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호

곽재식의 괴물여지도

향랑각시 : 충북 청주

“두꺼비가 지네와 싸워 사람을 구했다”〈송전필담〉

  •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입력2020-01-06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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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거미, 개미, 사마귀, 벌 등 절지동물이 괴물로 변신해 사람을 공격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예부터 그런 이야기가 제법 많이 전해졌다. 특히 사람보다 훨씬 큰 지네가 등장하는 괴담이 인기를 끌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지구에 사는 동물종 가운데 가장 수가 많은 건 절지동물이다. 몸이 마디로 나뉘고 껍질에 싸여 있는 동물로, 곤충류 거미류 다지류 갑각류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개체 수도 대단히 많다. 그래서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빌딩 숲에서도 절지동물만큼은 쉽게 만날 수 있다. 지하실 구석에는 거미가, 보도블록 틈새엔 개미가 산다. 

    절지동물의 또 다른 특징은 우리와 매우 다르게 생겼다는 점이다. 고양이는 눈 두 개, 콧구멍 두 개, 다리 네 개로 구조상 사람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반면 거미는 눈이 여덟 개, 다리도 여덟 개다. 지네는 다리가 수십 개에 이른다. 

    어쩐지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이런 속성 때문에 절지동물은 일찍부터 괴물 이야기 소재로 널리 쓰였다. 특히 SF가 대유행한 1950년대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절지동물이 괴물로 변해 사람을 공격하는 내용의 영화가 쏟아졌다.

    제물이 된 처녀

    1954년 나온 ‘그놈들!(Them!)’이라는 영화는 사람보다 몇 배 큰 개미가 사람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1955년작 ‘독거미(Tarantula)’에도 커다란 거미가 나온다. 1957년 영화 ‘살인 사마귀(The Deadly Mantis)’의 주역은 제목 그대로 사마귀이고, 같은 해 나온 ‘녹색 지옥에서 온 괴물(Monster from Green Hell)’에서는 커다란 벌이 괴물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절지동물이 괴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커다란 지네 이야기일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충북 어느 고을 사람들은 해마다 한 명씩을 동네 외딴집에 보낸다. 일종의 제물이다. 그 집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은 다음 날 어김없이 시체로 발견된다. 어느 해, 가난한 여성이 제물이 돼 그 집에 간다. 밤이 되자 여성 앞에 사람보다 몇 배 큰 지네가 나타난다. 그 순간 평소 이 여성이 돌봐주던 두꺼비가 등장해 지네와 맞서 싸운다. 그 덕에 여성이 살아남고, 지네는 사라진다. 



    이 전설을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퍼지기 시작했을까. 궁금증을 갖고 자료를 찾아봤다. 조선 영·정조 시대에 살았던 학자 심재의 책 ‘송천필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내용의 지네괴물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200~250년 전부터 이 전설이 완성된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았던 셈이다. 

    왜 조선 후기에 이런 전설이 유행했을까. 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 이인좌의 난 같은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된 빈집이 늘어난 게 한 원인이었을 거라고 상상한다. 조선 목조주택은 축축하게 썩을 경우 지네가 살기에 좋은 환경이 된다. 누군가 그런 빈집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지네를 보고 크게 놀랐다면, 또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제법 많았다면 지네 전설이 공감을 얻기에 좋은 상황이지 않았을까.


    전설의 고향

    송천필담.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송천필담.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송천필담에서 지네 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는 오공원(蜈蚣院)이다. 원(院)은 과거 숙박업소 구실을 하던 곳을 가리키는 단어다. 고려시대 이전 기록을 보면 원은 주로 절과 함께 운영됐던 것 같다. 사찰에서 나그네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절 한 쪽에 외부인이 밥을 먹거나 자고 갈 수 있는 건물을 마련해둔 게 바로 원이었다. 오공원도 한때는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송천필담은 이 공간을 사람이 잘 가지 않는, 낡고 외딴 건물로 묘사한다. 아마 영업을 중단한 지 꽤 된, 오랜 시간 방치돼 흉가처럼 변한 곳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가 쇠퇴하면서 사찰에 딸려 있던 오공원도 버려진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앞서 언급한 여러 건의 전쟁을 치르는 사이 망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공원 전설은 쇠락한 호텔에서 괴물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니, 현대 공포영화 스토리로도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오공원이라는 이름에서 오공(蜈蚣)은 지네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오공원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지네 호텔이다. 처음부터 이 숙밥업소 이름이 오공원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지네괴물 전설이 유행한 뒤 이런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곳이 지네 이야기의 실제 무대였기 때문이다. 송천필담을 봐도 해당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물을 바치는 대상이 지네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마을의 평화를 위해 낡은 건물에 사람을 바쳤을 뿐이다. 적어도 가난한 한 처녀가 깊은 밤 그곳에서 거대한 지네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송천필담에 따르면 처녀로부터 평소 은혜를 입은 두꺼비와 지네는 서로 독을 내뿜으며 싸웠다. 이들은 처녀 앞에서 마치 흰 천을 펼치는 것처럼 독기운을 내뿜었다고 돼 있다. 두 동물 모두 실제로 독을 뿜어낼 수 있으니 썩 그럴듯한 묘사다. 다만 지네의 독 성분 중에 기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작은 물방울로 구성된 안개나 구름 같은 형태로 독을 내뿜은 건 아닐까 상상해본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지네괴물 전설은 이외에도 많다. 19세기 편찬된 ‘임하필기’에는 돌 속에 사람 키 몇 배가 넘는 거대한 지네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현대에 채록된 민담을 모은 책 한국민속문학사전에도 ‘지네와 구렁이의 승천 다툼’이라는 제목의 전설이 기록돼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떤 남자가 굴속에 사는 여자를 우연히 만나 아내로 삼으려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는 하늘로 올라가려고 준비하는 천년 묵은 지네였다. 남자는 한 노인에게 ‘사람으로 변한 지네’를 없애는 비법을 배우고, 이를 써먹으려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무리 지네라 해도 그동안 내게 잘해줬는데’ 하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자에게 비법을 알려준 노인 역시 아주 오래 묵은 구렁이가 변신한 괴물로, 지네보다 먼저 하늘에 올라가려 한 경쟁 상대였다고 한다. 

