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위 운영 전자복권, 불법 도박에 악용돼
당첨 예측해 준다며 가족방 초대해 가상화폐 충전 권유
400명 있는 채팅방, 24시간 쉼 없이 베팅 유도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는 한도 없이 베팅 가능
“불법 사이트 ‘먹튀’ 피해 생길 우려”
제도 공백으로 정보 제공 업체 처벌 어려워
사감위, 복권위에 “폐해 심각해 파워볼 폐지” 공문
복권위 “폐지하면 건전한 유저들 피해” 반대
복권위원회가 운영하는 ‘파워볼’을 악용해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유튜브에서 파워볼을 검색하면 실시간 파워볼 중계 채널로 화면이 가득 찬다.
“파워볼 1차 500출(충전), 6800성공. 2차 700출 현8600성공.”
10월 8일 금요일 밤, 3000명 넘는 시청자가 한 유튜브 채널을 통해 ‘파워볼’ 방송을 보고 있었다. 화면 한쪽에서는 실시간으로 파워볼 추첨 결과가 보였다.
파워볼은 기획재정부 산하 복권위원회(복권위)가 발행하는 전자복권 이름이다. 복권위 수탁사업자 ‘동행복권’ 사이트에서 구매할 수 있다. 게임 방법은 간단하다. 숫자가 적힌 일반공 28개, 보너스공 9개가 있다. 5분 단위로 일반공 가운데 5개, 보너스공 가운데 1개를 뽑는다. 거기 적힌 숫자를 다 맞히면 1등 당첨이다. 회당 상금은 3000만 원이지만, 당첨자가 없으면 계속 누적돼 최다 3억 원까지 늘어난다.
추첨 공에 적힌 숫자를 다 더한 값이 홀수일지 짝수일지, 대(81~130)·중(65~80)·소(15~64) 가운데 어느 구간에 속할지 등을 맞히는 ‘숫자합 게임’도 있다. 파워볼은 빠른 속도로 여러 종류 게임을 즐길 수 있어 복권 이용자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문제는 이를 악용해 불법 사설 도박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업자’가 판을 친다는 점이다.
유튜브 검색창에 파워볼을 입력하면 관련 영상이 줄줄이 노출된다. 절대 다수가 ‘파워볼 실시간’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다. 기자가 유튜브 방송을 시청한 시간대엔 파워볼 추첨 결과를 생중계하는 채널이 90여 개에 달했다. 그 가운데 무엇을 보든 내용은 비슷하다. 진행자(스트리머)가 나와 “파워볼 추첨 결과를 예측해 큰돈을 벌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면서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링크를 제공한다.
파워볼 예측 정보 준다며 ‘가족방’ 가입 유혹
서두에 언급한 스트리머가 제공한 링크를 클릭해 봤다. 그곳에는 “‘가족방’에 가입하면 다음에 무슨 공이 뽑힐지 예측한 정보를 알려준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있었다. 기자가 채팅방 운영자에게 “가족방에 들어가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상대는 “가족방은 회원 모두 수익을 보는 방이다. 전문 ‘픽스터’가 24시간 쉬지 않고 적중하는 ‘픽(공 배합)’ 정보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이때 ‘픽스터’는 ‘예측번호 정보 제공자’를 뜻하는 업계 용어다.이어 상대방은 기자에게 “가족방 가입비는 따로 없다. 단 거기 들어오려면 먼저 이 사이트에 가입해야 한다”며 또 하나의 링크를 보냈다. 들어가 보니 가상화폐를 기반으로 운영하는 사설 도박 사이트였다.
그곳에서 게임을 즐기려는 사람은 현금으로 해당 사이트에서 통용되는 가상화폐를 충전해야 한다. 그것을 판돈으로 걸고 ‘가족방 픽스터’가 제공하는 정보를 참고해 숫자 6개를 고른다. 그 결과가 파워볼 추첨 내역과 일치하면 당첨금을 가상화폐로 받는다. 이 돈은 일정 규모가 되면 현금으로 환전할 수 있다.
