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령 기업인의 기부하는 삶
총상금 75억 원 ‘한국판 노벨상’ 만들기로
세계관정과학상이 노벨상 버금가는 게 마지막 꿈
일제 때 학병 끌려가 죽을 고비 넘겨
애써 키운 기업 빼앗기고 안기부에서 고문 당해
사업은 1㎝로 승패 갈리는 장대높이뛰기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한 불면의 밤들
[홍중식 기자]
40여 분쯤 지났을까. 그가 회의실에서 나와 회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느릿한 걸음걸이였지만 꼿꼿한 허리가 100세를 앞둔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2019년 12월 10일 오후 3시 반, 서울 명륜동 그의 집무실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소재 생산 기업 삼영화학 창업주
- 듣던 대로 건강해 보이십니다. 하루 일상은 어떠신지요.“젊을 때와 큰 차이는 없어요. 일어나면 밤새 별일 없었는지 전화로 전국 현장부터 챙기는 것도 똑같고. 전에는 새벽 5시면 깼는데 지금은 7시에 일어나는 게 좀 달라졌다고 할까. 아침에 오르간으로 행진곡을 치고 출근하는 습관도 여전합니다. 지금까지 평형감각 순발력을 잃지 않은 것은 열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건반을 두들기는 연주 습관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 직원들 휴대전화 번호 100여 개를 외우고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한 30여 개 정도…. 70대 후반까지만 해도 뇌신경 손상을 막으려고 매일 밤 피나게 암기했지요(웃음). 내 일이 24시간 쉬지 않고 기계 돌려 제품 만드는 것 아닙니까. 최일선 공장 근로자에게까지 밤이고 새벽이고 수시로 전화했는데 이제 더는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들 해서 낮에만 일합니다. 요즘에도 하루에 결정하는 큰 일이 두세 가지는 생깁니다. 수시로 지방 공장 시찰이나 해외 출장도 가고요.”
- 장수 비결이 궁금합니다.
“특별한 거 없어요. 밥은 늘 한 공기, 고기보다 생선을 즐기고 반찬은 골고루 먹어요. 운동은 골프장에서 홀가분하게 라운딩하는 정도. 술은 포도주 한 잔, 기분 내키면 두 잔까지. 담배 끊은 지는 50년 돼갑니다. 집안이 장수 집안이라 하늘과 조상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회의실 밖까지 흘러나오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비해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그러면서도 강조할 대목에서는 직접 이면지에 필사까지 해가며 톤을 높였다. 삶이나 경영에서 군더더기를 싫어하고 본질에 천착하는 게 평소 철학이라고 밝혀온 사람답게 에너지도 선택과 집중을 해서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5개 분야 총상금 75억 원 ‘한국판 노벨상’
인터뷰를 시작하자 ‘정도(正道)’라는 제목으로 자서전까지 펴내서 그런지 “딱히 해줄 이야기가 없는데”라고 운을 뗐다. 기자가 “생전에 한번 뵙고 싶었다”고 하자 “내가 좀 ‘진귀한 동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이 있기는 하다”는 농담이 돌아왔다.현재 관정교육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 회장은 2019년 10월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2022년부터 전 세계 학자들을 대상으로 5개 분야 각각 15억 원씩 총 75억 원의 상금을 주는 가칭 ‘세계관정과학상’을 제정한다고 한 것. 6개 분야 총 70억 원 상금을 주는 노벨상보다 상금 규모 면에서 더 크다.
이날 인터뷰는 그의 기부 인생보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기업인의 기업가 정신을 먼저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 자서전을 읽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도 있었지만 행운도 많았습니다. 성공 비결은 노력에 있습니까, 하늘의 뜻이나 운에 있습니까.
“무슨 일이든 성심성의를 다해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천운이나 행운을 잡을 수 있다고 봐요. 흔히 운7기3이라고 하는데 나는 운1기9라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초박막 커패시터 필름(전자제품 핵심 소재인 축전 및 절연 필름)과 고압 애자(碍子·전신주에 매달려 있는 전기 절연물) 개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초박막 커패시터 필름은 1980년대 초 외국 여행을 하다 미국 과학 전문잡지에서 우연히 접한 기술입니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걸 알아본 안목과 기술 개발에 대한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겁니다. 운과 노력이 결합돼 우리 삼영화학이 독일, 일본 기업과 함께 세계 3대 메이커가 됐습니다.
