 성사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은 독특해서 웃음도 나올 만한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현실적인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건강을 해치고 가족이 어려움에 처하는 일도 많으므로 차라리 그렇게 기원하는 것도 당연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소원을 비는 내용 중에서도 가장 많고, 또 가슴 아픈 것은 병을 앓는 가족의 쾌유를 비는 내용이며 또 그런 와중에 먼저 이세상을 떠나간 사람을 애도하는 내용이다. 대개는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들이며 더러는 친구도 있고 함께 살던 반려견을 추모하는 내용도 있다. “로미야, 고생 많았어. 이제 편히 쉬어. 나중에는 꼭 사람으로 태어나렴.” 아마도 함께 살았던 개의 이름이 로미인 듯하다.

    한참이나 그런 애틋한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정호승 시인의 ‘소년 부처’를 떠올렸다. 쉬운 시가 꼭 좋은 시는 아니지만, 정호승의 쉬운 시는 일상의 한순간을 포착해 어떤 의미를 대번에 환기하는 매력이 있다.

    경주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 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씩은

    부처가 돼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사람들이 소원을 적어 붙여놓은 파주 약천사의 나뭇조각.

    때는 곧 초파일이라, 벌써부터 이 심학산 약천사에 정성을 바치는 이들이 연등을 달고 있었다. 초파일의 연등은, 연말 크리스마스의 트리처럼 부처님께 공양을 하는 한 방법으로 온갖 번뇌와 헛된 망상과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無明) 세계를 부처님의 밝은 지혜로 비추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오래전 가난한 여인이 있었는데, 가진 것은 오직 동전 두 닢뿐. 존귀한 분 석가를 위해 등불 공양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가난했던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이랄 수도 있는 두 닢 동전으로 등과 기름을 사서 부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에 아주 작은 등불을 밝혔다. 그날 밤, 큰 바람이 불어 왕후장상이 켜놓은 등불이 다 꺼져버렸지만 지극정성으로 전 재산을 바친 이 여인의 작은 등불만은 꺼지지 않았으니 이로써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이야기로 완성된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부처님의 제자 아난이 한밤중에 이 작은 등불로 다가가 불을 끄려 해도 꺼지지 않았는데 이에 부처님께서 “헛되이 힘쓰지 마라.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여인이 온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다. 연등을 밝히는 까닭이다.



    보광사와 마곡사의 연등

    봄날, 고즈넉한 산사의 연등에 처음 마음을 빼앗겼던 곳은, 신혼 시절 아내와 함께 산책 삼아 들른 파주의 보광사였다. 지금은 대불 공사도 완료됐고 오가는 길이며 요사채가 꽤 정비됐지만, 10여 년 전의 보광사는 어수선했다. 오후에 들렀는데, 한쪽에서는 공사를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연등을 달고 있었다. 비좁은 계곡에 들어앉은 사찰이라 공사 소리가 계곡을 쉬이 빠져나가지 못해 어수선했고, 그래서 잠시 둘러보고 나갈 참이었다.

    그랬는데 사찰의 행사로 인해 모든 공사가 일시 중지됐고, 서서히 해가 기울자 연등의 불빛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아! 그것은 흡사 출항하는 선단이 저 먼바다를 향해 밝힌 불빛 같았다. 동해안의 속초나 저 제주도의 표선면에서 깊은 밤에 아득하게 멀리 보이는 고기 잡는 배들의 집어등 같았다. 나는 한참을 보광사의 연등에 사로잡혀 있었다.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공주 마곡사의 연등.

    또 기억나는 연등은 마곡사의 것이다. ‘춘마곡 추갑사’라, 봄에는 마곡사요 가을에는 갑사라 했으니, 이 무렵의 마곡사는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한순간을 빚는다.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사찰이고 대전이나 공주의 역사가 간단치 않은 데다가 세종시가 창건되면서 마곡사 이르는 길이 많아지고 넓어졌으나, 어쩐 일인지 그 마곡사를 제대로 가본 일이 없다. 경상이나 전라의 대찰들은 그 자체로 목적지가 돼 큰맘 먹고 들르기 마련인데 대전 인근 공주의 마곡사라서 오가는 길에 한번은 들르겠지 하다보니 그 절에 들어가 무릎 한번 제대로 굽혀 앉은 일이 없으니 늘 마음만 분주했다. 올해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의 봄 마곡사는 꽃들과 연등과 또 그것들을 보려는 사람으로 붐볐을 것이다.