    이 전설은 흔히 ‘지네 각시’ 이야기라고 불린다. 그 내용은 중국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면서 여러 차례 극화된 백사전(白蛇傳) 이야기와 비슷하다. 오래 산 절지동물이 사람 여성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한다는 부분은 일본 거미괴물 ‘조로구모(絡新婦)’ 전설과도 닮았다. 

    ‘각시’라는 이름에서 ‘향랑각시’ 이야기도 떠오른다. 옛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 사람들 사이에서는 집 안에 사는 노래기를 ‘향랑(香娘)’ 또는 ‘향랑각시(香娘閣氏)’라고 부르는 게 유행이었다. 노래기는 지네와 비슷하게 생긴 벌레로 다리가 많고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 누군가 처음 이 동물에 ‘향기 나는 아가씨’라는 뜻의 해학적인 이름을 붙였나 보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는지, ‘경도잡지’ ‘동국세시기’ 등 당대 풍속을 기록한 문헌에까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사람들은 2월 초하루에 봄맞이 대청소를 하면서 집 기둥이나 벽에 ‘향랑각시여, 어서 천리 밖으로 가버리거라(香娘閣氏速去千里)’라고 써 붙였다. 이런 풍습은 노래기뿐 아니라 지네까지 아름다운 사람과 견주어 보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천년 묵은 지네가 여성으로 변신하는 지네 각시 전설도 생겨난 게 아닌가 싶다.

    사람의 보은

    충북 청주 원흥이방죽 풍경. [청주시청 제공]

    충북 청주 원흥이방죽 풍경. [청주시청 제공]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오공원 지네괴물 이야기의 배경은 어디일까. 기록에 따르면 충북 청주 일대인 것은 분명하다. 그 안에서 정확히 어디인지를 놓고는 의견이 갈린다. 일부 전설에 따르면 오공원은 이후 그 자리에 창고가 세워지면서 ‘오공창’으로 불렸고, 재차 이름이 바뀌어 ‘오창’이 됐다. 이에 따르면 지금의 청주시 오창읍이 해당 전설의 무대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중부매일 2009년 7월 28일자에는 지네괴물이 나타난 장소가 청주시 오근장동 근처일 수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장터에서 지네괴물이 출몰했다는 내용의 전설 또한 전해지고 있어서다. 오공원 이야기의 주무대가 창고라면 ‘오창’, 장터라면 ‘오근장’이 유력해진다. 

    오창과 오근장은 사실 별로 떨어지지 않은 동네다. 그러나 사이에 개천이 흘러 정확히 분리돼 있다. 현재로서는 둘 가운데 어디가 지네괴물 전설의 발상지인지 정확히 가려내기 어렵다. 한 지역에서 우연히 옛날 숙박업소 유적이 발굴되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전까지는 그저 청주 북서쪽 지역에서 발원한 전설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청주에 전국 최초로 두꺼비 생태 공원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2003년 무렵 청주 원흥이방죽 근처에 보존 가치가 높은 두꺼비 서식지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마침 이 지역에 주거단지를 개발하는 도중이었다. 당장 보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이곳에 원흥이두꺼비생태공원이 만들어졌다. 이 일대는 이제 흔히 두꺼비 마을이라고 불린다. 

    어떻게 보면 은혜 갚은 두꺼비의 후손들을 위해 이번에는 청주 시민이 도움을 베푼 셈이다. 그 지역에서 두꺼비의 적수였던 지네괴물의 흔적까지 찾아볼 수 있게 되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곽재식 | 1982년 부산 출생. 대학에서 양자공학, 대학원에서 화학과 기술정책을 공부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교양서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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