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신평의 ‘풀피리’⑭

좌우 양극단 오간 TK가 사는 길

‘한국의 모스크바’에서 보수의 아성으로… 소수자의 혹독한 체험기

  • 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lawshin@naver.com

    입력2020-11-0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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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혈관에 박힌 대구 기질

    • 해방 당시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

    • 사회주의 편린 박힌 박정희式 경제개발

    • 보수 일색 돼 사상적 일체화 경향

    • 지난 정권 때는 ‘내가 친박 좌장이요’ 해프닝

    • 외곬 정치에 1인당 GDP 16개 광역자치단체 중 꼴찌

    • 양극단 겪었으니 무한대립 극복할 지역이기도

    *19대 대선 당시 신평 변호사(64·사법연수원 13기)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중앙선대위에서 ‘공익제보 지원위원회’ 위원장과 ‘민주통합포럼’ 상임위원을 지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여권을 향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지식인의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경북 경주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쓰며 산다.

    2012년 3월 23일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동아DB]

    2012년 3월 23일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동아DB]

    인간에게는 누구나 작든 크든 귀소본능이 있다. 한국처럼 전통사회의 유풍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는 사회에서는 귀소본능의 일종으로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의 수가 많다. 

    나는 대구 토박이다. 그것도 아주 센 토박이다. 친가, 외가가 모두 임진왜란 무렵부터 대구 지역에 정착해 살았다. 이 지역에서 말 깨나 할 수 있는 집안이었다. 외가의 아재 한 분이 옛날 민선 대구시장을 지냈고, 바로 외숙인 고(故) 김덕엽 씨는 경북지사를 역임했다. 

    내 혈관에 박힌 대구 기질은 조금 유별나다. 우선 더위를 무척 잘 참는다. 요즘엔 조금만 더워도 기후변화 탓을 한다. 나는 불만이다. 옛날엔 선풍기 하나 없이 펄펄 끓는 함석집에서 살았고, 아스팔트가 질퍽해지던 광경에 익숙하며 자랐다. 그때와 비교하면 별 것 아닌 더위로 호들갑이 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또 고집이 아주 세다.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마음먹으면 어떤 불이익이나 손해를 봐도 개의치 않고 관철한다. 대학 은사인 고(故) 심헌섭 선생님이 “저 놈 고집을 누가 꺾누!”라고 말씀을 하셨다.



    ‘한국의 모스크바’와 박정희式 경제개발

    옛날의 대구는 지금의 대구가 아니었다. 해방 당시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급진세력의 온상지였다는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형 상희 씨는 사회주의자였다. 박 전 대통령도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술사고 밥 사며 좌익세력의 조직원을 포섭하려고 노력했다는 증언이 나와 있는 것으로 안다. 

    외숙은 “해방 당시 대구 젊은 지식인의 90 퍼센트 이상이 좌익이었다”고 했다. 1946년 10월에는 미군정에 대항하는 ‘대구 폭동’이 일어났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종종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조봉암이 원래 대구사람이야. 그렇게 너무 똑똑하면 안 되지. 너도 절대 그런 곳에 발을 담그면 안 돼!” 

    이런 대구가 변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을 전후해 진보적 사상을 가진 숱한 지식인들이 처형당했다. 대거 ‘골’로 끌려가 총을 맞고 죽었다. 대구 인근에는 과거만 해도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았다. 다수의 사람이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어야 했다. 진보의 씨를 말릴 정도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다. 어른들이 “박정희 그 사람이 이쪽 출신이라는데”라고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박정희의 사상적 변화에 관하여는 여러 말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젊은 날 경도되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는 북한식 사회주의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벗어나서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의 행적에 여기저기 편린(片鱗)을 박아 넣었다. 

    우선 그는 5·16 군사쿠데타를 두고 기를 쓴 채 ‘혁명’으로 포장하려 했다. 혁명이라는 개념은 원래 좌파적 이데올로기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또 자유방임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당치도 않은 개념이다.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보험의 기초를 튼튼히 닦은 것도 그가 일찍이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이렇게 그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파시즘적 국가사회주의 같은 이념을 범벅해 국가를 운영했다. 그 결과 세계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던 기적의 길로 인도했다. 