    그래도 아예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니, 내 마음속의 마곡사는 몇 해 전, 급한 마음에 너무 서둘러서 잠깐 들렀던, 그래서 더욱더 아쉽게 남아 있는 절집이다. 길을 잘못 들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의 뛰다시피 마곡사로 직진했다. 봄의 마곡사라고? 빛나는 경치에 눈을 줄 겨를이 없었다. 아무리 봄이라 해도 산사의 어둠은 일찍 드리워진다. 재촉하는 걸음 도중에 아는 사람을 만나는 불운까지 겹쳤다. 가벼운 인사 몇 마디로 헤어질 수는 없는 사이라서 선 채로 꽤 오랫동안 말을 나눴다. 제법 긴 얘기 끝에 헤어지고 나자 능선의 어둠이 기슭 아래로 침범해오고 있었다.

    개심사의 사계, 그 연못

    나는 봄의 마곡사를 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신라 선덕여왕 재위 시기인 서기 640년에 창건돼 충남 일대의 사찰 양식을 대표할 뿐 아니라 ‘춘마곡’이라는 표현답게 봄의 경치가 빼어나다. 또한 ‘택리지’며 ‘정감록’ 같은 인문지리서와 비서에 기록되기를 환란과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라서 김구 선생이 한때 몸을 숨겨 승려 생활을 했을 정도로 깊이 있고 기품 있는 곳인데, 나는 다만 서둘러 걸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해탈문을 지나고 천왕문을 지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어둠이 깃든 마곡사로 접어드는 순간인데, 연등이었다. 아니, 등불로 피어난 연꽃이었다. 천왕문을 지나면서부터 연꽃의 행렬이었다. 개천 위의 극락교를 따라 경내 곳곳으로 연꽃이 번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속도를 줄였다. 어둠이 내리면서 찾는 이도 하나둘씩 떠나고 난 뒤였다. 나는 연꽃이 핀 마곡사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연등은 슬픔 하나씩을 살며시 끌어안고 허공에 떠 있었다.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개심사 연못.

    일본의 현대음악가 호소카와 도시오의 작품 중에 ‘꽃이 피는 순간’이 있다. 그는 윤이상의 제자다. 도시오는 “난 스무 살 때 윤이상 선생님을 도쿄에서 처음 만났다. 그의 콘서트가 크게 열렸는데, 현대음악에 감동해 직접 찾아갔다.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베를린 예술대학교로 간 것”이라고 회고한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윤이상에게 배웠는데, 약간의 에피소드도 있다. 윤이상의 아들이 음악을 했는데, 대중적인 록음악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자지간이 소원해졌는데, 윤이상은 일본에서 찾아온 호소카와 도시오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위업을 잇고자 했다고 한다. 각별히 아꼈고 따끔하게 가르쳤다고 도시오는 회상한다. 1955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호소카와 씨는 베를린예술대학교에서 유학한 후 오케스트라곡 ‘시간의 심연 속으로(Into the Depths of Time)’ ‘순환하는 대양(Circulating Ocean)’ 등을 작곡했으며 오페라 ‘리어의 비전(Vision of Lear)’(1998)과 ‘한조(Hanjo)’(2004)를 썼다.

    내 눈앞에 펼쳐진 그의 곡은 호른협주곡 ‘꽃이 필 무렵’이었다. 2011년 가을,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필이 내한 공연을 했고, 브루크너의 미완성 대작 9번 교향곡에 앞서, 래틀의 베를린필은 도시오의 호른협주곡을 들려줬다. 1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곡이지만, 어떤 면에서 그날의 메인 레퍼토리인 브루크너의 9번만큼이나 강렬했다.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해강 김규진이 전서로 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현판.

