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당사자들 상처에 비할 순 없지만 판사도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울적함의 조각이 커피 속 각설탕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법정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편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먹고산다는 것
나는 예비 신랑이던 남자가 예비 신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을 재판한 일이 있다. 예비 신랑의 주장은 예비 신부가 아무런 이유 없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아 결혼 비용과 정신적 위자료에 해당하는 손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을 해보니 이유가 없지 않았다. 피고인 예비 신부의 말에 따르면 상견례 자리에서 전채 요리로 해파리냉채가 나오자마자 예비 시어머니가 자신의 부모에게 부동산은 얼마나 있는지, 자식들한테 얼마나 물려줄 것인지 물었다. 친정어머니가 줄 것이 없다고 하자 예비 시어머니는 낯빛이 굳어지면서 “며느리 직장도 변변찮은데 그럼 애들이 대체 뭘 먹고사느냐”고 힐난했다. “뭘 먹고사느냐”는 말 때문에 예비 신부는 그다음부터 나오는 요리는 거의 먹지 못했다고 한다.예비 시어머니도 할 말이 많았다. “먹을 거 안 먹고” 모은 돈으로 자식 앞으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주었는데 예비 신부 측은 혼수도, 예단도, 예물도 너무 싸구려만 해왔다는 것이다(한복도 물빨래가 되는 것을 했다고 한다). 법정에서는 두 어머니의 대리전이 펼쳐졌다. 다툼의 압권은 금목걸이였다. 신부 어머니는 딸아이 친구들은 굵은 다이아몬드 반지와 목걸이 세트를 받고도 신랑에게 10돈짜리 금목걸이를 해주었는데 예비 신랑이 “아, 글쎄, 15돈도 아니고 20돈을 해달라”고 했다면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예비시어머니는 자기 맏아들은 30돈짜리 금목걸이를 받았다고 받아쳤다.
예비 신랑이 15돈짜리 금목걸이를 해달라고 했다면, 아니 아예 은목걸이를 해달라고 했다면, 두 사람은 무사히 결혼해 행복하게 살면서 나를 만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느 한쪽이 잘못했다고 하기 어려웠다.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오래전 가정법원에는 상대방에게 “돈을 너무 밝힌다”고 손가락질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드물다. 누구나 돈을 밝히기 때문이다.
각자도생, 혼밥의 시대
IMF 외환위기 이후 분위기가 급변했다고들 한다.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폭등하고, 전국의 의대 커트라인이 서울대 다른 과 위로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백두혈통이 아니라 배우 김정은이 “부자되세요!”라고 내놓고 덕담하는 TV 광고가 나온 것도 마찬가지다. 그 뒤로 20년 동안 줄곧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요즘 IMF 외환위기 때 못지않게 어려워지고 있다. 각자도생의 시대다. 각자 알아서 먹고 살아남아야 한다. 식구(食口·밥을 같이 먹는 이들)를 챙길 여유가 없다. 혼밥의 시대다.내가 어릴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늘 쪼들리던 부모님은 날더러 큰 인물이 되라고 했을 뿐 부자가 되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그러나 큰 인물이 되면 자동으로 부자가 되던 시절이다). 학교 선생님들도 돈이 최고라고 가르치지 않았다(그래도 촌지는 받던 시절이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초등학생 때부터 방울토마토 같은 입으로 암송하던 국민교육헌장의 첫 줄) 사람 체면상 어릴 때부터 밥값을 N분의 1로 나누어 계산하는 것을 구차하게 여겼다. 그래서 나는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지 못했다(지금은 너무 잘 알고 또 좋아하지만). 결혼할 때도 돈 문제로 행여 감정이 상할까봐 나는 양가 부모에게 금전적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아내에게 모든 결혼 비용을 합한 것보다 많은 돈을 먼저 송금하고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내가 꽤나 감동한 표정이었으나 결혼 후 자신이 뭔가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준 모든 돈이 마이너스 통장으로 낸 빚이어서 부부가 함께 오랫동안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너무 많이 얻어먹어서
요즘은 절차가 번거롭고, 한복도 마련해야 하고, 시가 친지에게 절값 부담을 지운다는 이유로 폐백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법원에서는 폐백으로 인한 갈등 사례도 많이 볼 수 있다. 폐백을 굳이 하려고 해서 생긴 분쟁이 있는가 하면, 폐백을 생략하려고 해서 생긴 분쟁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폐백을 굳이 하려는 사람끼리, 안 하려는 사람끼리 각 사건의 배우자들을 서로 바꾸어 중매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결혼식 때 폐백을 하지 않았다. 대신 결혼식을 마친 뒤에 장모가 직접 마련한 폐백 음식을 들고 본가 어른들을 찾아가서 인사했다. 대추를 김밥처럼 여러 겹으로 말거나 곶감을 국화꽃처럼 피워놓은, 정성이 가득 든 음식이었다.
예전에 나는 밥 얻어먹는 것을 유난히 불편해했다. 밥을 얻어먹으면 신세를 졌다는 부담감이 컸다. 그러고 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오지랖 넓은 간섭을 해도 참아야 하고 뭔가를 요구하면 어느 정도 들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느껴졌다. 내 자유의지의 날개에 조금의 무게만 더해져도 훨훨 날아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 무거운 이불을 덮은 것처럼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호의를 매번 거절하기도 어려우니 일단 얻어먹고는 재빨리 더 많은 양과 값으로 되갚음으로써 그 이불을 걷어차버리곤 했다. 그래서 ‘김영란법’을 환영했다.
