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남수목원.
새해 겨울, 폭설 뒷날의 고즈넉한 나남 책박물관 풍경이 첫 장이다. 이곳은 나남출판 40년의 땀이 밴 4000권이 다 되는 책들이 한국 현대 지성을 증언하고 있다. 이름 모를 도공이 쌓은 5층 석탑과 열두 동자석도 장송 밑에서 봄을 꿈꾸며 머리에 눈을 이고 있다. 눈을 뒤집어쓴 인수전(仁壽殿) 앞의 석등이 오히려 평화롭다. 3000그루 반송에 무명(無明)의 바다를 밝히는 등불인 셈이다. 책 박물관 앞 넓은 테라스의 눈 덮인 빈 의자들이 희망의 담론을 나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호수 앞 거목이 된 느티나무는 나목(裸木)에 피어난 눈꽃으로 아름답다. 호수를 휘돌아가는 굽은 계단의 눈길에 작은 발자국이라도 남기고 싶다. 추사(秋史) 김정희의 풍사실(豊士室) 글귀처럼 호수 옆의 공간에 어진 선비들이 가득 차길 기대한다. 50년이 넘은 10그루 철쭉에도 눈꽃이 피어 다른 얼굴로 반긴다.
그리고 수목원의 봄 풍경이다. 인수전 앞 호숫가 중앙에 자리 잡은 철쭉의 하얀 꽃망울에는 지금 50년 만의 봄이 가득 찼다. 철쭉의 현란한 향기가 하얀 꽃, 붉은 꽃 속에 춤춘다. 책박물관 북카페 입구의 심정수 청동조각상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나는 배를 저어간다’가 어떤 그리움을 더한다. 날렵한 처마 끝에 걸린 눈들이 우아했던 정자의 기와지붕이 이제 봄의 향기에 더욱 고와 보인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킨 토종 산벚의 위용이 3000그루 반송을 보듬고 있다. 꽃비가 내리는 산벚의 봄날은 너무 짧다.
어떤 본능 같은 밤나무 꽃향내
야광나무는 야광주(夜光珠)와 같이 한밤중에도 빛을 낸다. 화려하고 예쁜 꽃으로 벌 나비를 부르며 무르익는 봄을 온통 흰 꽃으로 뒤덮는다. 특히 키가 10m 넘는 이 나무는 바위를 감싼 뿌리를 드러내며 당찬 생명력을 발산한다. 새 잎이 길게 갈라지는 아그배나무와 비슷하다. 겨울을 밀어내고 맨 처음 소담한 녹색 잎들을 탐스럽게 내밀며 봄을 증명하다 한두 달 지나면 잎들이 뭉그러졌다가 잊을 만하면 불현듯 우련 붉은 꽃대를 빼어 올린 상사화(相思花)가 곱디곱다. 잎과 꽃이 서로 보지 못하고 그리워만 한다고 해서 상사화라고 한다.책박물관 앞뜰의 석등이 목련꽃 그늘에 서 있다. 석등의 옥개석이 사각지붕인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의 장명등(長明燈)이다. 인수전 옆의 석등처럼 조선 후기로 가면 조금은 화려하게 팔각지붕이 된다. 참꽃인 진달래가 나보다 더 큰 키로 하늘가를 맴돈다. 파란 하늘을 캔버스 삼아 꽃들이 군무를 그리는 모습은 우리 수목원에서만 볼 수 있다. 반송 3000여 그루를 호위하는 30명 문인석의 감추어진 미소는 200~300년을 견뎌온 소이부답(笑而不答)의 침묵이다. 3년 전 양평에서 이식한 배롱나무 몇 그루가 추위를 견뎌내고 처음으로 화사한 꽃잎을 매달았다.
박태기 붉은 꽃은 화려한 봄날이 압권이다. ‘밥티기’와 닮은 꽃은 쌀밥보다 서민들의 밥인 조나 수수의 밥알 같다.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바위틈에 집단으로 꽂아둔 겹황매화(죽단화)의 노란 꽃바다가 이른 봄날의 수목원에 넘실거린다. ‘만첩홍도’의 붉은 꽃이 깜짝 놀랄 화려함으로 잔디광장의 봄을 빛내고 있다. 무릉도원의 복숭아꽃도 이런 감흥이었으리라. 장송의 싱그러운 녹음과 벚꽃의 꽃그늘 합창 속을 뚫고 치솟는 분수의 청량함에 봄날은 간다.