    꽃은 어디서 피는가? 진흙 속에서 피어오른다. 꽃은 언제부터 피는가? 활짝 피는 봄날의 한순간이 아니라 겨울 내내 진흙 속에 연꽃이 내장돼 있었다. 꽃은 혼자서 피는가? 온 세상이 연꽃 한 잎 피우기 위해 격렬한 몸부림을 한다. 호른 주자들이 음악당의 2층 난간에 대기하고 있다. 사이먼 래틀은 어느새 오케스트라로부터 몸을 돌려 2층의 좌우 난간을 바라보며 지휘를 한다. 그 순간, 음악당 전체가 연못으로 변한다. 어느 고즈넉한 산사의 연못이런가?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서서히 연못 위로 파란이 번지면서 꽃이 피어오른다. 오케스트라와 호른과 지휘자와 관객이 일제히 꽃잎을 피우기 위해 정성을 바친다. 이윽고 꽃이 피는 순간이 된다. 음악당은 생명의 꽃으로 인해 찬란한 순간에 휩싸인다. 나는 실제로 내 눈앞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개심사의 연못이 생각났다.

    그 어느 절보다 각별히 사랑해 서산의 개심사를 자주 다녀오곤 했다. 봄에는 벚꽃이 만발했고 여름에는 유록색의 숲이 은성했고 가을에는 소슬한 바람이 나무들 사이에서 잉잉거렸고 겨울에는 흰 눈이 오히려 상왕산의 개심사를 포근하게 감싸곤 했다.

    오래전에 나는 개심사의 기품을 찍다가 그만 필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평일 오후, 개심사가 요즘처럼 유명세를 타기 전이라서 찾는 이는 아예 없었다. 그때는 디카 이전이라 다들 필름을 썼는데,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듯한 범종루의 유려한 선을 찍다가 그만 여분의 필름까지 다 쓰고 말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한눈에도 그 배낭은 등산용이 아니라 촬영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정말 예의가 아니지만 필름 한 통만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자기가 쓰는 필름은 내 카메라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과연 그랬다.

    그는, 개심사의 그 유명한 배롱나무(백일홍나무) 아래에 배낭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장비를 꺼내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한 손에 달랑 카메라를 든 나에 비해 그의 장비 일체는 가히 영화 촬영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는 중형 카메라를 세팅했다. 나는, 그를 위해 그로부터 멀리 물러섰다. 그의 카메라 앵글에는 속인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그는 카메라 프레임을 경내로 가져가기 전에 배롱나무 아래부터 천천히 찍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그의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배롱나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개심사의 연못이 있었다. 간결하면서도 강건한, 소박하면서도 정직한 개심사의 연못이 거기에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기회가 되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개심사를, 그 연못을 보러 다녔다.

    오래전에 그곳에 갈 때는 길이 불편했다. 그런데 불편한 만큼 소박하고 정겨운 데가 있었다. 이 나라의 관광이 자연 관광에서 역사 관광이요 문화 관광으로 바뀌면서, 특히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덕분에 개심사는 사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긴 그것도 좋은 일이다. 충남 서북부 일대를 ‘내포’라고 한다. 개심사에서 멀지 않은 홍성군 홍북면 일대와 예산군 삽교읍 일대를 지금은 내포 신도시라고 한다.

    2008년부터 진행한 충남도청 이전을 2020년 완료할 예정이다.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내포문화권 특정지역 개발사업’이 진행됐고 개심사를 찾는 관광객 편의를 위해 2011년부터 34억 원을 들여 진입도로 개설이 추진돼 이제는 자전거도로까지 갖출 정도가 됐다. 도로변에는 봄의 개심사를 상징하는 왕벚꽃나무 220주가 심어졌고 주차장도 새로 조성됐다. 이러한 변화는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해서는 안 될 일도 아니다. 핵심은 ‘왜 사람들이 개심사를 찾아오는가?’ 하는 그 문화적 질문에 맞는 답이 제출돼야 한다.

    개심(開心)과 심검(尋劍)

    예전에는 ‘세심동 개심사(洗心洞 開心寺)’라고 해서체로 소박하고 조촐하게 쓰인 자연석만으로 충분했다. 이제는 큼직한 일주문이 들어섰다. 계곡을 따라 오솔길이 이어지고 그 길 끝에 개심사가 있었다.