정리해 보자. 파워볼은 정부 수탁사업자가 운영하는 공식 복권이다. 판매 수익금 일부는 불우이웃 돕기 등 공익 목적으로 쓰이고, 당첨자는 본인 명의 계좌로 당첨금을 받는다. 사설 도박 사이트는 다르다. 당첨자 선정 기준이 ‘파워볼 번호’라는 걸 제외하면,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불투명하다. 게다가 정부가 공인하지 않은 사이트에서 도박을 하는 건 명백한 불법이다.
기자가 불법 도박 정보 공유 커뮤니티 ‘가족방’ 운영자와 나눈 대화 내용. 본문의 ‘픽스터’는 파워볼 게임에서 무슨 공이 나올지 예측해 주는 사람을 말한다.
스트리머, 가족방 그리고 불법 도박 사이트
물론 가족방 가입자는 픽스터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공식 파워볼 게임을 할 수도 있다. 단, 이 경우 베팅 가능 금액이 인당 하루 최대 10만 원이다. 불법 도박 사이트는 누구나 무한대로 돈을 걸고, 당첨되면 막대한 수익을 챙길 수 있는 구조라 후자의 유혹이 클 수밖에 없다.기자는 해당 사이트 운영 방식을 알아보고자 회원 가입 절차를 진행했다. 몇 가지 정보를 입력하니 곧 회원이 됐다. 운영자는 “1주일 안에 가상화폐를 충전하지 않으면 ‘강퇴’된다”며 닉네임 뒤에 ‘인턴’이라는 말을 덧붙이라고 안내했다. 이어 가족방에 들어갈 수 있는 링크를 보내줬다.
가족방에는 400명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 이 가운데 실제로 사설 도박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이 몇 명이고 베팅을 유도하기 위한 ‘바람잡이’가 몇 명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오픈 채팅방은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알람을 울려댔다. 픽스터는 “000회차 일짝(일반볼 짝수) 000회차 일홀(일반볼 홀수)” 등의 내용으로 5분마다 예측 정보를 올렸다. 파워볼 추첨 시간이 다가오면 사용자들은 “ㄷㄱㄷㄱㄷㄱㄷㄱ(두근두근)”을 연타했다. 결과가 나온 뒤엔 “ㅅㅅㅅㅅ(나이스샷·잘했다)”라는 글을 올리며 ‘당첨의 기쁨’을 표현하는 이도 있었다. 운영자는 “호응을 열심히 하면 ‘직급’이 오른다”고 안내했다.
가족방 회원 직급은 기자 같은 ‘인턴’부터 ‘사원’ ‘대리’를 거쳐 최고 ‘회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일부 이용자 닉네임 뒤에는 ‘VIP’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알파벳 ‘V’가 붙어 있었다. 공지 사항에는 가상화폐를 많이 충전하면 직급이 올라간다는 내용도 있었다.
가족방 운영자들은 직급에 따라 회원을 다르게 대우했다. 가령 인턴 직급인 기자는 닉네임으로 부르면서 사장 직급을 달고 있는 회원은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가족방은 매달 가상화폐로 월급을 지급하는데 그 액수도 직급에 따라 달라졌다. 가족방에 지인을 많이 데리고 오는 사람에겐 백화점상품권과 외식상품권을 제공하고 승진을 시켜준다는 공지도 있었다.
“‘파워볼 추첨 결과 예측’ 주장은 모두 사기”
이 가족방에 들어가려고 가입한 불법 도박 사이트는 파워볼 말고도 수십 개의 게임을 더 운영하고 있었다. 스포츠 경기 결과를 예측해 돈을 받는 사설 ‘토토’ 등이 눈에 띄었다. 해당 사이트 ‘금주의 출금’ 코너에는 도박 수익을 2000만 원 이상 올려 현금으로 찾아갔다는 이용자 이름이 10명 넘게 올라와 있었다. 게임으로 돈을 따면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 같았다.기자는 한 사설 도박 사이트 운영자에게 기자 신분을 밝히고 사업 방식에 대해 질의했다. 취재는 텔레그램으로 진행했다. 그는 익명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털어놨다. 먼저 진행자인 스트리머의 정체에 대해 “99%가 총판(사설 도박 사이트 회원 모집책)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스트리머는 자신이 파워볼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고 과시해 시청자가 특정 도박 사이트에 가입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한다“며 “그들은 가족방 신규 가입자 수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는다”고 말했다. 가족방에 대해서는 “사이트마다 운영 방식과 수익창출 방식이 달라 쉽게 일반화할 수 없다. 다만 대다수 가족방 운영자가 (불법) 도박 사이트와 연계돼 있는 건 확실하다. 그들은 가족방 회원이 특정 사이트에서 가상화폐를 충전한 액수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아 간다”고 설명했다.
