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향긋, 산뜻, 아삭, 콤콤…김치보다 맛있는 김치요리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1-10-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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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을 할 때 절인 배추를 김치 양념에 무쳐 먹으면 첫맛은 매콤하고, 아삭아삭 씹을수록 달고 짜며, 삼키고 나면 감칠맛이 남는다. [GettyImage]

    김장을 할 때 절인 배추를 김치 양념에 무쳐 먹으면 첫맛은 매콤하고, 아삭아삭 씹을수록 달고 짜며, 삼키고 나면 감칠맛이 남는다. [GettyImage]

    엄마에게 김장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통배추가 우리집에 들어오는 날부터 이틀 정도는 모두 조심해야 했다. 발코니와 부엌에는 되도록 얼씬 말고 먼지를 일으키는 행동은 금물이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머리를 질끈 묶고 부엌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을 했다. “저거 가져와라” “이 뚜껑 열어라” “두 숟가락 넣어라” 같은 자잘한 심부름을 하다 보면 드디어 “간 좀 봐라”라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온다. 엄마는 배추 속의 노랗고 작은 잎 부분을 툭 뜯어 새빨간 양념을 한 번 더 묻힌 다음 잘 접어 내 입에 쏙 넣어주셨다.

    채 어우러지지 않아 저마다의 향긋함, 산뜻함, 아삭함, 콤콤함이 살아 있는 김치 양념에 무쳐 먹는 절인 배추의 맛! 첫맛은 매콤하고, 아삭아삭 씹을수록 달고 짜며 삼키고 나면 감칠맛이 남는다. 지금 필요한 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밥! 엄마는 커다란 그릇에 생김치를 수북하게 덜어 놓고, 나머지는 김치 통에 차곡차곡 담아 김장을 마친다. 그 다음엔 나랑 마주 앉아 뜨거운 밥에 펄펄 살아 있는 생김치 한쪽씩 얹어 가며 오순도순 밥그릇을 비웠다. 1년에 딱 한 번씩 즐긴 엄마와 나의 특별한 만찬이다.




    참기름, 깨소금으로 무친 신김치에 멸치국물 듬뿍

    큰 그릇에 가늘게 썬 묵과, 김치, 오이를 소복하게 담고 멸치국물을 부은 뒤 김과 통깨를 솔솔 뿌려 먹는 묵국수. [GettyImage]

    큰 그릇에 가늘게 썬 묵과, 김치, 오이를 소복하게 담고 멸치국물을 부은 뒤 김과 통깨를 솔솔 뿌려 먹는 묵국수. [GettyImage]

    나는 김장하는 날이 지나고 나면 김치에 손을 대지 않았다. 찐고구마를 먹을 때나 한두 입 목마름을 달래려 겨우 먹었다. 대신 엄마가 묵은 김치로 만들어주는 요리는 뭐든 잘 먹었다. 아빠와 오빠가 잘 익은 김장김치를 먹는 동안 나는 묵은 김치 통을 비워내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돼지고기, 고등어, 통조림 꽁치나 참치 등 무엇이든 넣고 김치찌개를 끓여 두면 몇 끼든 질리지 않고 먹었다. 씻은 김치에 다진 파와 설탕,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친 것, 비슷한 양념으로 달달 볶은 것도 밥에 올려 반쯤 비벼 먹는 걸 즐겼다.

    엄마는 신김치를 입에 잘 대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나랑 같이 맛있게 드시는 게 있었다. 묵국수다. 묵이 부서지지 않도록 살살 달래가며 막대처럼 가늘고 길게 썰고, 김치는 잘게 썬다. 이때 씹는 맛이 좋은 배추 줄기 부분을 많이 넣어야 맛있다. 오이를 가늘게 채 썰어 넣으면 씹는 맛을 더한다. 김치는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어 무친다. 구운 김은 잘게 부순다. 멸치를 가득 넣고 국물을 낸다. 대접에 묵, 무친 김치, 오이를 소복하게 담고 멸치국물을 붓고 김과 통깨를 솔솔 뿌려 먹는다. 내 그릇에는 김치가 듬뿍, 엄마 그릇에는 묵이 듬뿍 담긴 게 다를 뿐 둘 다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시원하게 먹어치우기 일쑤였다.