    이런 길을, 보행 편의를 위해 함부로 넓히거나 고쳐서는 곤란하다. 봄의 개심사! 왕벚꽃나무의 장관이다. 백색, 연분홍, 진분홍, 옥색, 적색 등 5가지 색의 왕벚꽃나무가 꽃을 피운다. 다른 지역보다 개화 시기가 다소 늦기에 대개는 4월 하순이 절정이고 5월 초라 해도 그 잔영을 볼 수 있다. 여느 벚꽃이 홑잎 하나씩 나뭇가지에 따로따로 붙어있다면 개심사 왕벚꽃은 겹으로 된 꽃잎이어서 여러 송이가 묶여 소담스러운 꽃다발처럼 느껴진다. 이런 운치가 훼손되지 않는 개발이어야 하는 것이다. 개심사의 연못에는 ‘경지(鏡池)’라고 새겨진 자연석이 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맑은 거울과 같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그런 마음이 가볍게 일렁거리는 개심사여야 한다.

    몇몇 건축가는 개심사에 대한 지나친 찬사에 대해 경계한다. 이를테면 ‘소박한 곡선의 미’ 같은 표현은 건축 문외한의 말이라는 얘기다. 깊은 산속에 사찰을 짓다보면 가까운 곳에서 목재와 석재를 구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굽은 나무와 돌을 정교하게 다듬고 이어서 지을 수밖에 없으니, 우선 그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소박한 미를 추구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건축적 한계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앞뒤의 우선순위가 바뀌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리해 귀결된 곡선이 개심사의 대표적인 인상임은 틀림없다.

    서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는 ‘동아일보’ 1999년 2월 9일자 기고문에서, 서울시의 무분별한 발전과 끔찍할 정도로 무질서한 간판들을 비판한 후, 약간은 풍자적으로 이렇게 썼다. “자동차의 소음, 간판의 소음이 가득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다. 날이 풀리고 꽃이 피면 이 도시를 떠나 교외로 나가자. 때로는 문화유산도 답사하러 가자. 그 무섭다는 사람 떼가 하나가 돼 충남 서산의 개심사에 가보기도 할 일이다. 개심사의 안양루 현판을 보는 건축가의 심정은 착잡하다. 쩌렁쩌렁한 현판은 건물을 내리누르고 건축가의 마음도 내리누른다.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건축가의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관점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개심사 현판이 대도시의 조잡하고 키치적이며 남을 압도하는 간판과 같은 맥락에서 비판할만한 것인지는 의아하다. 해강 김규진이 대자 전서로 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현판은, 단순히 안양루 이마에 큼직하게 매달려 있는 상태만으로 말할 수 없는 흐름이 있다. 산 아래에서부터 천, 천, 히 걸어 올라가는 흐름 말이다.

    봄의 꽃과 여름의 숲과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이 상왕산 기슭을 가득 채운다. 절집에 급한 용무가 있지 않은 한,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 천, 천, 히 걷게 돼 있다. 꽃과 나무들, 그 숲 사이로 걷고 또 걷다보면 흡사 새들의 집처럼 상왕산 품 안에 단아하게 깃든 개심사에 이르게 된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연못을 거쳐 안양루로 오른다. 그러다 현판을 보게 되면, 압도적인 크기 때문에 위압감을 느끼기보다는 단호하고 단단한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됐음을 알게 된다.

    황소를 닮은 시인 문태준이 개심사에 와서 시 하나를 얻었다. ‘빈집의 약속’이다. 그 앞 구절을 읽어본다.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했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오호라 ‘심검(尋劒)’이라! 온갖 망상과 잡념과 번뇌를 단번에 끊어버리는 참된 지혜와 진리, 곧 반야의 검을 심검이라 한다. 문태준의 시를 한번 완상하고, 개심사 경내 심검당(尋劒堂) 현판을 올려다보고, 해강 김규진의 장쾌한 글씨까지 한 번 더 둘러본 후, 개심사 마당에 서서 배롱나무와 그 아래 연못까지 거슬러서 다 복기해 살펴보고 나면 이 깊은 산속의 심검을 잠시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개심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봄꽃 구경하고 산책하기 딱 좋은 곳이지만 구도의 길을 가는 분에게는 세속과 절연해 심검하는 곳이니, 해강의 현판이 그토록 장대하고 강렬한 까닭을 그제야 알게 된다. 연못 속의 연꽃은 아직 철이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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