    도시국가를 제외하고 봉건제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한 예는 세계사에서 한국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 물론 급속히 이룬 기적의 봉우리 사이에 어둠의 골짜기가 다수 형성됐다. 적잖은 희생자가 났다. 우리는 지금 골짜기들을 부지런히 메워가고 있으나 그 과정이 썩 신통치는 않다.

    박정희의 남한과 김일성의 북한

    1971년 4월 25일 제7대 대통령선거 유세를 위해 대구 유세장을 찾은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 [동아DB]

    1971년 4월 25일 제7대 대통령선거 유세를 위해 대구 유세장을 찾은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 [동아DB]

    박정희에 의한 남한의 성공과 김일성에 의한 북한의 실패를 가른 근본 요인은 무엇일까? 나는 두 지도자가 가진 식견의 차이라고 본다. 김일성은 평생 동안 시야가 동북아에 갇혀있었다. 그도 진정으로 인민을 위해 헌신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민들이 ‘이밥(쌀밥)에 고깃국’ 먹게 하는 것이 김일성이 기껏 가졌던 목표였다. 물론 이마저 달성하지 못했다. 

    박정희는 남한의 개방된 체제에 살며 국제질서를 바라보는 데 눈이 떴다. 그는 남한이 냉혹한 국제경쟁 속에서 살아남고, 활발한 무역을 통해 세계 일각에 확고히 자리 잡은 경제주체가 되게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시켜 나갔다. 그 결과 남·북한의 경제력은 박정희 집권 이후 급속하게 역전됐다. 남한은 북한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단계로 나아갔다. 세계 전체의 흐름을 눈여겨본 식견의 승리였다. 

    불행히도 대구·경북의 사상적 지형은 박정희 집권 이후 급속히 변해갔다. 진보는 흐릿해지고 대구·경북은 점차 보수의 아성으로 바뀌어갔다. 이효상 전 국회의장 같은 이들은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그때만 해도 유진오 같은 야당 정치인들이 수성 천변에 유세하러 왔을 때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렸다. 꼬마인 나는 그 광경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따라다녔다. 1971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방문했을 때 비장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나와 그의 유세장으로 향하던 기억이 새롭다. 

    대구·경북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내 외숙이다. 외숙 자신도 다른 대구의 젊은이들처럼 해방 당시에는 좌익사상을 가졌을 것이다. 외숙은 대구농고를 졸업하였으나, 누구나 그랬듯이 먹고 살 길이 막연했다. 폐가 좋지 않아 각혈을 하면서도 각고의 노력 끝에 행정고시를 합격했다. 변절(?)한 박정희 전 대통령 밑에서 역시 표면적으로 좌익사상을 버린 그는 박 전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정책을 수행하는 첨병으로 활약했다. 

    승진의 과정은 눈부셨다. 출사한 지 10여 년 만에 부산시장, 경북지사를 거쳤다. 경북지사로 치른 1969년 3선 개헌 국민투표에서 대구·경북(당시는 대구도 경북의 일부였음)의 개헌 찬성률을 90%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마음속까지 철저하게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아닐 것이다. 그가 대학생이던 나에게 “좌익이론이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는 가장 잘 들어맞아”라고 소리를 죽여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대구·경북 들어서면 ‘보수의 함성’에 기죽어

    1971년 4월 17일 제7대 대통령선거 유세를 위해 대구 유세장을 찾은 박정희 당시 민주공화당 후보 부부. [동아DB]

    1971년 4월 17일 제7대 대통령선거 유세를 위해 대구 유세장을 찾은 박정희 당시 민주공화당 후보 부부. [동아DB]

    외숙의 영향이었을까. 1980년 행해진 제22회 사법시험에서 헌법문제로 ‘헌법의 의의를 논하라’가 출제됐는데, 나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헌법의 형성과 그 의미를 서술해 헌법 최고점수를 맞았다. 물론 ‘계급투쟁’이란 말은 쓸 수 없으니 그 대신 ‘계층 간의 갈등’이라는 말을 넣었다. 

