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호

윤채근 SF 소설

차원이동자(The Mover)_4

외계전사 곽재우 붉은 철릭을 입다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19-12-30 1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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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숨이 끊어진 홍유손의 앙상한 육신이 나뭇가지처럼 굳어갔다. 추격자는 오랜 세월 자신의 숙주였던 생명체 곁에 잠시 더 머물렀다. 상대의 영혼이 모두 흩어지고 잔해만 덩그러니 남을 무렵 낯익은 파동과 함께 살며시 다가온 이탈자가 물었다. 

    “중독이 분명해. 이제 인정하지 그래?” 

    추격자가 대답했다. 

    “중독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나?” 

    “난 약속은 꼭 지켜. 그런데 중독이 아니라고? 처음엔 다 그렇게 말해.” 



    파동 에너지를 급가속하며 추격자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도주할 건가?” 

    동시에 출력을 높인 이탈자가 외쳤다. 

    “아니, 그러지 마. 이 시공간에서 더 놀아보자고. 기다려준 보람은 있어야지? 따라와봐.”

    2

    1592년 임진년 5월, 일본 장수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는 경남 함안 땅에 주둔해 있었다. 깊은 밤, 군영에서 불경을 외며 전사한 부하들 넋을 위로하던 그는 상관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보낸 전령이 도착하자 부장들을 소집했다. 

    전령은 호남으로의 출전 명령문을 짤막하게 낭독하고 본진으로 귀대했다. 부장들의 반응은 썰렁했다. 4월 초 시작된 대조선 전쟁은 손쉽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선발대가 파죽지세로 한양성을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다. 불길한 조짐은 남해안에서 일본 수군이 패전했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비롯됐는데 막강 일본 수군이 오합지졸인 조선 수군에게 지는 건 상상해본 적 없는 사태였다. 그런데 우연처럼 보인 첫 패전은 지루한 접전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해상 보급로가 두절됐다. 5월 중순이 되자 굶주림이 만성이 된 에케이 부대에선 부장들마저 허기를 채우려 조선 민가를 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만으로 아우성치는 부장들을 막사로 돌려보낸 에케이는 목탁을 쥐고 다시 염불을 시작했다.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반전이 필요했다. 상관인 다카카게는 야전으로 단련된 실전형 장수가 아니라 협상술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기교파였다. 그런 상관의 지시만 믿고 호남 점령의 선봉에 서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꾀를 내야 한다. 가장 잔혹한 잔꾀를!” 

    목탁을 집어던진 에케이가 소리쳤다. 그 소리는 반향 없이 공중으로 흩어져 달빛에 흡수됐다.

    3

    초유사 김성일이 볼 때 곽재우는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재우는 남명 조식 문하생으로 분명 북인 당색을 지녔음에도 자신과 같은 남인과도 두루 소통해왔다. 그냥 남인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 재우를 성일은 좋아했고 왜란이 터진 직후에는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 

    왜군이 부산을 점령한 4월, 재우는 의령에서 거병해 적의 북상을 저지하는 한편 거름강을 도하하는 왜군 수송선을 습격해 물자 보급망을 교란했다. 개전 초기 의령에서 벌어진 이 유격전은 처음엔 눈에 띄지도 않았다. 일본군조차 귀찮은 민병대 정도로 취급해 우회로를 이용하며 전투를 회피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해가자 상황이 변했다. 

    해안 침투로가 막힌 일본군이 육로를 통해 반도 서쪽으로 진출하려면 함안과 의령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이 지역을 관통해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해야만 제때에 군량미를 확보해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바로 그 길목을 재우가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의령 주변에 병력을 집중시켜 의병을 쉽게 소탕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건 오판이었다. 정면충돌을 피해 산에 숨어 있던 재우는 돌발적으로 야습해 적진의 식량창고를 불태우고 신속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기괴한 전법이었다. 조선 의병대는 전투에서의 승리엔 아예 관심을 끊고 적군 군량미에만 손실을 가하려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매우 영리한 이 전략은 일본군을 지치게 했고 무엇보다 굶주림에 고통받도록 만들었다.

