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사유리가 쏘아 올린 ‘비혼맘’, 정자은행에 대한 夢想

난임전문의 조정현의 ‘생식이야기’ ㉖

  • 난임전문의 조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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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21-01-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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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출산한 방송인 사유리 씨. [인스타그램 캡처]

    일본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출산한 방송인 사유리 씨. [인스타그램 캡처]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방송인 사유리 씨가 최근 일본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출산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비혼(非婚)맘’이 화두가 됐다. 사유리 씨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아기를 낳고 싶었지만 출산만을 위해 급하게 결혼할 사람을 찾거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기도 싫어 고심 끝에 결혼하지 않고 ‘엄마’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통계청도 2020년 11월 “‘결혼을 하지 않아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0.7%(남자 32.6%, 여자 28.8%)로 2012년 22.4%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13세 이상 3만8000명 대상 조사 ‘2020년 사회조사’ 결과). 

    통계청 조사에서 보듯, 이제 정자은행(sperm bank)을 이용한 비혼 출산은 과거처럼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다. 정자은행 문제도 이제 공론화돼야 한다. 그런데 비혼 출산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결혼은 하지 않고 애인과의 사이에서 출산하는 건 개인 선택이지만, 정자를 공여받아 IVF(시험관아기 시술)를 한다면 국내에서는 장벽에 부딪힌다. 

    우선 국내에서는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공여받아 IVF를 하는 건 불법이다. 법적으로 혼인 관계에 있는 부부에게만 비배우자의 인공수정을 허가하고 있어 배우자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심지어 불의의 사고나 암으로 사망한 남편의 냉동정자로 임신을 시도하는 것도 불법이다. 최근 암으로 남편을 잃은 부인에게 생전에 냉동한 남편의 정자로 체외수정을 해준 병원이 법원으로부터 ‘배아생성의료기관 지정 취소’ 처분을 받기도 했다. 현행 생명윤리법(23조)은 사망자의 난자 또는 정자로 수정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니 비혼 여성이 정자은행을 이용해 IVF를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남성의 신체적 이유(비폐쇄성 무정자증 등)로 인한 불임 부부라고 해도 정자은행을 이용하려면 남편 동의가 있어야 한다.

    사유리가 한국에서 임신 못 한 이유

    현실을 솔직하게 토로하면, 국내 정자은행은 전국에 5곳이 있지만 기증자가 없어 기증된 정자 수는 턱없이 적다. 정자은행은 대부분 남성불임이 원인인 제3의 난임 부부에게 비배우자 공여(타인의 정자를 제공받는 것. 이하 ‘비배’)를 위해 100% 기증으로 운영된다. 지난 2005년 정자 매매를 금지한 생명윤리법이 시행된 뒤 순수 정자 기증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정자 기증에 대한 불편한 인식 탓에 선뜻 정자를 기증하려는 남성도 드물다. 국내에서는 한 해 무정자증(비폐쇄성) 부부의 비배 공여로 인한 체외수정 시술은 700여 건에 불과하다. 

    1970년대에는 의대생들이 주로 정자를 기증했다. 필자도 정액 채취통을 들고 화장실에서 정액을 받아 산부인과에 ‘헌납’한 기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내가 기증한 정자가 연구용으로 쓰일지, 남성불임 부부의 IVF에 쓰일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정자 기증을 유독 많이 한 동기생이 “어디선가 내 자식들이 자라고 있을지도 몰라”라며 쓴웃음을 짓던 생각이 난다. 요즘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광경이다. 의대 교수가 제자들에게 정자 기증을 강요할 수 없고, 아무리 존경하는 스승이라고 해도 정자를 내놓으라고 하면 학부모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정자은행에 자신의 정자를 기증하려 해도 나이 제한과 건강검진 절차를 통과해야 된다. 만 19~50세 신체 건강한 남성 중 유전병과 감염병 등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신체 건강 상태가 표준보다 높은 모집단에서 이뤄지는 게 좋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경우 1990년대부터 종족보존 운동의 일환으로 군 입대하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정자 검사를 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정자은행을 국가가 운영한다. 미국에서는 상업적 정자은행이 성행하고 있고, 중국에서는 각 성에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정자은행과 혈통정자은행(자가동결방식)이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상업적 정자은행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내 핏줄, 내 자식을 원하는 정서 탓으로 정자은행을 이용하는 ‘비배’는 물론이고 정자 기증도 꺼리는 분위기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비혼맘’이라는 화두를 간과해선 안 된다. 하루가 무섭게 변화하는 여성의 의식과 시대 감각을 참고해야 할 때가 됐다. 