1980년대 초초고압 애자를 개발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송전선의 엄청난 무게와 초강력 태풍을 이겨내야 하는 게 기술의 마지막 핵심이었는데 전 세계를 뒤지고 다니며 온갖 방법을 다 찾아 해봐도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특수한 흙을 발견해 흙 한 숟가락으로 해결했습니다. 성분은 지금도 나만 알고 있어요. 세상 뜨기 전에 믿는 사람에게 전수할 생각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청년기
이 회장은 광복 직후 정미소 운영까지 합하면 기업을 경영한 세월이 70년을 훌쩍 넘는다.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산업한국’의 전쟁터를 이끌어온 노병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1924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마산중학교 졸업 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 메이지대 경상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 학병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인생이 바뀐다. 소련, 만주 국경과 오키나와를 오가던 관동군 생활은 그야말로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것이었다.
“지금 젊은이들은 나라가 없다는 게 어떤 상황인지 잘 그려지지 않겠지만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까지 간 청년이 대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전쟁터로 끌려가 남의 나라를 위해 총을 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가 됐을 때의 막막함이란…. 영하 46도 혹한에 무거운 포신을 메고 고지를 오르내리고 부동자세로 야간 초병을 섰습니다. 꽁꽁 언 밥을 포크로 쪼개 먹는데 포크가 부러질 정도였어요. 그래도 나는 살아서 해방을 맞았으니 행운아였습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정미소 사업으로 사업가의 첫발을 내디딘다. 성공적으로 기반을 닦는 듯했지만 간디스토마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면서 1년 반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겨우 몸을 추슬러 재기를 시도했지만 6·25전쟁이 터졌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 1953년 서울로 올라와 시작한 게 동대문시장 보따리 장사였다.
“생산시설 대부분이 폭격을 맞아 생활필수품을 모조리 수입하던 때였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장사를 했는데 늘 손해를 봤어요. 가격 흥정을 제대로 못한 거죠. 장사에 넌덜머리가 나 기계와 씨름하는 게 속 편하겠다 싶어 제조업으로 눈을 돌린 게 플라스틱 사업이었습니다. 1958년 사출기 1대로 삼영화학공업사를 차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플라스틱은 신소재였다. 그는 공장장, 상품기획자, 디자이너, 판매원 1인 다역을 하며 바가지, 컵, 양동이 같은 생활필수품을 만들어 팔았다. 지금 계열사들의 이름에 붙어 있는 ‘크라운’이라는 기업 명칭은 당시 제품에 박은 왕관 모양 회사 로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를 살았던 노년층 중엔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엔 부도 위기도 겪어
이후 이 회장의 삶은 그야말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물건을 찍어내면 돈’이라고 할 만큼 재미를 봤지만 곧바로 다음 사업인 포장용 필름 사업으로 옮겨갔다.당시만 해도 수출용 포장재를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다 보니 납기를 못 지키는 기업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뛰어든 일이었다. 대성공이었다. 그는 이어 기술 개발을 통해 과자, 라면 포장지, 투명 포장지 등 고난도 합성포장재 생산에 도전했다. 음식물을 싸는 투명 랩을 최초로 개발한 것도 삼영화학이다.
그의 사업 인생이 꽃길만은 아니었다. 숱한 좌절과 예기치 못한 악재 탓에 사업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눈물과 한숨을 삼켜야 했다.
“플라스틱 사업에 손댄 지 4년 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철도청 침목 개량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재래식 침목을 시멘트 철근으로 바꾸는 일이었는데 천신만고 끝에 수주해 ‘됐다’ 싶었는데 대기업이 달려드는 바람에 속절없이 빼앗겼습니다. 그때 대기업의 횡포를 경험하면서 남의 위장 안에 들어가 있는 음식물이라도 맘만 먹으면 쇠갈퀴로 빼내갈 사람들이란 생각에 비애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는 한국에 거의 몇 안 남은 창업 1세대다. 스스로도 “만인 대 만인 약육강식 투쟁 시대를 살았다”고 한다.