    4

    전열을 정비한 에케이는 상관 다카카게에게 출전 준비가 끝났음을 보고한 뒤 의령에 척후병을 보내 곽재우 부대의 동정을 살폈다. 재우가 있는 한 의령을 통과하기 만만치 않았고 설령 통과한다 해도 후방 보급선이 막힐 염려가 있었다. 

    승려로 위장한 척후병들은 희소식을 가져왔다. 의병장 곽재우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의심 많은 에케이는 출병을 미룬 채 이번엔 조선어에 능통한 첩자를 보내 재우의 소재지를 탐문했다. 재우는 관병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 지리산에 숨어 있었다. 에케이는 쾌재를 불렀다. 

    “바로 이것이다! 조선인은 자멸하는 습성이 있다.” 

    득의양양한 에케이는 주둔지를 벗어나 함안에서 의령 땅으로 넘어갈 최단경로인 남강을 향해 이동했다.

    5

    재우는 지리산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측근 심대승과 숨어 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도주극은 정대성이라는 희대의 사기꾼 때문에 시작됐다. 대성은 왜란이 발발하자 거짓으로 창의군을 모집해 의령에서 거병하더니 관가 창고와 무기고를 제멋대로 약탈했다. 노획한 물자와 무기를 토대로 힘을 기른 그의 부대가 차츰 도적떼로 변해가자 이를 눈치챈 합천군수 전현룡이 재빨리 토벌대를 꾸려 이들을 섬멸했다. 

    현룡의 관점에서 의령 관곡을 편취하고 세곡선을 무단으로 접수하던 곽재우 부대는 정대성 부대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 의혹을 적시한 현룡의 보고서를 받아본 경상우병사 조대곤은 즉시 재우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패전한 관군과 노비들을 끌어모아 세를 불려가고 있던 재우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지리산으로 도주해버렸다. 

    관군에게 뒤를 밟히며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던 재우를 구원한 건 초유사 김성일이었다. 사건을 접한 성일은 급히 대곤을 방문해 체포령을 취소시키는 한편 임금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는 초유사의 권한으로 곽재우 부대를 정식 관군 세력으로 인정하는 공문서를 발급했다. 임진년 전쟁의 흐름을 바꾸게 될 의령 호랑이는 그렇게 초유사의 공문을 지휘기 끝에 걸고 은밀하게 복귀했다.

    6

    정암진은 의령과 함안 사이를 가르며 지나는 남강의 의령 쪽 도선장이자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쳐야 할 첫 관문이었다. 에케이가 낮에 도착해 바라본 정암진 인근의 남강은 평화롭기 그지없었고, 조선군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의령은 이렇듯 무주공산 같았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전쟁의 흐름은 작은 방심 하나로 뒤집히기 일쑤였다. 

    에케이는 이키라는 첩자를 조선인 사공으로 변장시켜 먼저 강을 건너도록 했다. 매복조가 있는지 떠보고 곽재우의 존재 유무를 거듭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키는 무사히 도강하자마자 깃발 신호를 보내왔다. 너무 손쉬운 성공이어서 오히려 불안했다. 

    진군을 멈춘 에케이는 남강 동안에 숙영지를 설치토록 명했다. 섣불리 강을 건너지 않을 심산이었다. 돌아온 이키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달밤에 강변을 소요하며 상념에 젖어들었다. 

    안코쿠지는 에케이의 진짜 성이 아니었다. 그건 그의 집안이 모리 가문에 의해 멸문당했을 때 가신 한 명이 아기이던 그를 안고 도피했던 절 이름이었다. 외톨이로 성장한 그는 같은 절에서 출가해 에케이라는 법명을 얻었고 이후 ‘안국사의 혜경 스님’이라는 뜻의 ‘안코쿠지 에케이’로 살아왔다. 

    에케이는 자기 집안을 멸족시킨 모리 가문에 힘입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탁월한 언변과 협상 재능을 지닌 그는 전투보다 모략과 유세를 선호하던 모리 가문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마침내 모리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와 열도 통일을 이루자 일개 승려였던 그 역시 일약 다이묘에 올랐다. 

    강변에 멈춰 선 그가 달을 향해 속삭였다. 

