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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

‘스펙사회’ 민낯 청년 영입 정치 쇼

꽃가마 탔다가 ‘낙동강 오리알’ 될라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스펙사회’ 민낯 청년 영입 정치 쇼

  • ● 역경 극복기, 정치 진출 스펙으로
    ● 상위 0.1% 전문직이 청년 대변?
    ● 반복되는 ‘인턴 헌법기관’ 양산
    ● 중앙선관위 ‘비례 전략공천’ 불가
‘사바나’는 ‘사회를 바꾸는 나, 청년’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뉴스랩(News-Lab)으로, 청년의 삶을 주어(主語)로 삼은 이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입니다.<편집자 주>


2019년 12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2호인 원종건(앞줄 오른쪽 두 번째) 씨의 인재영입 발표회가 있었다.(위)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월 28일, 원씨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영입인재 자격을 스스로 당에 반납하겠다”고 밝힌 후 당을 떠났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2019년 12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2호인 원종건(앞줄 오른쪽 두 번째) 씨의 인재영입 발표회가 있었다.(위)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월 28일, 원씨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영입인재 자격을 스스로 당에 반납하겠다”고 밝힌 후 당을 떠났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밀레니얼 세대의 삶은 스펙과 함께해 왔다. 학벌, 학점, 외국어, 자격증이 스펙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이따금 저항하는 개인이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금세 인턴십, 공모전, 어학연수가 ‘취업용 대외활동’으로 탈바꿈해 밀레니얼의 삶을 파고들었다. 낭만을 팔던 동아리 활동도 자기소개서를 채울 글감으로 변모했다. 만성적 불안감이 청춘의 일상을 잠식해 갔다. 

‘이대론 안 된다’는 자성이 터져 나온 건 그즈음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 K’가 전 국민을 웃기고 울릴 때다. 유수 대기업이 ‘슈스케’ 방식으로 신입사원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서류전형 비중을 낮춘 대신 자기 PR과 합숙전형을 도입했다. 자소서가 취업 전선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런데 ‘탈(脫)스펙 바람’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차별화된 이야기’를 갖춰야 한다는 부담감이 되레 밀레니얼을 짓눌렀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는 문장이 자기계발서 시장에서 회자됐다. 취준생 사이에 ‘기업이 역경을 극복한 경험을 갖춘 지원자를 선호한다’는 얘기가 퍼졌다. 아르바이트도, 해외봉사도, 창업도 고진감래의 서사로 탈바꿈해 스펙으로 수렴돼 갔다. 밀레니얼은 방학 숙제를 풀 듯 ‘고행길’에 나섰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 것이 아니라, 스펙이 스토리를 적대적 인수합병 방식으로 먹어치웠다. 정치도 무풍지대가 아니었다.


역경을 넘어 여의도로

1월 28일. 서울 여의도의 오전은 을씨년스러웠다. 이날,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 국회에서 노회한 정객(政客)인 여당 대표와 마주 섰다. 더불어민주당의 14번째 영입인재 조동인 씨. 1989년생인 그는 대학 시절부터 8년간 5번 창업한 것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내 당 안팎에서 ‘찝찝하다’는 목소리가 스멀스멀 터져 나왔다. 조씨가 2015년 단 일주일 만에 기업 3곳을 창업했다가 2년 3개월 만에 동시 폐업한 사실을 놓고서다. 이내 ‘스펙용 창업’이었다는 의혹이 일었다. 



이튿날 조씨는 “3개 회사를 폐업한 것은 경영상 어려움과 타 회사로의 업무 이관 등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창업과 폐업이 스펙이라면 활용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활용할 곳이 없다”고 덧붙였다. 조씨는 하루 전까지 자신을 “올해로 창업 9년차에 접어든 청년창업가”로 소개했다. 이어 “실패에 관대하지 못한 창업 생태계 문제를 해결해 건전한 도전의식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창업 실패’를 스펙 삼아 집권여당에 안착해 놓고 ‘창업·폐업을 활용할 곳이 없다’고 호소했다. 

마찬가지로 1월 28일. 국회 정론관에서는 앳된 얼굴의 청년에게 수십 대의 카메라가 몰려들었다. 1993년생 원종건 씨는 민주당 영입인재 자격을 반납하고 총선 출마를 포기했다. 그는 옛 여자친구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폭로로 진퇴양난의 처지에 내몰린 상황이었다. 그 역시 ‘스토리형 스펙’, 즉 역경 극복을 브랜드로 앞세운 인사였다. 원씨는 지난 2005년 MBC 프로그램 ‘느낌표’의 ‘눈을 떠요’ 코너에 시각장애 어머니와 출연해 화제가 됐다. 그 뒤 삼성행복대상 청소년상(2015)과 서울특별시 청년상(2016)을 수상했다. 

