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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생 공병호, 1960년생을 말하다

가난 딛고 이뤄낸 성취… “이 나이까지 나라 걱정 할 줄이야”

  • 공병호 공병호TV, 공병호연구소 소장

60년생 공병호, 1960년생을 말하다

  • 2020년 경자(庚子)년은 1960년생이 환갑을 맞는 해다. 1960년 대한민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신생아가 태어났다. 1년 동안 100만 6018명이 첫 울음을 터뜨렸는데, 최근의 저출산 추세를 감안하면 이 기록은 앞으로 깨지지 않을 전망이다. 

    태어나면서부터 4·19 등 한국 정치의 격변을 겪은 1960년생은 젊은 시절 한국 경제의 발전을 앞장서 이끌었고, 30대 후반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정년연장 정책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2020년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취업난과 주택난에 시달리는 청년층 자녀를 보면 마음이 쓰리다. 1960년 태어난 공병호 공병호연구소 소장이 근현대 60년을 살아온 1960년생의 새해 감회를 써 보냈다. [편집자 주]
1960년대 초등학교 풍경.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있다. [동아DB]

1960년대 초등학교 풍경.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있다. [동아DB]

나는 1960년 5월 10일, 경남 통영에서 7남매의 막내로 났다. 이따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길 때면 항상 통영 항구 장면이 떠오른다. 흐릿한 흑백사진 위에 느릿느릿한 속도로 기억들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나라가 정말 가난했다. 연근해 어업을 했던 아버지 덕에 빈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항상 자본 부족에 시달리고 더 나은 선박을 갖기 위한 투자를 단행한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삶은 늘 아슬아슬함 그 자체였다. 평생 삶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은 유소년기 어깨너머로 봤던 아버지의 일상, 어획량에 따라 굴곡을 반복했던 집안 형편이었다.


가난의 추억

1973년 6월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밀수단속반원이 어장 근처 바다에 숨겨둔 밀수품을 적발해 끌어 올리고 있다. [동아DB]

1973년 6월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밀수단속반원이 어장 근처 바다에 숨겨둔 밀수품을 적발해 끌어 올리고 있다. [동아DB]

내가 나서 자란 곳은 통영의 항남동이다. 과거에는 주로 배를 소유한 선주가 많이 살았고, 일본인 선주가 주로 거주하던 적산가옥이 골목길을 따라 도열해 있었다. 일본인이 남긴 적산가옥의 기와나 내부의 다다미방 그리고 일본식 정원은 아직도 내 기억 한편에 또렷이 남아 있다. 담배를 배급하던 전매청, 수출입을 관리하던 세관이 우리 집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런 건물은 대부분 일본인이 남기고 떠난 것이었다. 당시 연근해 어선 가운데 상당수도 일본인이 남긴 적산 선박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면서 정부 지원에 힘입어 연근해 어선을 건조하는 계획이 추진될 수 있었다. 

내 머리에는 나라가 너무 가난했다는 기억이 매우 강하게 박혀 있다. 지금도 시장에 움막집을 짓고 살던 낭인 모습과 그 가옥이 손에 잡힐 듯하다. 또 가슴을 저미는 것은 그 많은 빨래를 어머니가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함이다. 상하수도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았고 식수 사정도 좋지 않았다. 가뭄이 닥치면 식수를 얻으러 소방차 앞에 긴 줄을 서던 기억도 있다. 전기도 심심하면 나갔다. 

나라가 발전하면서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느끼면서 성장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나라에 대해 불평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나라가 나에게 무엇을 해줘야 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운명의 거친 파고를 헤치고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는 게 인생이고 삶이란 원칙이 내게 깊이 뿌리내려 있다. 유소년기 가난했던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경남 통영은 ‘밀수의 중심지’였다. 바다장어를 잡아서 배 밑에 구멍이 뚫린 적산 선박에 싣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후쿠오카 등으로 많이 수출했다. 현해탄 뱃길에서 목숨을 잃은 선원과 해난 사고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또 온갖 물건이 일본으로부터 밀수됐다. 연필, 화장품, 파라솔, 전자제품, 가죽점퍼 등이 들어왔다. 나는 밀수를 업으로 하는 부모를 둔 친구와 밀수꾼을 잡으러 다니는 부모를 둔 친구와 더불어 방과 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놀곤 했다.