그럼에도 내가 꼼짝없이 과도한 신세를 지게 된 사람이 두 사람 있다. 한 분은 어머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던 어린 시절부터 밥을 무수히 얻어먹었다. 지금은 안 계시니 되갚을 수도 없다. 또 다른 사람이 아내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많은 밥을 얻어먹었다. 내가 지방 근무하느라 주말부부를 한 시간이 길고, 밖에서 사 먹는 날도 많고, 아내만 요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도 조금은 하지만, 그래도 남에 비하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밥을 얻어먹어버렸다. ‘김영란법’이 부부 사이에도 적용된다면 감옥에 상당히 오래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조금 예의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귀에 거슬려 거북해하면서 아내한테는 별의별 욕을 다 먹어도 그러려니 하는 것도 얻어먹은 밥의 양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나도 아내에게 욕을 하고도 멀쩡할 수 있도록 앞으로 열심히 밥을 해줄 생각이다.
잔칫날 술상을 대접하는 자세
검은 정장 조끼를 입은 남성 종업원이 큰 원형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다른 사람과 조금 떨어져 앉으려고 했더니 딱딱한 말투로 안 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낯선 어른 바로 옆에 딱 붙어서 앉았다. 종업원이 또 다른 낯선 사람을 내 옆에 앉히려고 할 때 나는 그에게 지인 두 명이 오는 중이라 두 자리를 더 맡아두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종업원이 이번에도 딱딱한 태도로 그럼 5분만 기다리겠다며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안내하면서도 마치 4분 59초가 된 것처럼 자꾸만 내 쪽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잠시 뒤 지인이 어린 아들 손을 붙잡고 들어왔다. 식사는 괜찮았다. 양송이 수프도, 미니 샐러드도, 다진 생선에 허브를 올린 전채 요리도 맛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성 종업원이 뾰로통한 표정과 음성으로 음료수가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쟁반을 든 채, 마치 찹쌀떡, 메밀묵 장수 같은 발성으로 “음료수 드시이이일 뿐!” 하며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테이블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보름달 같은 흰 접시 위에 초록색 초승달 같은 멜론이 나왔다. 다섯 조각으로 칼질이 돼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어른이 두 조각을 연방 먹었다. 그 옆의 어른이 또 두 조각을 먹었다. 그러고 나니 한 조각이 남았다. 나와 지인은 먹지 않고 지인의 초등학생 아들이 먹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하나 더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곁을 지나가던 찹쌀떡, 메밀묵 장수 같은 종업원에게 멜론을 조금 더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나 종업원은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한 사람에 한 조각이라고 했다.
내가 고등학생 때 고향에서 사촌 누나 결혼식이 열렸다. 결혼식이 다 끝나고 신랑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난 뒤 큰아버지 집에서 별도로 잔치 같은 것이 열렸다. 마당에 놓인 평상에 친지와 동네 사람 수십 명이 북적거리며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담이 없는 집이어서 사람이 수시로 찾아오고 또 떠나갔다. 큰아버지는 기분 좋게 술을 받아 드시느라 얼굴이 폐백 대추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유쾌한 소란과 즐거운 분주함이 범벅된 장면이었다.
그런데 행색이 허름한 아저씨 한 분이 마당 안으로 들어와서 쭈뼛쭈뼛 두리번거렸다. 눈빛이 또렷하지 않고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다. 친지도 아니고 동네 사람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가가서 예를 갖추고 인사하더니 평상 한쪽에 앉히고는 작은 술상을 그의 앞에 놓고서 술을 따라주고 한동안 말상대를 해주셨다. 그의 얼굴에 차츰 화색이 돌았다. 나는 아버지가 걸인일지 모르는 사람을 잔치를 축하해준 한 명의 손님으로 존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달리 보였다. 품위 같은 것을 느꼈다. 혼주가 고급 호텔 예식장에서 비싼 호텔 요리를 대접할 때 생긴다는 품위와는 달랐다. 돌아보면 그것은 우리 아버지가 특별히 예의가 발랐다기보다는 그 시절 그 동네의 문화였던 것 같다. 잔칫날은 누구나 좋은 마음으로 대접하는 그런 날이고 그래서 잔칫날이었다.
잔칫날 초라한 낯선 사람에게 작은 술상을 대접하고 말동무가 돼주는 자세.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15돈짜리 금목걸이보다 이혼을 막는 비결일지 모르겠다. 그것이 진짜 폐백인지 모르겠다. 팔굽혀펴기 50번이 아니라 10번 할 정도의 성의라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에는 물론 직장에도, 사회에도, 정치에도 1년에 한두 번씩은 그런 훈훈하고 흥성스러운 잔칫날이 있으면 좋겠다. 그간의 불화를 덮어두고 서로 음식을 먹이면서 말동무가 돼주는 날.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전직 판사이자 현 행정부 공무원. ‘사는 듯 사는 삶’에 관심 많은 작가. 쓴 책으로는 에세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보헤미안랩소디’(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