한 고비 넘겼다 싶으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나타나 이전까지 들인 피와 땀을 허사로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자연에는 사자만 사는 게 아니라 토끼도 산다. 환경과 여건에 적응하자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한다. 외환위기 직전엔 부도 위기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정부와의 관계였다.
“기업을 운영하다 보니 곧이곧대로만 해서는 안 되고 정치인들과도 친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정부 여당에도 잘 보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국제전선이라는 국내 최대 규모 전선 공장을 세웠다가 결국 다른 재벌 기업에 빼앗겼는데 정치권력이나 관료들이 작심만 하면 피땀으로 일군 기업을 하루아침에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당해본 사건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사업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때이기도 했지요. 나이 오십에 5년 동안 겪은 풍파였습니다.”
안기부에서 고문도 당해
그는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처음엔 고령 탓에 청력이 약해졌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억울한 사연이 있었다.“1987년 11월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북한과 연계해 석탄 관계 일을 하던 사람이 지인의 소개로 불쑥 찾아와 차 한잔 마시고 헤어졌는데 다음 날 졸지에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갔어요. 남산인지 서빙고였는지는 모르겠고 안기부 대공분실이었습니다. 내 나이 예순다섯 때 일입니다.
몇 시간 동안 아들뻘 조사관 세 명이 상처 안 나는 곳만 골라 몽둥이로 때리고 물고문까지 하겠다고 욕조로 끌고 가 겁을 주더군요. 내가 못 참고 고함을 치니까 한 사람이 냅다 내 뺨을 때립디다. 이후 이명증이 생겨 귀가 나빠졌어요. 고쳐보려고 일본이고 미국이고 백방으로 다녔지만 결국 보청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때의 억울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힘 있는 자들에게 아부할 궁리 안 하고 우직하게 일만 했는데 왜 나를 잡아다가 양쪽 귀를 못쓰게 만들었는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해명을 들은 적이 없어요.
당시만 해도 기업들이 알아서 정치자금을 헌납하던 분위기였는데 자진 납부를 하지 않아 당한 게 아닌가 혼자 생각할 뿐이었지요. 나중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공권력에 의한 고문 피해라는 것을 공식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잃어버린 청력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입니까. 명예회복을 했다는 차원에서 위안을 찾을 뿐입니다.”
그는 “내가 자서전 책 제목을 ‘정도’라고 할 정도로 정경유착을 멀리하며 야성(野性) 기업인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다.
“정부에 기대기보다 오히려 많이 싸웠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굴하지 않고 소송으로 대응했으니까요. 마산 국유지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면서 임대료를 부과받은 사건도 정부와 맞서 3심 내내 승소했고, 국세심판소송도 이겨 환급을 받았고 관정교육재단 운영과 관련한 불합리한 세법에도 승복하지 않아 세법 개정을 세 번이나 이끌어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잘못된 정부 조치에 맞서 싸워 이겨 새 판례를 남기는 것도 약자를 돕는 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재단을 설립하고 평생 모아온 부동산을 단계적으로 출연하는 과정에서 낸 세금만도 수백억 원입니다. 현금이 아닌 출연 부동산에 대한 세제 혜택이 당시 전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익재단에 대한 세금 감면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기업 빼앗긴 억울함을 신규 사업 위한 에너지로
삼영화학이 생산하는 ‘애자’ [홍중식 기자]
“국제전선을 허망하게 빼앗기고 시작한 게 애자 산업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남들이 못하는 가장 힘든 사업이 뭔지 궁리했습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분야에 뛰어들면 다시는 권력과 부조리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도전한 것이 애자 개발이었습니다. 5년 고생하면 될 줄 알았는데 30년을 매달렸어요.”
애자는 배전선로용 소형 전신주에 쓰이는 것에서부터 거대 송전탑에 매다는 초고압, 초초고압 애자까지 있다. 이 회장이 세운 ‘고려애자’는 세계 네 번째로 초초고압 애자를 생산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것을 100% 국산화했으며 이제는 수출까지 하고 있다.