    겨울철 주말에는 김치전이 단골이다. 들기름에 부칠 때도 있고, 해물과 땡초를 잘게 썰어 넣기도 하고, 조선호박이나 늙은호박살을 채 썰어 넣고 굽기도 했다. 어느 날은 큼직하고, 어느 날은 손바닥만 했다. 넙대대한 김치전은 부드럽고 촉촉해 좋다. 자그마한 김치전은 가장자리 바삭한 부분이 많아 맛있다.

    지금도 나는 생김치가 가장 맛있고, 익은 김치는 그 자체보다 요리로 먹기를 좋아한다. 집에서는 김치찌개보다 찜을 자주 한다. 엄마의 김치찌개는 특별한 재료 없이도 찜처럼 깊고 진한 맛이 나는데, 내가 만든 김치찌개는 꼭 매운 배추찌개처럼 심심하고 잡스러운 맛이 난다. 그나마 돼지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배추 8분의 1쪽 짜리를 두어 덩어리 넣고 푹 끓이면 좀 낫다. 재료를 넉넉히 쓰고, 시간을 들이면 좋은 맛에 얼추 가까워진다.


    잘게 썬 김치 달달 볶아 조물조물 주먹밥

    김치를 넣고 돌돌 싸먹는 김밥은 신김치로 만들 수 있는 별미다. [GettyImage]

    김치를 넣고 돌돌 싸먹는 김밥은 신김치로 만들 수 있는 별미다. [GettyImage]

    신김치는 밥반찬 만들기에 좋은 재료인 만큼 밥과 같이 요리하면 딱이다.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다진 마늘, 간장, 후춧가루로 살짝 밑간을 한다. 돼지고기가 없으면 햄을 잘게 썰어 활용한다. 신김치는 속을 대강 털어내고 잘게 썰어 둔다. 냄비에 기름을 조금만 두르고 돼지고기(햄)와 김치를 넣어 볶는다. 물을 바닥에 살짝 고일만큼 붓고 찬밥을 펼쳐 올린다. 그 위에 콩나물을 얹고 뚜껑을 덮어 익힌다. 콩나물 숨이 폭 죽으면 불을 끄고 위아래를 잘 섞어 먹는다. 양념간장이 있으면 조금 넣어도 좋고, 김자반을 뿌려 섞거나, 맨 김에 볶음밥을 싸서 간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다. 콩나물과 함께 곱게 썬 무 채, 팽이버섯을 넣어도 잘 어울린다.

    잘게 썬 김치를 베이컨, 양파와 함께 물기 없이 달달 볶아 밥에 넣고 조물조물 뭉쳐 주먹밥을 만들어도 된다. 조금 더 부지런을 떨자면 김치 줄기 부분을 볶고, 남은 잎은 양념을 씻어 물기를 꽉 짠다. 거기 밥을 넣고 쌈밥처럼 만든다.

    신김치를 넣고 돌돌 말아 싸 먹는 김밥도 별미다. 참치와 깻잎을 넣으면 맛있고, 잔멸치와 매운 고추로 조합을 맞춰도 된다.

    먹성 좋은 이란성 쌍둥이를 키우는 내 친구가 이맘 때 캠핑 가면 하는 요리가 있다. 김치와 햄, 또는 김치와 작게 썬 오징어를 프라이팬에 넣고 달달 볶는다. 햄이나 오징어가 익을 때쯤 자장라면의 가루 수프를 넣고 볶는다. 뻑뻑하면 물을 조금 넣어 걸쭉하게 만든다. 면을 삶아 각자 그릇에 나눠 담고 자장김치소스를 끼얹고, 달걀프라이로 예쁘게 덮어 완성한다. 어른 그릇에는 고춧가루를 솔솔 뿌린다. 먹어보지 않았지만 절반 이상은 아는 맛이라 군침이 절로 돈다.
    문제는 우리집에 신김치가 똑 떨어졌다는 것. 아무리 맛난 김치를 얻어 와도 제대로 보관할 줄 모르는 내 솜씨 탓에 늘 김치가 궁핍하다. 김장 전에 신김치 수거하러 시댁과 친정을 한 바퀴 빙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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