이 운영자는 “사설 도박 사이트 대다수는 ‘먹튀’(당첨금이나 예치금을 들고 잠적하는 행위) 위험이 있다”고도 털어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도박 사이트 운영 자체가 불법이다. 보통 서버를 해외에 두고 있어 문제가 생겨도 수사나 처벌이 쉽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러한 인터넷 불법 도박 사이트로 인한 시민 피해는 최근 계속 커지고 있다. 동행복권 동행클린센터(센터)에 접수된 관련 불법행위 신고 건수는 2018년 336건에서 2020년 2327건으로 2년 새 7배 증가했다. 센터가 적발한 불법행위도 같은 기간 1862건에서 8146건으로 5배 넘게 늘었다.
올 6월에는 경기북부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가 불법적으로 파워볼 사이트를 운영한 사기범들을 검거했다. 이들은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 파워볼 등의 결괏값을 예측한다”며 고수익을 미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다. 이곳에서 현금을 가상화폐로 환전했다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는 171명, 피해액은 60억 원에 달했다. 동행복권 관계자는 “파워볼 게임에서 특정 공이 뽑힐 확률을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모든 공이 뽑힐 확률은 똑같다. 특정 규칙을 찾아내 다음에 추출될 공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감위 “폐지하자” vs 복권위 “건전 유저들 피해 우려”
현행법에 파워볼 정보 제공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는 점을 악용해 ‘합법’임을 홍보하는 웹사이트. [웹사이트 캡처]
문제는 파워볼에서 파생한 도박 사업의 불법성과 단속에 대해 정부 부처 간 의견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신동아’ 취재 결과, 불법 사행성 도박을 규제하는 국무총리실 산하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사감위)는 9월 파워볼을 운영하는 기재부 산하 복권위에 파워볼 폐지를 건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파워볼로 국가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많지 않은 반면, 폐해는 크게 발생하고 있으니 폐지하자”는 게 골자였다. 사감위 관계자는 “아직 기재부 답변은 오지 않았다. 회신 기한이 석 달이라 답을 기다리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로서 복권위가 파워볼을 폐지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신동아’가 복권위 관계자에게 사감위 제안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파워볼에서 파생된 불법 사행 도박 사업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하지만 파워볼을 폐지하면 해당 게임을 건전하게 즐기는 이용자에게 피해가 갈 수 있지 않나”라며 “현재 파워볼 폐지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복권 운영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발생하면 그것을 단속해야 한다”는 게 이 관계자 의견이다. 이어 “사감위의 요청 공문에도 비슷한 취지의 답변을 보낼 예정이며, 그와 별도로 파워볼 정보 제공자를 처벌하기 위해 법안 마련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문가들은 “최근 전자도박 중독자가 크게 늘고 있다”며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도박치료 전문가인 최삼욱 진심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의 얘기다.
“몇 년 전부터 인터넷 도박에 중독돼 치료받으러 오는 젊은 사람이 많아졌다. 파워볼을 비롯한 전자 도박 폐해가 심각하다. 파워볼처럼 결과가 5분마다 나오는 게임은 뇌의 도파민 분비를 활성화한다. 그 결과 1주일에 한 번 추첨하는 로또보다 중독성이 높아진다. 도박중독자들은 현실을 왜곡해 받아들이는 이른바 ‘인지적 왜곡’ 증상을 겪는다. 파워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것부터가 도박 중독 증세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개선하려면 약물로 충동을 억제하는 동시에 환자가 도박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분리하는 조치를 병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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