    양질의 정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자를 체계적으로 수집해야 한다. 혈액은행처럼 정자은행을 국가에서 운영하는 게 바람직하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국가기관이 정자은행 운영에 나서는 건 어떨까.

    국가가 정자은행 운영에 나서야

    세계 최대 정자은행인 
덴마크 크리오스 홈페이지. [크리오스 홈페이지 캡처]

    세계 최대 정자은행인 덴마크 크리오스 홈페이지. [크리오스 홈페이지 캡처]

    이를테면 장교 후보생이나 경찰 간부 후보생 등 젊고 건강한 사람을 통해 정액을 기증받는다면 양질의 정자를 확보할 수 있다. 젊고 건강한 청년들은 정액 검사를 통해 일찍 생식과 관련한 유전적 결함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각종 질환(난임, 불임이 되는 원인)을 조기에 개선·치료할 수 있다. 이는 만혼(晩婚)이 대세인 현실에서 미래를 대비하고 난임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음 같아서는 군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정자 검사를 하고, 지원자에 한해 정자를 기증받자고 주장하고 싶지만 이 또한 쉬운 문제는 아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업 정자은행 중 미국 캘리포니아의 크라이오뱅크(Cryobank)는 외모, 학력, 성적증명서 등 7단계를 거쳐 기증자를 선발한다. 여기서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양인 기증 정자의 인기가 높다. 한국 남성의 DNA가 비혼모를 꿈꾸는 이들이 선망하는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비혼맘을 꿈꾸는 한국 여성들이 국내에서는 정자은행을 이용할 수 없어 외국에 가서 임신을 시도하는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양질의 정자를 확보하는 국가 주도의 정자은행과 사설 정자은행이 있어야 한다. 

    국내에서 정자를 기증하겠다면 건강검진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교통비 정도를 대가로 지급한다. 크라이오뱅크의 경우 검증을 통과한 기증자에게는 1500달러의 수고비를 제공한다. 세계 최대 정자은행인 덴마크 크리오스(CRYOS)도 건강한 DNA를 담은 양질의 정자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 

    혹시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우리에게 종마(種馬) 노릇을 하라는 것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차원 높게 생각해야 한다. 선진국에서도 비혼 남녀의 수가 늘고 있다. 어느 나라든 자국이 인류 절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국가마다 출산율 높이기 위해 ‘비혼맘’에 대한 접근을 달리한다. 남성들도 ‘인구는 곧 국력’이라며 정자 기증을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인다. 

    정자은행까지 필요할까 싶겠지만, 남성불임이 원인이 된 난임 부부에게 정자 기증자가 없어 ‘비배’의 길이 막힌다면 이는 하늘이 무너질 법한 일이다. 입양은 100% 다른 유전자지만 비배로 출산하면 모체 유전자는 계승된다. 역사적으로도 정복으로 민족대이동의 역사를 배워온 선진국 남성들은 비배에 대한 이질감 혹은 선입견이 약한 편이다. 하다못해 유교의 출발지인 중국의 남성들도 ‘혈통 고집’보다는 ‘더 많은 자손’에 초점을 둔다. 

    한 나라에 정자은행이 활성화되지 못하면 정자의 상업적 거래와 불법거래가 성행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세계 최대 정자은행을 보유한 덴마크의 크리오스사가 한국에 100억 원을 투자해 정자은행 설립을 추진했다가 정부 반대에 막혀 무산된 적이 이다. 비배를 기다리는 남성불임(비폐 무정자증) 부부를 떠올리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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