여름날 아침 고요의 숲길에 놓인 빈 의자가 누구를 기다린다. 한탄강댐 수몰 지역에서 구출한 장년의 느티나무들이 3〜4년이 지나자 이제 새로운 땅에 착실하게 뿌리를 내려 그 푸르름도 짙어졌다. 내 키만큼 잘 자란 수국나무의 하얀 꽃이 한여름 초록의 잎새를 바탕으로 탐스럽게 흐드러졌다. 부처님의 뽀글거리는 머리를 연상케 해 불두화(佛頭花)라고도 부른다. 하얗게 피기 시작한 수국꽃들은 점차 시원한 청색이 되고 다시 붉은 기운을 담다가 나중에는 자색이 된다. 마른 꽃을 달고 겨울을 이겨낸다. 초여름 산딸나무에 십자 모양의 하얀 꽃이 천사를 만난 것 같다. 기독교인들이 이 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가을엔 딸기 같은 둥근 빨간 열매를 맺는다. 밤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아까시꽃의 짙은 향내가 사라지면, 어떤 본능 같은 밤나무꽃 향내가 진동하며 가을의 알톨 같은 결실을 약속한다.
수목원 조성 초기에 심은 호숫가의 40년 된 반송이 홀로 자라 그 위용을 자랑한다. 이제는 호수 주변 둘레길을 따라 걸으며 아름다운 자태를 만질 수도 있다. 나무처럼 늙고 싶다면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 40년 전 미국 육사 앞에서 본 목백합나무의 노란 튤립 같은 꽃이 수목원에 자리 잡은 지 7~8년이 되자 피기 시작했다. 잎사귀 뒤에 수줍게 숨어 바람결에 잠깐씩 자태를 보여준다.
세상에 가장 큰 책
아내가 정성으로 가꾸는 아름다운 허브 라벤더 꽃밭 주위는 코스모스와 달맞이꽃 군락지다. 코스모스의 큰 키 높이만큼의 가을 고독으로 홍역을 앓던 젊은 날의 향수로 마련한 코스모스 군락지다. 분홍낮달맞이꽃이 진화를 거듭하면 대낮에도 활짝 꽃피우는 붉은 해맞이꽃이 되기도 한다. 꽃무릇이 군락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고창 선운사의 꽃무릇 군락지를 꿈꾸며 책박물관 가는 길에 1000구의 구근을 정성스레 심었다.여름 끝자락에 가을의 전령사인 벌개미취와 구절초가 만발했다. 벌개미취는 씨앗을 뿌리고 옮겨심기를 반복해 수목원 도처에서 군락을 이루어 이제는 우리 수목원의 상징이 됐다. 반송밭 앞의 호수를 덮는 하얀 수련(睡蓮)이 탐스러운 꽃을 드러낸다. 잠들지 말라고 비단잉어들이 발가락에 간지럼을 태웠는지도 모른다. 무늬병꽃의 자연스러운 고결함이 5층 석탑을 옹위하고 있다. 낮은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람한 구상나무가 자태까지 곱기도 하다. 우리 토종인 전나무, 가문비나무와 친척으로 외국에서 원예종으로 개발해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한다. 인수전 정자 앞의 호숫가. 3칸 정자가 고즈넉하게 산중호수에 안긴다. 갈대가 자란 안온한 늪은 비단잉어의 어린 새끼들이 황새의 공격을 피할 은신처가 된다. 아름다운 반송들을 누군가는 푸른 초가집 같다고 좋아한다. 전지하느라고 손이 많이 간, 공들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랑도 더욱 깊어간다. 맑디맑은 호수에 투영된 단풍나무가 가을을 새롭게 읽어내고 있다.
노란 초롱 같은 꽃으로 봄을 처음으로 열었던 히어리나무가 하트 모양의 노란 잎으로 가을의 빛 속을 가른다. 뒤편의 블루베리들이 연출하는 붉은 단풍보다 히어리의 노랑 완성체가 가을의 삽상함으로 더욱 신선하다. 만추(晩秋)의 햇살을 받은 반송들의 초록 우산이 깔끔하다. 정자 인수전의 기둥과 대들보는 벌써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인수전 현판을 새가 적당히 쪼아놓았다. 어쩌면 이것이 고풍(古風)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그대로 두기로 했다. 뒤편의 기장산하(氣壯山河)는 글의 무게에 눌려 새들이 범접하지 못한 모양이다.
다시 설국(雪國)이다. 한 해가 저문다. 한 해를 늠름하게 열심히 살았는가? 산사(山寺)를 찾아가듯 저 눈길에 조심스러운 발자국을 남기며 ‘세상에 가장 큰 책’을 수목원으로 남기려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늠름하게 가야 하는 새해의 꿈을 키울 일이다.
《신동아 1월호》
조상호
● 1950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한양대 대학원 신문방송학 박사
● 계간 ‘사회비평’ 발행인,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언론대학원 강사,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 위원
● 한국출판학회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 現 나남출판 대표이사, ‘지훈상’ 상임운영위원, 나남수목원 이사장
● 저서 :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 ‘언론 의병장의 꿈’ ‘나무심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