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호

사바나

‘욜로’ ‘탕진잼’에 가린 2030 ‘가성비 인생’

“5000원 디저트 먹는 날엔 3000원짜리 밥”

  • 최호진 사바나 객원기자 patagonistt@gmail.com

    입력2020-01-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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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향 위해 소비하되 ‘가성비 따져’

    • 저가에 ‘유럽 분위기’ 물씬 여행지로 블라디보스토크 인기

    • “소수 사례로 우리 세대 규정, 동의 못해”

    • 윗세대보다 소비성향 낮고 저축성향 높아

    • ‘26주 적금’ 등 단기 소액 적금 상품도 인기

    • “현실 타협적 탕진”으로 즐거움 얻는 2030

    ‘사바나’는 ‘회를 꾸는 , 청년’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컨버전스 뉴스랩(News-Lab)입니다. ‘사바나’ 기자들은 모두 밀레니얼 세대에 속합니다. 커보니 ‘취업이 바늘구멍’이 돼버린 경제 현실을 목도했습니다. ‘우리 때만큼 노력 안 한 탓’이라는 윗세대의 ‘꼰대질’도 감내했습니다. 이제는 청년의 삶을 주어(主語) 삼아 윗세대가 ‘불편할 법한 이야기’를 꺼내놓으려 합니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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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영화 ‘소공녀’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20대 여성이다. 빠듯한 생활에도 퇴근 후 고급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은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다. 새해가 밝고 월세에 이어 담배와 위스키 가격마저 오르자 미소는 하나를 포기한다. 바로 ‘집’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비싸지자, 미소는 안정 대신 ‘취향’을 택한다. 친구 집을 전전하는 삶이 시작됐지만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즐기는 고급 위스키 ‘글렌피딕’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을 지켜낸 것에 미소는 만족한다. 


    영화 소공녀.

    영화 소공녀.

    서울대 서어서문학과에 재학 중인 이은호(29) 씨는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의 ‘덕후’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나 스스로가 처한 경제적 상황에 연연하지 않고, 취향과 존엄을 지키는 미소의 강직함에 반했다”는 이씨는 영화 ‘소공녀’의 ‘굿즈’(goods·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등의 팬을 대상으로 기획·디자인한 상품)를 수집해왔다. 영화 포스터와 각본집, 주인공 미소 모양의 배지, 미소가 즐겨 마신 고급 위스키 ‘글렌피딕’ 등등. 

    자신의 취향을 위해서라면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인공 미소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씨는 선을 그었다. “철저히 가성비를 따진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미소가 즐겨 마시는 글렌피딕 위스키도 50㎖짜리 미니어처로 구입해 책상 위에 뒀어요. 자린고비가 굴비를 매달아놓고 보면서 밥 먹듯이, 저도 관상용으로 두고 보면서 심적인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습니다. 힘든 프로젝트를 끝냈을 때만 저 자신을 토닥토닥 위로해주려고 직접 위스키를 사서 마셔요. 한 달에 많아봐야 2~3번 정도요. 한 잔에 1만5000원 안팎인 위스키를 미소처럼 매일 사 마시진 못하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유럽은 100만 원, 블라디보스토크 20만 원”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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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욜로(You Only Live Once의 줄임말로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 ‘탕진잼(소소하게 탕진하는 재미를 일컫는 말)’ 등의 신조어가 떠오르면서 2030은 비합리적 소비의 주체로 비치곤 한다. 그러나 2030 소비문화의 중심에는 ‘가성비’가 있다. 저성장 시대와 취업난을 관통하며 소비 여력이 없는 탓에 최소 비용으로 최대 만족을 내려는 소비 경향이 짙다. 

    취업 준비생 강모(28) 씨는 ‘디저트광’이다. 식후 먹는 달달한 마카롱, 케이크와 같은 디저트는 취업 준비에 지친 심신을 달래는 유일한 낙이다. 채용 불합격 통보를 받는 날이면 강씨는 한 끼 식사 값에 버금가는 5000~6000원짜리 케이크를 사 먹는다. 

    강씨는 “무작정 사치를 부리는 건 아니다. 디저트를 먹는 날엔 꼭 교내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한 끼를 3000원 정도에 때우고 케이크를 사 먹으면 평소 식대와 비슷한 가격으로 기분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여행을 즐기는 2030 사이에서는 ‘가성비 갑’ 여행지도 등장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다.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있는 항만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760㎞ 정도 떨어져 있어 ‘가장 가까운 유럽’으로 불린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항공권 값으로 유럽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어 ‘가성비 좋은’ 여행지로 꼽힌다.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한모(29) 씨는 “올해는 유럽 여행을 가보고 싶었는데, 각종 경조사로 지출이 많았다. 서유럽은 왕복 항공권이 100만 원 안팎인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20만 원대면 다녀올 수 있어 연말 휴가지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여행을 즐기는 것 같은데 ‘욜로(YOLO)’를 추구하냐”고 묻자 한씨가 답했다. 

