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입사…“평론과 대담은 신동아가 단연 압권”
노재봉 “자유민주주의 표방…군사정권과 아슬아슬한 곡예”
선배와 지역 취재 다니고 술잔 기울였던 추억
4·19 세대 취재하며 ‘기사 좀 쓴다’고 인정받아
사회정의 실현 무겁게 생각하는 법 배워
국회의장 이후 베스트셀러 작가의 길
“종군기자의 심정으로 써 내려간 기록”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신동아’ 기자 생활을 하며 사회정의의 실현과 공동체 보전에 대해 날카롭고 무겁게 생각하는 버릇을 길렀다”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입법부 수장을 지낸 정치인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출발선은 ‘신동아’ 기자 생활이었다. 김 전 의장은 1976년 2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신동아 기자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신동아는 창간 9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기록한 ‘기자 김형오’의 시선을 따라갔다.
2013년 1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다룬 책 ‘술탄과 황제’를 출간한다. 사진은 2016년 출간된 개정판. [21세기 북스 제공]
“자네는 ‘신동아’가 어울린다”던 지도교수
- 원래 기자를 꿈꿨나.“석사과정(서울대 외교학과 정치학)을 밟고 있을 때 앞으로 뭘 할지 고민이 많았다. 유학을 꿈꿨으나 가정 형편을 고려하면 쉽지 않았다. 학교를 오가다가 동아일보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본래 자유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기자 일이 잘 맞겠다 싶었다. 당시 지도교수에게 이야기를 하니 ‘자네는 신동아가 어울린다’면서 ‘내가 이야기를 잘 해주겠다’고 하더라. 수습 기간 없이 특채되는 형식으로 신동아에 바로 발령받았다.”
- 동기들의 시샘이 있었을 것 같은데.
“외톨이 비슷하게 됐다(웃음). 고생을 덜한 만큼 재미도 못 느낀 거지. 대신 선배들은 내게 무척 잘해 줬다. 선배들에게 항상 밥과 술을 얻어먹고 다녀 돈 쓸 일이 없었다. ‘동투 사태’ 이후 처음 들어 온 신입 기자이니 얼마나 예뻐 보였겠나.”
김 전 의장이 말한 ‘동투’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일컫는다. 유신 체제가 무르익던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은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외부 간섭 배제와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 연행 거부 등을 뼈대로 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빌미로 광고주에게 압력을 넣어 신문과 잡지 광고란이 공란으로 발행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는다. 이른바 ‘백지 광고’ 사태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 기자들은 해직됐고, 해직 기자들은 1975년 3월 ‘동투’를 결성한다.
김 전 의장은 “돌이켜 보면 ‘동투’에 소속돼 있다가 회사로 복귀한 선배들과 데스크 간의 미묘한 갈등이 느껴지기도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 유신 시절 언론이 처한 상황은 어땠나.
“언론에 숨만 붙어 있는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잡지 역시 정권에 반대하는 내용을 다루기 어려웠다. 신동아 데스크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윗선에서 저어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당시 신동아의 위상은 대단했다. 특히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평론이나 대담 면에서는 단연 압권이었다. 기자가 직접 기사로 쓰기 힘든 상황이니 전문가의 입을 빌려 권력을 비판하려고 했던 것 같다. 데스킹 과정이 골치 아팠을 거다. ‘어 다르고 아 다른’ 뉘앙스를 적절하게 살려서 내보내기 위해 대담자들과 치열한 상의를 거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 기억에 남는 대담이 있었나.
“노재봉 전 국무총리(당시 서울대 사회과학대 교수), 차인석 서울대 명예교수(당시 서울대 인문대 교수)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시대 상황에 대한,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관심을 두고 지켜봤다.”
신동아 편집자문위원을 지낸 노 전 총리는 신동아 2001년 5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편집 과정을 곡예에 비유한 바 있다. 노 전 총리의 말이다.
“내가 (신동아와) 관계했던 기간은 군사정권의 통치기간과 일치한다. 그때 신동아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비판적 종합 월간지였다. 편집은 늘 군사정권과 아슬아슬한 곡예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김 전 의장은 기자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즐거운 기억이었다고 회고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셨던 것 같다. 당시 불문학을 전공한 이준우 부장은 문화예술 분야에 강해서 당대 소설가 미술가들을 다 꿰고 있었다. 이정윤 선배는 정치 기사에 능했다. 퇴근하면 항상 광화문 인근 술집에서 모여 1차, 2차를 하고 통금에 맞춰 ‘총알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운명을 만나다
- 또 떠오르는 일이 있나.“‘신한국지(新韓國志)’ 취재로 지역을 쏘다녔던 일이 떠오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기획인데 아무래도 답답한 사회를 살다 보니 사진부 선배들과 함께 출장 가서 각 지역을 취재하는 일이 재밌었다. ‘4·19 세대의 현주소’ 기사를 써서 처음으로 데스크의 인정을 받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4·19라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그 당사자들이 각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200자 원고지로 350매를 써갔는데 데스크에서 편집 사정상 100매 이상을 줄였다. 당시 40대가 돼 원숙한 젊음을 발산하는 4·19세대에 대한 기록에 정권 차원의 견제가 작동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김 전 의장은 신동아를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은사를 만났다고 회고했다. 고(故) 강영훈 전 국무총리다. 4·19세대에 대한 기사로 ‘기사 좀 쓸 줄 아는 놈’으로 인정받은 김 전 의장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해외에 있는 한국 학자들을 취재해 종합하는 기획이었다.