    “인생엔 절대 안 되는 것도 또 절대 되는 것도 없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필요한 건 상대보다 더 악해질 수 있는 인내력이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표정의 에케이가 칼을 꺼내 공중을 갈랐다. 그의 상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본래 모리 가문이었지만 고바야카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인물이었다. 성을 버렸지만 누구보다 모리 가문다운 자였다. 에케이는 기회만 된다면 슬며시 그를 베어 조선 땅에 묻어버리고 히데요시의 진정한 오른팔이 돼 모리 가문 전체를 쓸어버리고 싶었다. 늘 온유해 결코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겉모습은 가짜였다. 숨을 몰아쉰 그가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꾀를 내야 한다. 아주 잔혹한 잔꾀를! 그것이야말로 선악을 초월해 세상을 희롱하는 생불의 진면목!” 

    말이 끝나는 순간 에케이는 무언가 강한 염력이 자신의 뇌를 파고든다는 기분을 느꼈다. 이내 사라질 두통 정도로 여겼지만 머릿속으로 파고들던 그 힘은 차츰 그의 사유를 잠식하더니 아예 집어삼켜버렸다.

    7

    의령에 방어선을 구축한 재우는 평소답지 않았다. 지리산에서 돌아온 그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과격한 성정에 기습전을 즐기던 그는 전혀 다른 전법을 들고 나왔는데 말투마저 예전과 달라 보였다. 

    “함정을 파고 유인하는 기라. 느긋하게 기다리다 한 번에 낚으면 된다카이. 알긋제?” 

    그의 말을 경청하던 부대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웅성거렸다.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물고기 잡는 것맹키로 하면 된다 그 말 아입니꺼? 좋긴 한데 사내가 할 일은 아입니더.” 

    씩 웃음을 머금은 재우가 뒷짐을 지고 대승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기 심대승 장령이 하는 말 좀 들어보래이. 대승이, 여 나와 직접 설명해 보그라.” 

    자리에서 일어난 대승이 성큼성큼 걸어 나와 말을 시작했다. 

    “여 우리 홍의장군 말씀 잘 들었제? 금번 싸움은 남강에서 벌어질 기다. 왜놈들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미동도 말그라. 우린 그냥 죽은 듯이 숨어 있다 맨 마지막 놈이 건너오면 모조리 때려잡으면 된다 아이가. 요컨대 절대 정숙이 생명이다 그 말이다.” 

    시끌벅적한 사이로 다시 누군가 외쳤다. 

    “그럼 우리 모두 변장하는 깁니꺼?” 

    고개를 끄덕인 대승이 대답했다. 

    “그렇다 안했나? 죄 변장하고 정해진 자릴 지킨다카이. 홍의장군께서 신호 보내줄 때까지 요지부동하며 덤비지 말그라. 의령 땅 전체가 왜놈들 잡을 어항이라 생각하래이.” 

    전략회의를 마친 의병대는 삼삼오오 흩어져 민가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사나운 발톱을 감춘 채 나무도 하고 열매도 따며 일상을 유지했다. 조선 사공으로 분장한 첩자 이키가 일본군을 싣고 강을 건널 때에도 그들은 보고도 못 본 척 딴청을 부렸다. 일본군을 나루에 남겨두고 의령 고을로 들어선 이키는 과감하게 조선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쇤네 부산서 온 뱃사공 칠돌이라 캅니더. 생포돼 일본군 길라잡이를 하고 있어예. 여긴 의병 없습니꺼?” 

    이키를 지긋이 노려보던 대승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다 떠났습니더. 홍의장군이 지리산으로 피신한 뒤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입니꺼?” 

    삿갓을 비스듬히 올린 이키가 상대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다시 물었다. 

    “쫌만 있으면 왜놈들이 쳐들어올 낀데…피난 안 갑니꺼?” 

    이키의 엉성한 부산 사투리에 차오르는 웃음을 억누르며 대승이 대답했다. 

    “전라도로 도망가봐야 수군으로 잡혀가 물귀신 된다 아입니꺼? 갈 데가 있어야 피난을 가지예. 제발 헛소리 마이소. 왜놈들이야 조용히만 지나가면 우린 그만 아이라예?” 

    입 주변을 찌푸려 억지로 웃음을 만든 이키가 마을을 한참 어슬렁대더니 도로 강가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관망하던 대승이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재우가 숨어 있는 민가로 이동했다. 