바닥에서 일어선 대한민국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가 누리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지금도 종이 한 장, 화장실 타월 한 장도 절도 있게 사용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이것은 그 시대가 준 선물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정말 바닥에서부터 일어섰음을 너무 많은 사람이 잊어버린 것에 대해 나는 크게 걱정한다. 공업 기반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나라가 일어섰다. 그래서 60여 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대해 나는 누구보다 분노했다.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만들어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성장한 다음 시장경제와 기업가를 옹호하고, 우리 역사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유소년기의 체험 때문이라 생각한다. 밀가루, 쌀, 기름, 석유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훗날 경제학을 공부하고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글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를 때가 자주 있었다. 유소년기 가난했던 나라 풍광과 역사적 자료가 오버랩되면서 울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 학교는 늘 만원이었다. 학생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2부제 수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세대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로 만든 옥수수빵을 먹고 자랐다. 당시에는 허기를 채워주던 그 빵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훗날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이나 인물 평전을 쓰면서 미국 원조가 나라를 일으키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필자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 가운데 쟁쟁한 운동권 활동가들이 있다. 이들은 지금 출세해 정치권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과 나 사이에는 역사관을 둘러싸고 하늘과 땅만큼의 간격이 존재한다. 

나는 체질적으로 좌파 사상에 경도될 수 없는 성향을 갖고 있지만, 이것 못지않게 유소년기의 체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아무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나라가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듯 일어서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체험했다. 또 부모가 대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며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기에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 덕에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그런 치명적 실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본다. 

당시만 하더라도 남해안은 북한 공작선의 주요 침투 루트였다. 집의 어막(魚幕) 터가 통영에서 뱃길로 40~50분 떨어진 학림도(새섬)에 있었다. 인근에서 무장선박들이 교전 끝에 사로잡히는 일이 더러 있었다. 무장공비를 실은 간첩선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신고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960~70년대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시대의 체제 경쟁은 북한에 먹히느냐 마느냐 하는 생존 문제였다. 

체제 경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이 남남갈등을 조장하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내게는 전체주의 체제가 가진 위험을 직시할 수 있고, 이것이 가진 위험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기초로 유소년기의 체험이 일정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부산에서의 고교 시절

1972년 경남 통영군 한산면 비진도에서 주민들이 행정지도선이 실어온 식수를 받아가고 있다. [동아DB]

1972년 경남 통영군 한산면 비진도에서 주민들이 행정지도선이 실어온 식수를 받아가고 있다. [동아DB]

부모는 어떻게든 자식에게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내 아늑했던 소년기의 기억은 중학교 무렵 부산으로 전학을 가면서 끝나게 된다. 당시 통영에서는 경쟁적으로 아이를 외지로 보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은 숙명이다. 내 자신이 부모가 돼 자식 교육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면서 “한국인에게 자식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고교 배정 추첨이 시작되고 두 번째 세대가 1960년생이다. 갑자기 무시험이 실시되면서 이른바 뺑뺑이를 돌려 자신의 실력이나 의지와 전혀 관련 없는 학교에 배정될 수밖에 없는 제도가 생겨 낙담한 기억이 난다. 뺑뺑이의 결과로 부산에서도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고교에 입학하게 됐다. 다른 학교에 비해 시설이 열악한 곳이었다. 

고교 시절 기억 가운데 두 가지는 꼭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 내가 배정받은 학교가 산복도로 위에 있었기 때문에 헌책방으로 유명한 보수동에서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학교를 올라가다 보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부엌이라 할 만한 공간이 없어 집에 붙어 있는 공터에서 밥을 짓는 모습을 자주 봤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1970년대 중반 무렵 농사일을 버리고 도회지로 향한 수많은 가족 가운데 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넉넉하게 성장할 형편이 되지 못해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의 중심에는 항상 ‘나라가 잘사는 일’ 그리고 ‘개인이 잘사는 일’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훗날 경제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소년기와 고교 시절부터 이미 그런 조짐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입시는 치열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라 새벽 일찍 학교에 가고 가장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어떻게 그렇게 규칙적으로 무엇인가를 계속할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스타일은 크게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의 근본은 세월이 가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도 또렷히 남아 있는 당시 기억 가운데 또 하나는 새벽 일찍 학교 가는 길에서 만나던 광경이다. 구 부산여고 교정에는 월남 패망으로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 머물던 피난민 수용소가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남북한의 경제력 격차가 1971년을 전후로 역전되기 시작했고 중화학공업화를 거치면서 한국이 북한을 경제력으로 완전히 누르게 됐다는 점이다. 내가 월남 피난민수용소를 유난히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은 그 시절에도 체제 경쟁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방증일 수 있다.