    차츰 대구·경북지역은 진보적 사상의 불모지가 되어갔다. 더 이상 내면을 감추고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으나, 거의 보수 일색인 지역이다. 국회의원, 자치단체장은 당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거의 보장된다. 그러니 뽑힌 이들의 관심은 지역구민을 위한 봉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외딴 섬처럼 돼버린 지역은 개방의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외곬으로 빠진 정치가 지역민을 소외시키면서 미래가 상실되어가고 있다. 실의에 빠진 대구·경북 지역민들은 모든 것이 좌파 정부의 잘못 탓이라 생각하며 문재인 정부가 전복되기를 염원한다. 그리하여 오늘도 지극히 평범한 이들이 정권을 저주하는 보수 유튜브 방송을 보며 믿거나 말거나 식의 정보를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상으로 열심히 퍼 나른다. 

    한 때는 내 모교인 경북고등학교 출신들이 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 기술고시 등 소위 ‘고시’라는 것에서 항상 10% 이상의 합격자를 점했다. 지금은 대구·경북을 통틀어서도 그 비율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자연히 이 지역 출신 중앙부처 간부 공무원 수도 줄고 있다. 이러다 보니 장래에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경험을 갖춘 이들이 감소하고 있다. 모든 방면에서 조락(凋落)의 기운이 뚜렷하다. 대구시는 16개 광역자치단체 중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가장 낮은 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자리매김했다. 나아질 가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내기철이 되면 물 풀린 논에서 나오는 개구리의 합창이 천지를 덮는다. 대구·경북에 들어서면 ‘보수의 함성’에 기가 죽는다. 유난히 특이한 이 광경에 초현실의 감각마저 때때로 느낀다. 나는 서울에서 청춘의 대부분을 살았다. 또 미국, 일본, 중국에 공부하러 다녀온 경험이 있고 헌법학자로서 오랫동안 연마해왔다. 나와 같은 사람이 어찌 지금 이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상적 일체화 현상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곳에서 사상적 아웃사이더로 혹독한 체험을 한 일이 자주 있다. 그 경험을 한 번 말해볼까 한다.

    2010년 대구교육감 출마 때의 일화

    나는 2010년 대구교육감 선거에 출마했다. 아이들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또 내가 교육감이 되면 잘 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출마에는 다른 큰 이유가 작용했다. 나는 1993년 판사실에서 돈 봉투가 오가는 현실을 지적해 법관사회의 정풍을 주창한 일로 법관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대법원은 그에 따른 여파를 차단할 목적으로 내가 사생활이 문란해 어쩔 수 없었다고 법조출입 기자들을 설득했다. 또 지방법원 단위에서도 광범한 공작을 펼쳤다. 

    그 영향은 한 없이 이어졌다. 내 아이들이 장성해 가는데, 그 모욕적인 말이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돌아다녔다. 공직에 출마하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면에서는 성공했으나, 당선되지는 못했다. 그때 ‘친박 교육’을 실현해야 한다는 어느 후보자가 공공연히 나를 ‘극좌파’라고 험담하며 다녔다. ‘빨갱이’ 중에서도 ‘골수빨갱이’라는 뜻이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버젓이 있는데, 나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몰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분해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으나 참석한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 무렵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구·경북에서 확고한 맹주 노릇을 했다. 2012년에 그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 지역은 완전히 그의 숭배처가 됐다. 이 지역에서는 ‘친박’을 자칭하며 무슨 대단한 임무를 수행하는 양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는 지금 박 전 대통령이 겪고 있는 상상 이상의 고초에 깊이 애석해 한다. 그가 자신이 한 행위에 비해 과도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 대구·경북에서 일어난 일은 그것대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말이 조금 빗나가는 듯해 조심스러우나, 친박 세력이 호가호위를 하며 가장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때는 2016년 4월 20대 총선 전이었다. 대구·경북지역에서는 ‘친박 감별사’라고 자칭하는 인사까지 등장했다. 당시 중앙언론사 편집국장을 지낸 지인 두 분과 의견을 나눴다. 그들은 권력이 오만하면 반드시 뒤끝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중 한 분은 당시 새누리당의 예상 의석수를 말해줬는데, 나는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의 예상은 거의 정확했다. ‘아하, 역시 오랜 세월 정치현장을 봐온 이의 말은 다르구나’ 하고 탄복했다.