1988년생 소방관 오영환 씨(민주당)는 JTBC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그는 서울 119 특수구조단 산악구조대 등에서 일했다. 오씨는 저서 ‘어느 소방관의 기도’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일선 소방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분류하자면 X세대에 속하는 1977년생 남영호 씨(미래통합당)는 극지탐험가다. 유라시아 대륙 횡단, 타클라마칸사막 도보 종단, 갠지스강 무동력 완주 등이 그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한때 취업 시장에서 인기였던 ‘고난 극복기’는 정치에서 이런 식으로 변주된다.


‘막강 스펙’ 전문직이 청년 대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재영입 발표회에서 민주당 영입인재 14호인 조동인 씨 영입을 발표했다.(왼쪽)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2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재영입 환영식에서 박대성 페이스북 한국·일본 대외정책 부사장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악수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뉴시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재영입 발표회에서 민주당 영입인재 14호인 조동인 씨 영입을 발표했다.(왼쪽)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2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재영입 환영식에서 박대성 페이스북 한국·일본 대외정책 부사장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악수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뉴시스]

역경의 드라마가 없는 공간에는 ‘막강 스펙’이 자리 잡았다. 1985년생 이소영 씨는 2009년 사법시험(51회)에 합격해 2012년 사법연수원(41기)을 수료한 젊은 변호사다. 이후 그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에 입사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는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기후환경회의’ ‘녹색성장위원회’ 등 환경 관련 기구에서 활동했다. 그 뒤 민주당에 ‘8호 영입인재’로 입당했다. 

1980년생인 최지은 씨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국제개발학 석사,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개발 박사를 마친 재원이다. 졸업 후에는 아프리카 개발은행을 거쳐 세계은행에서 중국 담당 선임이코노미스트로 일했다. 삼성전자에서 일한 적도 있다. 최씨는 민주당 ‘9호 영입인재’다. 

1978년생 홍정민 씨는 서울대 경제학부 학·석사를 거쳐 같은 대학에서 응용계량경제학 및 금융경제학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최연소 부장에 발탁됐다. 2018년 법률 서비스 관련 IT(정보통신) 스타트업인 ‘로스토리’를 설립했다. 홍씨 역시 영입인재 자격으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미래통합당이 영입한 1980년생 박대성 씨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뒤 페이스북코리아 대외정책 총괄이사, 오큘러스코리아 정책 고문을 거쳐 페이스북 한국·일본 대외정책 부사장으로 일했다. 같은 당에 입당한 송한섭 씨는 1980년생으로 서울대 의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2004년 의사 국가고시와 2007년 사법시험(49회)을 동시 합격한 ‘의사 검사’로 유명하다. 

오늘날 청년은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넘어 N포세대로 불린다.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조건의 그림자가 삶의 길목마다 아른거린다. 온갖 분노가 한데 뒤엉켜 청년의 삶을 짓누른다. ‘헬조선’은 청년 사이에 관용어로 자리매김했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마따나 한국 사회는 “386세대 등이 쌓아올린 신분화된 기득권 성벽 아래에서 그들의 자식들이 스펙 경쟁을 하며 필사적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형국”에 처했다. 

이 와중에 동 세대에서 상위 0.1%에 속할 전문직들이 스펙 사회에 짓눌린 청년을 대변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검사가 “청년이 일자리 문제 등으로 인한 박탈감과 미래의 불안감으로 좌절하고 있다”(미래통합당 송한섭)고 꼬집고, 세계은행 선임이코노미스트가 “꿈을 찾고 이룬 과정을 청년들과 나누고 싶다”(민주당 최지은)고 선언한다. 대기업 연구소 출신 변호사가 “경력단절로 고통받는 수많은 여성이 용기를 갖고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의 작은 근거라도 만들기를 원한다”(민주당 홍정민)고 호소한다. 양당은 이들을 품고 ‘청년정치를 키우겠다’고 홍보한다. 

청년 사이에서는 ‘밑바닥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이 돈다. 지방 사립대를 졸업한 후 콘텐츠 회사에 사원으로 재직 중인 황미연(가명·여·28)씨는 “청년정치를 위한 영입? 전혀 와닿지 않는다. 좋은 스펙 가진 사람이 ‘의원 배지’라는 더 좋은 스펙 하나 더 가지려 하는 것 아니냐”고 일갈했다.


