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관료이던 유희춘의 동침 대상은 대부분 관기(官妓)였다. 유배된 양반 이문건은 기생을 데리고 잤다. 그러나 ‘부북일기’ 속 무인들은 주탕, 개인 집 사노비, 기생 등으로 다양했다.
近 抱 狎 同枕 同好…
그들이 동침을 표현한 한자는 대개 ‘근(近, 가까이 하다)’이다. 박취문의 1645년 2월 6일 일기에는 “저녁에 이석로와 이득영이 여색(女色)에 대패(大敗)했다. 우스운 일이다. 박이돈은 나이 든 주탕 태향과 동침했다(抱). 나는 우연히 옥매향(玉梅香)을 만나 동침했다(近)”고 기록돼 있다. 자신은 ‘근(近)’, 동료들의 경우엔 ‘포(抱, 안다)’라고 표현했다. 이문건도 ‘近’을 썼다. 1552년 11월 20일, 연회가 끝난 뒤 기생과 잠자리를 한 것에 대해 이문건은 “(기생의) 성병이 두려워 가까이하지 않았다(畏疾不近)”고 했다. 유희춘도 1571년 5월 12일 일기에 “박순이 전주 기생 준향을 가까이했다(近)”고 적었다.
동침을 의미하는 표현에는 ‘近’ ‘抱’ 외에도 ‘동침(同枕, 같은 베개를 벴다)’ ‘동호(同好, 같이 좋아했다)’(박계숙, 1605년 12월 27일) 등이 등장한다. 유희춘의 ‘미암일기’(1570년 10월 18일)에는 ‘압(狎, 희롱하다)’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이순신과 관련된 다른 문헌에도 일반적으로 ‘近’은 성관계를 뜻한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에 중앙에서 활약한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에 “(이순신은) 7년 동안 군중(軍中)에 있었으나, 몸이 고통스럽고 마음이 지쳐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在軍七年, 苦身困心, 未嘗近女色)”고 썼다.
이순신도 다른 여성과의 성관계가 자연스러운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고, 그 시대의 다른 인물들이 거리낌 없이 동침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그 역시 누군가와 동침했다면 난중일기에 반드시 ‘近’이라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항복의 말처럼 이순신은 군 생활 중에 여자를 멀리했고 실제로 관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1. 이 글은 오직 소설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2. ‘여진’이라는 여성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실명의 여인이다.
일러두기를 둔 이유는 독자가 받을 충격, 즉 성웅화한 이순신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는 소설가의 상상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렇다.
“나는 병신년 가을에 처음으로 여진을 품었다. (…) 여진은 그 술상을 들고 들어온 관기였다. 그때 서른 살이라고 했다. 기생이라기보다는 관노에 가까웠다. (…) 정자나무에 매단 머리들의 뜬눈을 생각하면서 그날 밤 나는 여진을 품었다. 그 머리들이 내 몸을 여진의 몸속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 그 여자의 몸속은 따뜻하고 조붓했다. 오랫동안 뒷물하지 않은 여자의 날비린내 속에서 내 몸은 나로부터 아득해져 갔고, 또 돌아왔다. 그 여자의 몸은 쉽게 수줍음을 버렸다. 그 여자의 몸은 출렁거리며 나에게 넘쳐왔다.”
-‘칼의 노래’ 중에서
작가 김훈이 일러두기에서 언급한 여진은 정말로 난중일기에 나올까. 난중일기는 그동안 여러 차례 한문과 국문으로 번역됐다. 최초의 한글 번역본은 ‘동아일보’와 ‘신동아’ 편집국장을 역임한 소오(小悟) 설의식이 1953년에 낸 ‘난중일기초-충무공 이순신 수록’이다. 1955년 국어학자 홍기문이 북한에서 출간한 ‘리순신장군전집’, 1960년 이은상이 완역한 ‘이충무공전서’도 있다. 이들 번역본 중 홍기문본에 ‘여진’이 등장한다. 그러나 홍기문본은 ‘칼의 노래’가 발표된 후 10년이 지나서야 우리 사회에 소개됐다. 김훈이 참조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김훈은 어느 책에서 ‘여진’을 보고 상상력에 불을 지폈을까. 아마도 일제강점기인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주도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료총간 제6 -난중일기초·임진장초-’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편수회본에는 ‘女眞, 女眞卄(共), 女眞?(共)’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여진, 여진 20, 여진 30’쯤 된다. 정확히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인지 책을 쓴 홍기문도 일부 내용은 번역하지 않았고, 일부 내용에 대해서만 “여진족이 20명이다. 여진족이 30명이다”라는 식으로 명확한 근거 없이 번역했다. 주석에 “당시 남부지방 각지에 여진족이 약간 명씩 흩어져 살고 있었다”라고 부연했을 뿐이다. 홍기문은 ‘여진’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