    친문과 친박, 표면은 다르되 본질은 같아

    나는 아직 여전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있다. 도덕성과 인격의 고매함이 일찍이 우리 헌정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정치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친문 세력은 문제다. 그들의 반민주주의, 반헌법적 성향은 우려스러운 수준을 넘어섰다. 추미애 장관과 같이 여기에 기대 자신의 정치적 장래를 담보하려는 사람들이 날뛰고 있다. 이들이 휘두르는 ‘말의 칼’은 너무 예리해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칼날 밑에 희생되고 있다. 가히 안하무인이다. 과거 위세가 등등했던 친박 세력과 표면은 다르되, 본질을 보면 둘이 너무나 닮았다. 

    내가 하나 자신 있게 예상하자면, 새 대통령은 절대 친문 세력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설사 민주당에서 재집권하더라도 우리의 국운이 살아있는 한, 지금 국민의 원성을 자아내고 있는 인사들에 대한 청산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한 민주주의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
    말을 다시 돌리면, 내가 쓰라린 일을 겪는 사이 대구·경북지역을 바라보며 왠지 자꾸 열패감을 가지게 됐다. 난들 애향심이 왜 없겠느냐만 자꾸만 그곳에서 겪은, 소수자로 핍박당하던 씁쓸한 기억에 위축된다. 

    물론 고향이란 좋고 싫은 감정으로 바꿀 수가 없다. 고향은 불변이다. 생각해보면 순종토박이인 내가 왜 기가 죽는가. 나는 내 나름의 애향심을 갖고 있다. 나아가 내 애향심이 진정한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는다. 

    나는 대구·경북이 언젠가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지역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양극단에 모두 처해본 지역은 이 지역밖에 없다. 그러니 양극단을 벗어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곳도 이 지역이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이 지역에는 역사적으로 면면히 내려오며 국가를 바로잡아온, 맑고 단아한 ‘선비정신’이 강하다. 선비정신이 혼탁한 정파 간의 대립, 양쪽으로 나뉜 무한대립의 반복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를 정화해 나갈 중요한 기제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날이 오면, 대구·경북은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룬 모범적인 곳으로 미래 한국을 선도해나갈 것이다.


    ■ 늦가을

    가느다란 초승달을 밟고
    외로움이 서있다
    대륙을 건너온
    카랑카랑한 바람과 마주친
    나뭇가지 사이에도
    이리저리 헤매는
    겁먹은 길냥이 눈 안에도
    외로움이 앉아있다
    단절의 긴 한숨을 쉬는
    대지 위에서
    갈증으로 허덕이는 늦가을
    메마르게 갈라지는
    그 얼굴이 안쓰러워
    내 작은 품에 안으려
    천천히 팔을 내민다

    집 앞에 있는 들판이 휑하니 비워졌다. 뜨거운 여름은 많은 결실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이 자리에 곧 겨울이 들어선다. 멀리 보이는 산이 경주 남산이다. [신평 제공]

    집 앞에 있는 들판이 휑하니 비워졌다. 뜨거운 여름은 많은 결실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이 자리에 곧 겨울이 들어선다. 멀리 보이는 산이 경주 남산이다. [신평 제공]


    ● 1956년 출생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제23회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제13기
    ● 인천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대구지방법원 판사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헌법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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