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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워야 더 맛있는 동치미, 우적우적 씹히는 개운한 무맛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차가워야 더 맛있는 동치미, 우적우적 씹히는 개운한 무맛 [김민경 ‘맛 이야기’]

시원한 국물과 담백한 무 맛으로 입맛을 사로잡는 겨울김치 동치미. [GettyImage]

시원한 국물과 담백한 무 맛으로 입맛을 사로잡는 겨울김치 동치미. [GettyImage]

지금은 상상이 잘 안 되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종이로 된 지도를 들고 여행지 취재를 다녔다. 여러 지역 식당을 찾아다닐 때도 종이 지도가 길잡이 구실을 했다. 전국 국도와 지방도가 한 눈에 보이는 커다란 지도, 각 지역별 도로를 확대해 책자로 엮은 것, 이렇게 두 종류를 보며 길을 잡았다. 아침마다 자동차 보닛 위에 지도를 펼쳐 놓고 “오늘은 어디로 갈까. 시간은 얼마나 필요할까” 예측하는 게 그 시절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마치 살아본 적 없는 시대를 보여주는 영화처럼 아련하게 느껴진다.

당시 하루 계획이 중요했던 이유는 해가 진 다음 잘 곳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로 지도를 볼 수 없던 시절, 숙박 어플리케이션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가본 적 없는 길을 이리저리 들쑤시며 다니다 보면 해가 잘도 넘어갔다. 한겨울은 아니었으나 꽤 차갑던 어느 밤, 나와 동행은 적막한 도로 위에 덩그러니 있었다. 차는 움직이는데 새까만 풍경은 도무지 변하지 않고 기름도 간당간당했다. 서로 내색은 안 해도 불안함에 말문이 막혀 있던 우리 앞에 길쭉하게 선 식당 간판이 보였다. 죽을 뻔한 것도 아닌데 “살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두툼 아삭 부들부들한 백김치의 맛

백김치는 두툼하고 아삭한 배추 줄기뿐 아니라 짠 국물이 쭉쭉 배어나는 부들부들한 이파리 끝까지 모두 맛있다. [GettyImage]

백김치는 두툼하고 아삭한 배추 줄기뿐 아니라 짠 국물이 쭉쭉 배어나는 부들부들한 이파리 끝까지 모두 맛있다. [GettyImage]

그날 저녁, 정갈하게 관리한 손길이 느껴지는 작은 옛집에서 메밀국수와 두부를 먹었다. 순메밀국수, 김가루, 통깨, 달걀 반쪽과 동치미국물이 어우러진 음식 대접이 상에 놓이자 국물부터 들이켰다. 잔뜩 웅크렸던 몸이 사르르 풀렸다. 그제야 웃음도, 말도 터졌다. 우리는 뜨끈한 방에 앉아 두 다리를 쭉 뻗고 김장김치에 두부까지 싸서 알뜰히 먹었다. 13년 전 밤에 만난 메밀국수 집은 그 자리 그대로인데, 지금 가면 “어랏, 대로변이잖아” 싶어 역시 아련해진다.

할머니가 계실 때는 겨울마다 관자놀이가 찌릿하도록 차가운 동치미를 맛봤다. 반면 엄마는 한 번도 동치미를 담그지 않으셨다. 메밀국수나 냉면을 동치미국물에 말아주는 식당이 적지 않지만, 요즘도 우적우적 씹어 먹던 시린 무맛이 그립다. 식당에서 반찬처럼 내주는 동치미는 단맛이 세고, 무가 연해 아쉽다. 간혹 총각무로 동치미를 담가 내는 곳에 가면 무의 아작한 맛이 살아 있어 반갑다.

동치미 자리를 대신할만한 걸 꼽자면 백김치로 하겠다. 두툼하고 아삭한 배추 줄기, 짠 국물이 쭉쭉 배어나는 부들부들한 이파리 끝까지 모두 맛있다. 무엇이랑 곁들여도 잘 어울리고,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짭짤한데 달고, 시원한데 깊다. 색이 고와지라고 홍고추, 쪽파, 당근 등을 넣고 만드는 화사한 백김치도 좋지만, 그저 배추만으로 담박한 모양을 낸 것은 그대로 오롯한 맛을 지녔다. 독특한 맛으로 치면 돌산갓으로 담근 백김치를 빼놓을 수 없다. 산뜻하게 톡 쏘아 붙이는 맛과 향은 아무리 시큰둥한 입맛이라도 금세 일으켜 세울 만하다.



통통한 풋고추로 만드는 별미 물김치

아삭한 무청과 시원한 국물이 어우러진 열무김치는 밥반찬으로 일품이다. 국수를 말아 먹어도 맛있다. [GettyImage]

아삭한 무청과 시원한 국물이 어우러진 열무김치는 밥반찬으로 일품이다. 국수를 말아 먹어도 맛있다. [GettyImage]

물김치로 넘어가면 열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여름철 열무물김치가 상에 오르면 오이지도 어쩌지 못한다. 아삭한 무청과 국물을 섞어 밥을 비벼 먹고, 국수도 말아 먹으며 한철을 맛나게 보낼 수 있다. 봄 얼갈이를 열무김치에 넣으면 고소한 이파리가 맛을 돋운다.

초가을까지 나오는 열무와 무, 배추를 섞어 물김치로 만들어도 맛있다. 재빨리 먹어치워야 하지만 상추 물김치도 별미다. 열무김치처럼 붉은 양념 국물을 만들어 상추를 재웠다 먹는다. 연하면서 아삭한 맛이 나며, 시원함도 선사해 고기 먹을 때 곁들이면 잘 어울린다.

오이는 몸통에 칼집을 내고 채소로 속을 채운 뒤 물김치로 담그면 된다. 양념 국물은 열무와 비슷한 걸 쓰되 풀은 넣지 않아도 된다. 오이김치를 토막내 먹으면 보기에도 곱고, 푸짐하며, 물 많고 개운한 맛이 그만이다. 오이와 채소물이 배어나온 김칫국물도 아주 깔끔해 밥에 한 술씩 끼얹어 먹으면 좋다.

통통한 풋고추도 오이처럼 소를 채워 물김치로 만들어 두면 정갈한 밥반찬으로 쓸모 있다. 만들기 쉽기로는 나박김치만한 게 없다. 무와 알배추를 정갈하게 썰어 고춧가루 연하게 풀어 만든 김칫국물에 담근다. 요즘처럼 선선한 때는 실온에서 이틀 정도 익혀 먹으면 된다. 상에 낼 때 오이, 배, 미나리처럼 맛과 향이 좋은 재료를 생생하게 썰어 바로 섞어 먹으면 더 맛있다. 재료를 절이지 않고 만드니 김칫국물에 배추며 무의 맛이 우러난다. 삼삼한 국물은 밥뿐 아니라 떡, 술, 고기 어디에 곁들여도 시원하게 꿀떡꿀떡 잘 넘어간다.



신동아 2021년 11월호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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