초초고압 애자의 경우 애자 하나가 비바람과 햇빛 속에서 수십t 전선 무게를 견디며 매달려 있어야 한다. 습기, 염분, 고열, 초저온에 금이 가면 안 되는 고도의 정밀함과 견고함이 요구된다. 고려애자가 만든 것이 전국에 6000만 개나 걸려 있는데 그중 하나라도 고장 나면 정전이 된다.
그는 사업을 ‘장대높이뛰기’에 비유했다.
“처음 3, 4m는 많은 선수가 성공하지만 세계신기록에 다가갈수록 1cm에 승패가 갈리지 않습니까. 내 인생도 그랬습니다. 커패시터 필름 두께 10㎛(1㎛는 1000분의 1㎜) 생산에 성공했다고 기뻐할 새도 없이 7㎛에 도전했고 다시 5㎛, 3㎛ 개발로 치고 나갔습니다.
애자도 난제를 완전히 풀었다고 쾌재를 불렀는데 선진국에서 폴리머라는 합성고무 애자를 개발해 다시 도전받고 있습니다. 원가가 우리 것의 절반이어서 해가 갈수록 국내외 수요가 줄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것이 반영구적이고 환경오염도 거의 없다는 평가가 나와 일부 수요가 되돌아오고 있어요. 다시 회복될 날이 빨리 오기를 희망합니다. 기업 인생에서 미래 예측이란 건 정말 힘이 듭니다.”
그는 아흔을 바라보던 2009년 선박용 대형 디젤엔진 생산에도 뛰어들어 중공업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빼앗긴 회사 국제전선의 한을 늦게나마 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홍중식 기자]
- 자서전에서 식자우환(識字憂患)이 아니라 재부우환(財富憂患)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돈 많으면 아무 걱정 없겠다고들 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평생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재산을 일군 사람일수록 하늘의 부름을 기다리는 나이가 되면 재산 처리 문제가 가장 큰 난제입니다.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과 갈등에서 헤어날 수가 없지요.
상속하면 간단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다음 대에 망하는 경우를 흔히 봐왔고 법대로 정직하게 상속하면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하니 경영권까지 위협받아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겨야 한다
2018년 관정이종환교육재단 국내 장학생 수여식
“돈을 움켜쥐고 있자니 걱정만 커졌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는 일도 많았고요. 그러다가 2000년 6월 장학재단을 통한 사회 환원을 결정했습니다. 기부를 결정하고 나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몰라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업하면서 억울한 일을 좀 많이 겪었습니까. 장학재단을 세우고 다져가면서 상처가 아물어갔습니다.
돈이라는 게 한번 단념하기로 마음먹으면 아주 편해요.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마음속 마지막 끈마저 놓아버리니 그렇게 가벼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에도 나는 내 손에 쥔 모든 것을 철저하게 비우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참, 아까 건강비결을 물으셨는데 마음 비우고 좋은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게 건강비결인 것 같네요.”
그는 자신의 기부 실천이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어릴 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도 했다.
“조부(祖父)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 작은 발자국이라도 남기려면 재산이 아니라 사람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습니다. ‘황금 한 광주리를 자손에게 물려주기보다 한 권의 책을 더 읽히도록 하라’는 것이 중시조로부터의 오랜 가르침이기도 했구요.
또 ‘돈을 모아 자손에게 남겨준다 해도 자손이 다 지킨다고 볼 수 없고, 책을 모아 남겨준다 해도 자손이 다 읽는다고 볼 수 없다. 남모르게 음덕을 베푸는 것이 자손을 위한 좋은 계획‘이란 명심보감 글귀도 늘 가슴에 있었습니다.
고향인 의령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한 적이 있는데 돈이 없어 공부 못 하는 우수한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었지요. 나중에는 제조업을 하다 보니 선진국으로 가려면 인재 양성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게 기술 개발이었는데 역시 사람이 열쇠였어요. 우수 인력을 키워 좋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길만이 국부(國富)를 만드는 것이고 기업인이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결국 과학인재 육성으로 이어진 거죠.”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한다는 것, 기업인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는 말들만 들려오는 요즘, ‘기업보국’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해온 노(老)기업인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 ‘나는 큰 바보’다”
- 아직도 비행기 탈 때 이코노미석에 앉으세요?“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 아니, 부끄러우시다니요.