다시 광화문에 서다

1985년 서울 수유동 4·19민주묘지 입구에서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을 전경이 저지하고 있다. [동아DB]

1985년 서울 수유동 4·19민주묘지 입구에서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을 전경이 저지하고 있다. [동아DB]

대학은 한 해 늦게 들어갔다. 당시 유명 학원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주변에 포진해 있던지라 지금도 광화문집회에 참가할 때면 대입 재수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이 나이가 돼서 정부 정책에 항의하고자 광화문에 나가 시위를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요즘은 부쩍 민족에게는 습성 같은 게 있지 않으냐는 생각을 할 때가 잦다. 극단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추구하는 북한을 볼 때도 그렇지만 대통령만 되고 나면 왕이라고 착각하는 이 땅의 권력자를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선출된 자가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생각만 해도 얼마든지 대단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런 단순 명료한 원칙이 무시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1979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갔는데, 데모가 참으로 많았던 때다. 대학 1년 가을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고, 대학 2학년 때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았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1980년 봄의 어느 날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장엄한 음악이 기억난다. 경제학과 동기 가운데 소수는 학생운동에 전념하면서 다른 길을 선택했고, 대부분 친구는 시위에 참가하긴 했지만 그렇게 열렬한 편은 아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류의 책이 기세를 한껏 올리던 시절이지만, 그 책은 나를 설득하는 데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교육받기 전부터 태생적으로 집단보다는 개인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적 토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동기가 드물지 않게 있었는데, 나도 대학 2년 때부터 그런 부류에 속했다. 나아짐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자기 삶을 어떻게든 자기 손으로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단 한 번도 누구의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라가 나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내 생애에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 급속히 변하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고 있다. 이미 나는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시민 투표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멀쩡한 지인들조차 “무상 급식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을 보면서 ‘아, 한국이란 나라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구나’하고 탄식했지만, 나라의 진로를 개인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불투명한 나라의 앞날

청년기에는 항상 더 나은 미래를 믿었다. 오늘날 한국의 청년이 그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좀 더 시장 친화적이고 역동적인 사회로 갈 수 있기를 소망했지만, 점점 그 반대쪽으로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한다. 

아무튼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유학에 도전했다. 이런저런 모임에서 젊은 날을 함께했던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지금에 비해 고성장기를 걸어왔지만 노후를 제대로 준비한 친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다들 열심히 살았지만 은퇴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왔고 이를 전후해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닥치고 있다. 

조직에 몸담았던 친구들 가운데는 최고 자리까지 올라간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55세를 전후해 옷을 벗었다. 대학에 있는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10여년 길게 일할 기회를 가졌다. 서울에서도 제법 괜찮은 대학과 학과를 졸업했지만 친구들이 기대한 만큼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월이 직장 생활한 만큼 남은 것을 염두에 두면 친구들의 고민이 많다. 행운이 함께하고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 전문 분야를 개척해 온 몇몇 친구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깃발을 날리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시대 변화를 읽고 계속해 변신하면서 자신을 준비해온 친구들인데 5%가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1960년생이 갖고 있는 큰 고민은 나라의 앞날이 너무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 보면 연금에 문제가 없을지, 나라의 체제에 문제가 없을지 고민하는 친구가 많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마무리되면서 대한민국 앞에는 오로지 선진화의 길만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미 다 지나가버린 이념에 나라가 사로잡히는 것 같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식들 결혼이 늦어지고, 직장 문제로 고심하는 친구도 부쩍 늘어가고 있다. 1960년생 가운데 다수가 지금 고심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나라 걱정이다. 

“나라 걱정을 내 생애에 다시 하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60년생 공병호, 1960년생을 말하다

공병호
● 1960년 경남 통영 출생
● 고려대 경제학과, 미국 라이스대 대학원 졸업(경제학 박사)
●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자유기업원 원장 등 역임
● 現 공병호연구소 소장




신동아 202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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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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