    안으로 들어서는 대승 앞으로 다가선 재우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물었다. 

    “잘 속였제?” 

    고개를 끄덕이며 대승이 대답했다. 

    “속은 건지 만 건지. 암튼 그냥 돌아갔다 아이가.” 

    상대 옆구리를 쿡 찌른 재우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어떻노? 이번 싸움 아주 재밌겄제?” 

    대답 대신 상대를 응시만 하던 대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8

    [GettyImage]

    [GettyImage]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싶던 에케이는 이미 노출된 정암진 말고 다른 지점으로 도강하고자 했다. 그는 수영 잘하는 부대원들을 이키에게 딸려 보내 최적의 도강 지점들을 찾아내 미리 표시하게 했다. 

    달이 구름에 가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작은 거룻배에 오른 이키가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함안에서 의령으로 넘어갔다. 삿갓으로 가린 이키의 머리는 멀리서 보면 마치 조는 사람처럼 좌우로 흔들렸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키는 손에 쥔 구리 거울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강가 수풀 가운데 혹시라도 인위적 움직임은 없는지 꼼꼼히 관찰하고 있었다. 바람의 흐름과 미세한 소리를 감안해 풍경을 살피다 보면 매복의 징후는 어김없이 그의 눈에 걸리고야 말았다. 

    “아무도 없구나. 이제 머리를 내밀어도 좋아.” 

    이키가 속삭이자 배에 매달린 채 가는 대나무관을 입에 물고 잠영하던 자들이 수면 위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수심이 낮아 늪을 이룬 지역마다 작은 깃발을 꽂기 시작했다. 다음 날 뗏목을 이용해 도강할 때 피해야 할 지점들이었다. 

    작업을 마친 이키가 다시 함안 방향으로 배를 몰아가고 있을 때, 멀리서 그 모습을 응시하던 의병대원들이 살며시 몸을 드러냈다. 목 위까지 땅 아래 잠겨 있던 대승이 힘겹게 구덩이를 벗어나 흙을 떨어내자 나머지 대원들도 진흙을 비집고 지상으로 기어 나왔다. 대승이 낮게 속삭였다. 

    “깃발들을 다른 데로 옮겨 꽂그라.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 한대이.” 

    그들은 거북이 움직이듯 야금야금 포복해 깃발들에 접근했다. 새소리라도 들릴라치면 흠칫 놀란 대승이 손을 들어 올려 동작을 멈추게 했다. 그렇게 모든 깃발을 어지럽게 재배치하고 나자 날이 밝아오려 했다. 탈진 상태가 된 대승이 말했다. 

    “지금 마을로 돌아가다간 왜군에게 들킬 게 뻔하다. 우야면 좋겠노?” 

    대원 한 명이 대답했다. 

    “장령. 방법은 하나밖에 없소. 그냥 물에 떠내려 가뿌입시다.” 

    그들은 서로 멍하니 쳐다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대승이 대원들 손을 차례로 맞잡으며 말했다. 

    “그게 젤 좋은 상수 같대이. 다들 꼭 살아남그라. 살게 되면 빨리 귀환하고.” 

    짧고 굵게 대답한 대원들이 한 명씩 물살에 몸을 맡겨 하류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남은 대승도 강의 급류로 몸을 밀어 넣은 뒤 수면 아래로 머리를 박았다. 그의 몸은 회오리바람에 나부끼는 낙엽 모양 이리저리 표류하다 간혹 바위에 부딪히기도 했다. 숨을 얼마큼 참았는지 짐작도 되지 않을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육신은 운 좋게도 강변으로 떠밀려나왔다. 물을 토해내며 주변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오까지 부대원들을 기다렸다.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았고 적막한 강바람만 사납게 몰아쳤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가 상류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멍이었다. 발부리에 차인 돌멩이를 주워 거칠게 강물 위로 패대기친 그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하나도 재미없다 아이가. 이게 뭐꼬.”

    9

    에케이 부대원들을 실은 뗏목들이 열을 지어 남강을 도하하자 강 북안에 매복해 있던 재우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칼로 싸우면 지는 기라. 알긋나? 절대 가까이 붙지 말고 화살로 조지라.” 