“나는 미국은커녕 일본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어서 처음에는 데스크에 못 하겠다고 했다. 당시엔 정부 차원에서 정리해 놓은 데이터도 없었다. 결국 유학 갔다가 돌아온 연구자나 교수를 수소문해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미국 남캘리포니아대에서 석·박사를 거친 강 전 총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전화로 3번 정도 연락드려 취재를 했다.”
신동아 1978년 1월호에 실린 ‘해외 한국학자들의 현주소’ 기사는 200자 원고지 150매 분량이다. 정치학·경제학·철학·사회학 등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현재 추세와 이를 공부하는 한국 연구자들이 쓴 논문까지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당시 이 기사는 일본 잡지에도 소개될 정도로 조명을 받았다. 기사 출고 이후 이번에는 반대로 강 전 총리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강 전 총리가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막 부임한 때였다. 소속된 연구자들은 평소 논문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연구 보고서를 아주 길게 써 왔는데,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유롭지 못한 언론 환경에 답답함을 느끼며 지쳐 있을 때라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후 그는 외교안보연구원을 거쳐 국무총리실·청와대에서 정무비서관직을 수행했고, 1992년에 처음 국회의원이 돼 5선 의원이 됐다. 보수정당에 몸담으면서도 진영을 가리지 않는 쓴소리로 ‘원칙주의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 전 의장은 기자로서의 경험이 정치를 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권리를 누리면서도 이에 따라 부담해야 하는 책임을 동시에 생각하려고 했다. 사회정의 실현과 공동체 보전에 대해 날카롭고 무겁게 생각하는 버릇을 기른 게 공직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됐다.”
[조영철 기자]
이스탄불에서도 통한 ‘현장에 답이 있다’
그가 다시 펜을 쥔 것은 국회의원에서 물러난 이후다. 2009년 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직을 수행하며 터키 이스탄불 군사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 2세와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격돌한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야기를 듣고 매료된다. 거대한 제국을 이끄는 두 리더의 고뇌가 김 전 의장의 마음을 울렸다.- 정치인에서 역사 저술가로 변신했다.
“세계사 시간에 한 줄 정도 나올까 말까 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군사 박물관에서 설명을 들으며 완전히 빠져버렸다. 책을 쓰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정치를 그만둬야 했기에 고민이 컸다. 지역구에서는 다음 총선에도 출마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후배 정치인에게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기도 했다. 국회의원들은 대개 정치 현장이 전부인 것처럼 매달려 살기 때문에 상대방을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대화나 타협의 존재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얼터너티브 라이프(Alternative Life), 그러니까 정치 후에도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후배 정치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김 전 의장은 2013년 1월 책 ‘술탄과 황제’를 내놓는다.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1453년 5월 29일부터 54일간의 상황을 살아 숨 쉬듯 재현해 낸 이 책은 당시 큰 호평을 받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 책에 나와 있는 역사 현장에 대한 고증이 치밀하다.
“나는 여태 동양 문화권에서만 살았고 라틴어나 터키어에 능통한 것도 아니다. 영어 조금 하는 게 고작이다. 전문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터키 현지에 있는 교수·연구자를 모두 서른 명 가까이 만났다.”
- 신동아 기자 시절 ‘해외 한국학자들의 현주소’를 쓸 때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게 출발이라고 했다.
“그렇게 엮을 수도 있겠네(웃음). 인터뷰도 치열하게 준비했다. 국내외에서 출간된 책 수백 권을 모조리 읽고 상세하게 질문을 던졌다. 가령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전쟁에 사용된 말은 몇 필이었나’ ‘텐트의 색깔은 무엇이었나’라고 물었다. 상대방도 흥미롭게 생각하더라. 상황을 바꿔보면 서양의 정치인이 국내 역사 전문가에게 이순신 장군에 대해 상세히 묻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는 책 서문에 “종군기자가 된 심정으로 써 내려간 54일간의 기록”이라고 썼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기자들 사이의 명구를 되새겼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다 합치면 6개월가량 이스탄불에 머물렀다. 인터뷰를 듣고 관련 자료를 읽은 뒤에는 실제 전투가 치러진 삼중 성벽을 계속 걸었다. 그 공기를 들이마시며 머릿속에서 모든 걸 종합하는 과정이었다. 그게 책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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