    “‘욜로족’은 아니에요. 해외여행도 1년에 한 번 정도만 가죠. 퇴사 후 세계 여행하는 ‘욜로족’ 이야기를 매체에서 접하면 잠깐 부러운 생각은 들지만, 저는 지금의 고정적인 수입과 안정된 생활이 좋아요. 소수의 사례가 우리 세대의 보편적인 특징처럼 대변되곤 하는데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은 것 같아요. 제 경우엔 여행, 취미 등에 대한 소비도 최대한 경제적으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회사 동료들만 봐도 적금이나 재테크 정보 공유하면서 미래 설계에 적극적인 편이에요.”

    ‘태산’ 못 되더라도 ‘티끌’ 모으는 2030

    이코노미스트인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와 박종훈 KBS 기자는 저서 ‘밀레니얼 이코노미’에서 밀레니얼 소비에 대한 착시를 지적한다. 박 기자는 “X세대에 비해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 하락폭이 크다”며 “전체적으로 우리 경제가 성장하면서 풍족해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세대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책에 소개된 통계청 ‘가구주 연령별 소비성향 추이’ 자료를 보면, 2003년 우리나라 30대 평균 소비성향 지수는 76.2다. 100만 원을 벌면 76만 원가량을 썼다는 뜻이다. 이 수치가 2016년에는 70.2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40대 소비성향 지수도 79.8에서 75.9로 하락했지만 하락폭은 30대에 비해 적은 편이다.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처럼 보이는 ‘밀레니얼 소비’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대목이다. 박 기자의 설명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평소에는 ‘가성비’를 따져가며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살아도, 가끔 본인의 ‘최애템’인 5만 원짜리 망고빙수를 먹으러 가는 세대예요. 그 사진은 당연히 SNS에 올리고요. 기성세대들이 쓰지 않았던 분야에 돈을 쓰는 모습만 보고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들보다 돈을 많이 쓰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사실 기성세대가 온갖 술자리에서 탕진했던 돈에 비하면 미미한 편이기 때문에 밀레니얼 세대의 소비는 이전 세대보다 오히려 줄어들고 있습니다.(‘밀레니얼 이코노미’ 중)”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는 태도는 밀레니얼 세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역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이전 세대에 비해 저축성향이 높은 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0년, 2030세대의 저축성향은 22% 정도에 불과했지만 2014년엔 27%를 넘었다.

    “소액이라도 만기 달성해 성취감 얻으려”

    카카오뱅크 적금.

    카카오뱅크 적금.

    높은 이자율, 주가와 집값 상승으로 자산을 형성할 기회를 부여받은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밀레니얼 세대는 자산 축적이나 자본이득을 얻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초저금리 시대에 집값은 엄청난 수준으로 올랐고, 양극화는 극심해지고 있다. 저축률이 높아졌다고 해도 밀레니얼의 노후는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그 전망이 흐리다. 

    그럼에도 2030은 구두쇠를 자처한다. ‘태산’이 되지 못할 걸 알지만 ‘티끌’을 모은다. 특히 단기 소액 적금 상품은 2030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26주 동안 매주 납입 금액을 늘려가는 카카오뱅크의 ‘26주 적금’은 지난해 10월 총 납입액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이 상품의 20대, 30대 가입 비중은 각각 34.3%, 38.7%로 전체 가입자의 73%를 차지한다. 

    ‘26주 적금’을 세 번째 가입해 저축 중이라는 경찰공무원 강모(26) 씨는 “소액에 단기 적금이라 돌아오는 이자는 몇 푼 안 된다. 그런데 부동산처럼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는 내 생애 뛰어드는 일이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어 “멀리 있는 목표점을 보고 좌절하기보다 당장 내딛는 한 걸음에 집중해야 하듯, 소액이라도 만기를 달성하면서 성취감을 얻으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불안감은 확실히 덜하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2030의 소비문화를 두고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현실 타협적 탕진”이라고 해석했다. 강 연구원은 최근 한국 사회의 미디어·문화 현상을 핍진하게 다룬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의 저자다. 그는 “2030은 마땅히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 없다. 또 돈을 모아 집과 같은 더 큰 재화를 당장 얻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서 “그러니 자신이 갖고 있는 약간의 여유 자금을 필수 품목이 아닌 재화를 소비하는 데 지출하는 식으로 소비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케팅 위해 ‘탕진잼’ 부각”

    그러면서도 강 연구원은 “2030 사이에도 계획적 소비나 저축을 지향하는 흐름이 엿보인다. 또 일부에서는 ‘탕진잼’을 지양하자는 주장도 나온다”면서 “하지만 산업계가 마케팅을 위해 ‘탕진잼’과 ‘소확행’을 적극 부각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2030이 마치 즉흥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자아낸다. 보다 엄밀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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