“꼰대처럼 보이잖아요(웃음). 며칠 전에도 중국 출장을 갔다 왔는데 대한항공 우수고객이라 비상구 쪽 좌석을 주더라고요. 거기 앉으면 발도 뻗고 편한데 굳이 돈을 더 들여 비싼 좌석 살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다고 나만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요(웃음). 이런 나를 향해 사람들이 ‘바보’라고 하는 소리도 들리던데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 ‘나는 큰 바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허례허식입니다. 체면치레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돈 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내 식대로 먹고 내 식대로 입습니다. 인생에서 거품을 빼자 이런 주의죠. 하지만 최신 기계를 들여온다든지 최고 인재를 데려오고 키우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해가 가고 2020년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100세를 눈앞에 둔 어른에게 지혜를 듣고 싶었다.
-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요.
“저는 미래에 대해 항상 낙관적입니다. 지금 세계가 어렵고 우리나라도 어렵지만 장기적으로는 기복은 있다 해도 발전할 것으로 믿습니다. 정치나 경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더라도 여론이 있고 언론이 있기 때문에 바로잡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이뤄지지 않아도 선거라는 안전판이 있지 않습니까.
탄핵이라는 방법도 있지만 늘 탄핵이나 하고 구속이나 하면 사회가 제대로 될 수가 없지요. 저는 이제 국민 역량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봅니다.
정부가 뭘 잘못해도 국민이 그 잘못을 무색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정부가 엉터리면 우리 국민이 엉터리로 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여줘야 합니다.
반도체를 정부가 시켜서 한 것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선수들이 세계 골프를 휩쓸고 있는 것도 정부가 시킨 것 아닙니다. 어느 행상 할머니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다 내놓은 것도 누가 강요해서 한 것 아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우리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정부가 잘못하더라도 국민이 잘하면 돼요. 정치인들이 마음에 안 들면 선거에서 바꾸면 됩니다. 세계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역사와 문화는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계속 발전해오고 있지 않습니까.”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줄여 일해”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은 “휴일을 모르고 일했다”고 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도 보통 사람입니다. 결점도 있고 잘못도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천재도 아니고 기업을 물려받은 것도 아닌데 그래도 오늘날 이렇게 성공한 비결은 남이 쉴 때 일하고 끊임없이 궁리해 남보다 조금 앞서 나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휴일을 모르고 일했고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했습니다.”
- 지금 이 시기에 필요한 정치 리더십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제가 정치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는 아닌데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정치에 많이 발을 담가 정치를 주도해나갔으면 합니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유지나 획득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나나 당보다 국민을 먼저 챙겨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자리나 일이 있다고 내가 먼저 챙기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교과서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그것이 정치의 정도(正道)입니다.
선심을 많이 쓰고 조직을 확대하고 그럴듯한 장밋빛 공약을 내세우면 표를 많이 얻을 것 같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국민이 꿰뚫어 보기 때문이지요. 꼼수는 안 통합니다. 실현 가능한 좋은 정책을 펴거나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 그 결과로 정권을 유지하거나 집권하도록 해야 합니다.
국민 30~40% 지지로 집권하고 정의를 100% 독점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보수든 진보든 원칙과 신념이 너무 강하면 교조주의나 독단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뭐든 가진 것을 좀 버리는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요즘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그런 현상이 일부 나타난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덜 좋은 사람들이 정치판에 남고 더 좋은 사람들이 떠나는 형국은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관정과학상은 이어졌으면”
이종환 명예회장이 2019년 8월 관정일본연구 학술회의에서 축사하고 있다.
“해가 가기 전에 창설준비기획팀을 만들어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착수합니다. 2020년 5월 창설을 공식 발표하고 세계 최고 석학들로 5개 부문 심사위원회를 발족한 후 2021년 후보 추천을 받아 그 이듬해(2022년)에 첫 시상을 할 계획입니다.
5개 시상 분야는 노벨상과 차별화해 인문사회과학, 생명과학, 수리물리학, 화학, 공학 등으로 나누고 상금은 각각 15억 원으로 할 겁니다. 이론 못지않게 응용도 중시할 것입니다. 특히 아시아 쪽에 소홀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삶에는 욕심이 없는데 관정과학상만큼은 내가 죽더라도 면면히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신동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