    첫 공격은 마지막 뗏목이 에케이를 태우고 막 출발할 무렵 시작됐다. 먼저 도하한 뗏목들은 원래 목표 지점과 다른 늪지대로 접안하는 바람에 서로 충돌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의병들의 함성이 들려오자 당황한 일본군들은 성급히 배에서 뛰어내려 상륙을 시도했지만 푹푹 빠지는 뻘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들은 의병들이 난사한 화살에 하나둘씩 꼬꾸라졌다. 

    도하 도중 방향을 틀어 도주하던 에케이가 대형을 유지하라 외쳐댔지만 그의 말을 들어줄 부하는 이미 없었다. 어느새 남강 서안에 도착한 재우가 쇠뇌를 설치하고 연발 사격을 개시했다. 부관마저 강물에 뛰어들어 함안 쪽을 향해 헤엄치자 절망에 빠진 에케이가 울부짖었다. 

    “원형진을 구축하고 응사하란 말이다. 너희들은 세계 최강 일본군이다. 모여서 응사하며 후퇴하라!” 

    강을 건너 날아온 화살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귀를 스치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에케이가 몸을 납작 엎드렸다. 멀리서 부관이 물로 뛰어들라 외치고 있었다. 이를 악문 에케이가 뗏목 아래로 몸을 감추고 자맥질을 시작했지만 여간해선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았다. 옆으로 다가온 부관이 그를 밀어주고 나서야 몸이 조금씩 움직여졌다. 

    사격 범위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에케이는 뭍에 상륙하자마자 부관 목부터 베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들고 길목을 지켜선 그는 퇴각해 돌아오는 부대원들을 한 명 한 명 베어나갔다. 얼굴이 피범벅이 돼 살육하던 그가 마침내 지쳐 칼을 집어던지고 소리쳤다. 

    “명예롭게 죽으란 말이다. 등을 보이고 죽는 건 공덕을 깎아먹는 짓이다. 차라리 내 손에 죽어 성불하거라!” 

    한참을 땅에 누워 발광하던 그는 누군가 내려다본다는 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이키였다.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에케이가 서둘러 칼을 찾았지만 이미 이키 손에 쥐여져 있었다. 뒤로 풀쩍 물러서는 에케이에게 다가서며 이키가 말했다. 

    “에케이 님. 안심하십시오. 저 이키입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제야 본성을 회복한 에케이가 이키로부터 칼을 건네받고 상대 목을 치려 했다. 그 순간 이키가 강변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패잔병을 추적해온 조선 의병들이 뗏목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이키가 이끄는 대로 내달린 에케이는 병사들이 준비한 말에 올라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10

    사냥을 마친 의병들은 축제 분위기에 들떴다. 딱 한 사람, 재우만 시무룩해 보였다. 그는 부하들 틈바구니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자신의 별명을 만들어준 붉은 비단 철릭을 다시 걸쳤다. 옆으로 다가온 대승이 물었다. 

    “뭘 더 어쩌려고?” 

    미소 지은 재우가 말등에 오르며 속삭였다. 

    “끝을 보는 거야. 몰라? 적장 목도 없이 무슨 잔치냐고.”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린 재우는 바람처럼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던 대승 역시 말에 뛰어올라 뒤를 따랐다.

    11

    에케이는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맸다. 조선 산천은 다 거기가 거기 같아 보였다. 그때 뒤따라온 이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을 잡기 위해 돌진해오던 재우와 정면으로 맞닥뜨렸을 것이다. 다가오는 이키를 발견한 그가 물었다. 

    “이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고바야카와 님 군진으로 복귀한다.” 

    이키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저를 따르십시오. 다카카게 님 본영은 지금 경북 성주에 있을 겁니다.” 

    “성주에?” 

    “그렇습니다. 호남 쪽이 뚫리지 않으면 북진할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의아한 표정이 된 에케이가 다시 물었다. 

    “그걸 네가 어찌 알지? 혹시 너?” 

    머리를 저은 이키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 이키는 오직 에케이 님께 충성합니다.” 

    상대를 노려보던 에케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방향을 가리켜봐라. 성주가 어느 쪽이냐?” 

