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역사를 자랑하는 옻칠은 동양에서 애용해온 도료다. 전통 목재 기물에 발라왔으니 가죽에 바른다고 뭐 별다른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가죽에 옻칠하는 기법은 의외로 까다롭다고 한다.
“가죽은 질기고 가볍지만 열과 습기에 약합니다. 열에 터지고 물 한 방울이 닿아도 얼룩이 지지요. 가죽에 옻칠을 해주면 열과 습기에 강해지고 곰팡이도 피지 않아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옻칠을 잘못하면 오히려 가죽이 터지고 갈라집니다. 가죽에만 맞는 옻 배합 방식이 따로 있답니다.”
옻은 물과 불, 공기를 빼고 세상 어느 물질에도 다 칠할 수 있다는 만능 도료지만 가죽에 옻이 잘 스며들도록 칠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게 까다롭기 때문인지 가죽에 옻칠해 만드는 칠피공예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대 유물 외에는 남은 게 없고,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유물이 남아 있을 만큼 칠피공예가 발전한 흔적이 있으나 그것도 조선시대 중기에서 멈추고 만다.
칠피공예의 맥이 이렇듯 일찍 끊어져버리면서 가죽에 바르는 옻의 배합 비율 역시 알 수 없게 된 것인데, 박성규의 한평생은 한마디로 그 배합 비율을 찾는 여정이었다. 마치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과제에 몰두하듯 그는 수수께끼로 남은 옻 배합의 비밀을 풀기 위해 가죽과 옻에 매달렸고, 마침내 그 비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나전칠기 상감 기술이 바탕

주칠한 철갑상어의 돌기가 돋보이는 옥새함. 철갑상어 가죽은 붙이기가 어렵다.
“아주머니를 따라간 곳은 장롱 짜는 ‘농방’이었습니다. 기술도 배우고 용돈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용돈은커녕 집에 갈 차비조차 없어서 농방에서 먹고 잤지요.”
기술도 처음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방의 도제식 교육이 그렇듯 처음 한동안은 연탄불 갈고 청소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혼수용 장롱이 잘 팔리던 때라 농방은 규모가 꽤 커서 가구 형태를 짜는 백골반과 농에 붙일 자개를 자르고 붙이는 나전반, 칠반이 따로 있었다. 그는 나전반 소속이었다. 지금 그가 가죽에 자개를 상감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데는 이때 배운 기술이 바탕이 됐다.
우리 나전칠기 상감법은 그냥 기물 표면을 파서 자개를 박아 넣는 중국의 상감법과 달리 상감한 위에 옻칠을 새로 한 다음 표면을 곱게 갈아낸다. 그가 가죽 작품에 자개를 상감할 때도 나전칠기와 마찬가지로 가죽을 파서 자개를 새겨 넣고 옻칠한 다음 갈아낸다. 그래서 언뜻 보면 나전칠기와 구별하기 힘들다. 다만 나전칠기처럼 번쩍거리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는 언제나 ‘재능보다 노력’을 내세우는 그이지만 이리 농방에서는 최고 솜씨로 여기저기 오라는 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스무 살이 가까워올 때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 몸담은 곳은 상패를 제작하는 공방이 많이 모여 있던 종로통의 한 공방이었다.
“서울에 오니 솜씨 좋은 친구가 수두룩하더군요. 제가 일한 곳에서는 완성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양대로 자개를 오려 붙여주는 일만 했어요. 주로 글씨를 오려 붙이는 일이었지요.”

주칠한 소가죽에 통영 자연산 전복 껍데기를 상감한 이층농. 자개 빛이 신비할 정도로 은은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