‘인턴 헌법기관’과 영입 이벤트

스펙 좋은 청년이 꽃가마를 타고 정치에 급작스레 입성했다. 자연히 공인으로서의 검증은 미비하다. 그 탓에 ‘청년정치=아마추어’ 식의 고정관념이 더 짙어질 공산이 커졌다. 오영환 씨는 1월 7일 민주당 입당 기자간담회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에 대한 질의를 받자 “당시 모든 학부모가 관행적으로 해온 행위를 지나치게 부풀렸다”고 답해 논란을 자초했다. 

정치컨설턴트 ‘민’의 박성민 대표는 “그 옛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첫날밤을 맞이한 새색시처럼 정치인은 의원에 당선되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를 배우기 시작한다. ‘인턴 헌법기관’은 그렇게 탄생한다”(‘정치의 몰락’)고 꼬집은 바 있다. 8년 전 내놓은 책을 통해서다. 

불행히도 ‘인턴 헌법기관’ 양산 행렬은 여전하다. 과거에는 ‘성공시대’식으로 사람을 찾았다면 지금은 여기에 ‘인생극장’을 덧붙였다. 밀레니얼에 속하는 미래통합당의 한 영입인재는 “의정 활동이 장난은 아니지 않나. 스펙과 스토리만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면서 이렇게 부연했다. 

“여야 막론하고 구체적 플랜 없이 일단 영입하고 보자는 식이어서 우려스럽다. 영입한 사람들에게도 (의정 활동에 대한) 가이드를 줘가며 관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영입 이후 총선까지 시간도 굉장히 짧다. 단기간에 (콘텐츠를) 채우기 쉽지 않다. 이번에 영입된 인재들의 경우, 여야를 막론하고 한 사람의 헌법기관이 될 준비가 돼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물음표를 그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청년 자신이 정당을 상품 고르듯 대한 흔적마저 읽힌다. 원종건 씨를 둘러싼 미투 의혹이 불거진 1월 27일, 온라인에서는 지난해 11월 직장인 익명 앱 ‘블라인드(blind)’에 올라온 글이 뒤늦게 주목받았다. 작성자는 “두 당에서 내년 총선에 공천과 비례로 각각 제의가 들어왔다” “민주당과 자한당(현 미래통합당)이라서 고민이 좀 된다. 조건과 대우가 다른 것 같아서”라고 썼다. 글은 원씨가 재직했던 이베이 직원란에 올라왔다. 미래통합당 관계자는 “원씨가 민주당에 입당하기 전 염동열 인재영입위원장이 원씨를 만나 영입을 제의했다”고 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작성자는 원씨일 확률이 높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치를 시작하는 이 친구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 정책, 철학이 아니라 비례와 지역구 중 어느 것이 커리어(경력)에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질문은 쇼핑몰에서 물건 구입할 때의 고민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인재영입이라는 판촉 이벤트가 ‘정치’를 증발시켜 버린다”고 비판했다.


‘낙동강 오리알’

영입된 청년은 인턴 취급을 받더라도 국회에 입성하고 싶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2월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전략만으로 비례대표 후보자 및 순위를 결정, 추천하는 전략공천은 법률 위반”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양당 공히 영입인재를 비례대표 우선순위에 배치할 수 없게 됐다. 미래통합당은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에서만 비례대표 후보를 내기로 한 터라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최악의 경우 양당에 영입된 청년 상당수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그렇다고 청년을 지역구에 전략공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래통합당에서는 “상황이 아주 냉정한 것 같다”(영입인재 A)라거나 “청년·여성에 가산점을 준다고 하지만 공천관리위원회는 결국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지역에 공천할 것”(영입인재 B)이라는 말이 돈다. 민주당에서는 한때 청년을 중진 의원 용퇴 지역구에 투입하는 방안이 거론됐다. 하지만 전략공천 가능성이 희미해지자 일부 청년 정치인들이 각 지역구 경선에서 현역 의원과 맞붙기로 했다. 

여러 차례 총선 기획 경험이 있는 야권의 한 중진 의원은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모두 안다”면서도 “하지만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청년이라고 해도 지역구에서는 득표력이 없다”고 했다.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면 스펙·스토리를 열쇳말 삼은 양당의 청년 영입 경쟁은 한바탕 쇼로 막을 내릴 공산이 크다. 청년정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신동아 2020년 3월호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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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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