    손을 들어 올린 이키가 북동쪽 언덕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에케이가 말을 몰아 앞장섰다. 모리 가문의 장기는 이간질과 궤변이었다. 적진 깊이 첩자를 박아놓고 상대가 허점을 보일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릴 줄 아는 비열한 능력, 그게 모리 집안 내력이었다. 뒤돌아보며 웃음 지은 에케이가 이키더러 다가와 보라고 했다. 이키는 뭔가 말하려 하며 다가갔지만 그 말을 끝내지 못했다. 번개처럼 휘두른 에케이의 칼에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됐기 때문이다.

    12

    재우의 육체에 깃들었던 이탈자는 좀체 하지 않던 짓을 하기로 결심했다. 숙주의 몸에서 벗어나 파동이 된 그는 맹렬한 속도로 에케이를 향해 접근해갔다. 달리고 있던 에케이의 육체 속 존재 역시 다가오는 파동 에너지를 감지하자마자 육화를 포기하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 두 파동체의 충돌은 육중한 폭음을 일으켰고 주변 시공간 질서는 잠시 왜곡돼 요동치다 천천히 회복됐다. 에케이를 숙주 삼았던 존재가 물었다. 

    “너냐? 언제 날 눈치챘느냐?” 

    이탈자가 대답했다. 

    “네놈이 물에 빠져 발버둥질할 때. 넌 잠깐 파동력을 썼어. 난 그런 걸 놓치지 않아.” 

    “그랬군. 이제 어쩔 셈이더냐? 조금 지쳐 보이는데 날 소멸시킬 수 있느냔 말이지?” 

    이탈자가 파동 계수를 가속시키며 대답했다. 

    “뭐 알 수 없지. 그래도 너 같은 요괴는 질색이라고. 이만 사라져버려!” 

    격렬하게 충돌한 두 파동체는 각자의 에너지를 소진하며 맞섰다. 차츰 힘을 잃기 시작한 이탈자가 상대에게 흡수되려는 순간 대승 몸에 깃들어 있던 추격자가 파동으로 화해 출현했다. 추격자가 에너지를 보태주자 상황은 역전됐고 궁지에 몰린 상대는 시공간에 작은 틈을 만들어 이동해버렸다. 지친 이탈자가 물었다. 

    “고맙긴 한데 어떻게 왔지? 뒤를 밟았어?” 

    가속을 멈춘 추격자가 대답했다. 

    “그렇다. 네가 도주하는 줄 알고 추격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까 그건 누구였나?” 

    “요괴! 이동자들 중엔 가끔 그런 망나니도 있어.” 

    “요괴라.” 

    “그래. 우주가 커다란 유희장이라면 난 여기저기서 노는 걸 즐길 뿐이야. 행성계에 해 끼칠 맘 전혀 없어. 극의 진행을 돕는 관객이랄까? 아까 그놈은 달라.”
     
    “너희들 어차피 똑같은 이탈자들이다. 뭐가 다른가?” 

    “달라. 놈은 구경만 하질 않아. 시공간에 간섭해. 사건세계들을 제멋대로 훼손하고 이 재밌는 행성극장들을 파괴하지. 잔인하고 오만해.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줄 알아. 미쳐버린 거야.” 

    “자신이 세상을 창조했다?” 

    “그래. 자기가 창조했으니 자기 마음대로 없앨 수도 있는 거지. 놈은 악마야.”

    13

    정암진 전투는 비록 작은 국지전이었지만 임진년 전쟁의 전체 판도를 바꿨다. 남해안을 장악한 이순신을 피해 육로로 호남에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전략은 이로써 감행 초기부터 붕괴됐다. 사소한 행마 한 수가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곽재우 몸으로 재차 육화한 이탈자는 임진년 조선전쟁의 시말을 끝까지 관람했다. 그와 처음으로 같은 편이 돼 성대승으로 살던 추격자는 숙주가 사망한 1606년 먼저 파동체로 화해 이번엔 자신이 이탈자를 기다려줬다. 

    불세출의 영웅이었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숨어 도인처럼 살던 곽재우는 1617년 경상남도 현풍 땅 비슬산에서 숨졌다. 어쩌다 보니 출사와 은둔을 반복하긴 했으나 무욕으로 일관한 삶을 산 그는 세운 공적이 과장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의병장이었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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