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이 바꾼 할로윈 관점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오는 축제
가톨릭계 이민자와 함께 美에 정착
‘어른들의 할로윈’ 어쩌다 탄생했나?
1996년作 호러 영화 ‘스크림’ 후폭풍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문화 포용해야
할로윈 데이를 나흘 앞둔 10월 27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카페거리 노점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가면이 할로윈 소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뉴스1]
그런데 올해는 양상이 다르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때문이다. 예년 같으면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국적 불명의, 혹은 미국식 가짜 명절에 대한 성토가 터져 나오게 마련이지만, 올해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흔히 눈에 보인다. ‘미국인들이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오징어 게임’ 추리닝을 입고 있다’, ‘유럽인들이 딱지치기를 하고 달고나를 먹으며 할로윈을 즐긴다.’
지난해까지는 외래문화가 맥락 없이 들어오는 창문이었던 할로윈이, 어느새 한국 문화가 해외로 뻗어나가는 수출 경로가 되고 만 셈이다. 그렇다보니 올해는 특이하게도 연례행사와도 같았던 할로윈 비판이 많지 않고 그 수위도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아직 30대인 필자 입에서조차 ‘오래 살고 볼 일’ 같은 말이 절로 나오는 희한한 2021년이다.
할로윈이라는 ‘명절 아닌 명절’이 국내에서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후 처음으로 새로운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만큼, 이 기회에 다양한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다. 할로윈이라는 특이한 명절의 유래는 무엇일까? 왜 오늘날 할로윈은 죽은 이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의 캐릭터를 따라하는 날이 돼버린 것일까?
중세 유럽 켈트족에서 멕시코까지
중세 유럽의 켈트족은 한 해를 여름과 겨울 두 개의 계절로 나누었다. 생명이 약동하고 번창하는 여름이 끝나면 죽음이 돌아오는 겨울이 시작된다.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오는 것, 그 축제를 서우인(Samhain)이라 불렀다. 10월 31일 밤부터 11월 1일까지 이어지는 그 축제는 여름의 끝과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며, 동시에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성대한 축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유럽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켈트족 역시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다. 기원후 43년 대부분의 켈트족이 로마에 무릎을 꿇었다. 그 결과 서우인에도 로마의 색체가 가미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대부분 비슷했던 모양인지, 로마인들은 매년 10월이 끝나갈 무렵 죽은 조상을 추모하는 페랄리아(Feralia)라는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날짜와 주제가 비슷한 탓에 두 축제는 서서히 하나가 되어갔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갔다. 로마의 유산과 제도 등이 무너진 가운데 그나마 문명의 잔해를 유지하고 있던 곳이 바로 교회였다. 모든 문화와 풍습에 기독교의 영향이 가미됐고, 서우인 역시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중세 유럽에 남아있던 축제는 서우인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전통 축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중세를 지배하던 가톨릭교회는 그런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즐기는 축제지만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고대 종교의 세계관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교도’의 전통에 따라 먹고 놀고 마시다보면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에서 벗어나 야만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 8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는 기존에 5월 13일로 정해져 있던 ‘모든 성일 대축일’의 날짜를 11월 1일로 옮겼다. 서우인 또는 서우인과 비슷한 다양한 토착 축제를 갑자기 없애버리면 민심이 동요하고 거부할 수 있으니, 사람들이 모여 노는 날짜는 그대로 두되 그 위에 기독교적인 맥락을 추가하여 ‘덮어씌우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략은 효과적으로 통했다. 11월 1일 모든 성일 대축일은 지금도 가톨릭교회의 중요 행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가톨릭의 교세가 강한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라틴 문화권에서 11월 1일은 상당히 비중 있는 명절이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0월 31일에는 세상을 떠난 모든 가족과 친지를 추모하는 시간을 갖는다. 11월 1일은 아침부터 성당에서 모든 성인을 위한 미사를 드리며 어젯밤을 뒤덮었던 죽음에 대한 상념과 묵상으로부터 벗어난다. 11월 2일은 그 행사의 마지막 날인 위령의 날이다.
특히 멕시코는 10월 31일을 ‘망자의 날’로 특별히 취급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아즈텍 문명의 명절과도 관련이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공교롭게도 할로윈과 같은 날에, 같은 주제로 축제를 벌여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축제는 우리가 아는,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진 할로윈과 사뭇 다르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2018)에서 묘사하고 있다시피 진지하게 죽음을 고찰하고 망자를 그리워하면서도 떠나보내는 그런 날이다.
‘어른의 축제’가 된 비밀을 풀다
10월 25일 ‘오징어 게임’ 복장을 하고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을 찾은 야구팬들의 모습. [뉴스1]
영어권에서 만들어진 문헌 중 대중적으로 입수 가능한 것들을 뒤져봐도, 어째서 가톨릭 계열의 축제가 개신교 국가에 뿌리 내릴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정교하게 설명한 것은 찾기 어렵다. 아무튼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가톨릭 계열 이민자들이 미국에 건너와 정착하면서 할로윈, 혹은 망자의 날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요즘은 영어 유치원이 아니라 그냥 유치원에서도 ‘트릭 오어 트리트(trick-or-treat)’를 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스켈레톤이나 마녀 같은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탕을 받는 그 행사 말이다. 그것이 미국에서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19세기 중반에 유입된 할로윈의 풍습이 20세기 초, 1920년대부터 미국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의 일이다.
아이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고 사탕을 받는 귀여운 행사가 된 할로윈은 ‘로컬 커뮤니티’를 중시하는 현대 미국인들의 감성과 딱 맞아 떨어졌다. 그 기원과 유래에 대한 특별한 고민 없이 두루 즐기는 새로운 유형의 명절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게 되어버린, 말하자면 ‘어린이용 할로윈’이 탄생한 과정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할로윈’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걸까? 필자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조사를 해봤다. 한국어 문헌 뿐 아니라 영어 문헌도 열심히 뒤졌다. 하지만 그럴듯한 설명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 대목부터는 약간의 ‘뇌피셜’을 가미해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할로윈이 ‘어른들의 축제’가 된 것은 두 번의 변곡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존 카펜터 감독의 1978년 영화 ‘할로윈’의 성공이 그 첫 번째다. 여섯 살에 친누나를 살해한 정신이상자가 고향에 돌아와 살인극을 벌인다는 내용의 호러 무비다. 이후 ‘할로윈’ 시리즈 뿐 아니라 비슷한 콘셉트의 할로윈 시즌 호러 무비를 낳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할로윈을 어린이들의 동심 축제에서 어른용 호러 축제로 바꾼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96년,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영화 ‘스크림’의 등장은 특히 주목받는 사건이다. 독자 여러분 중에는 ‘스크림’을 안 본 분이 더러 계실 텐데, 그렇더라도 ‘스크림 마스크’는 보셨을 것이다.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눈코입이 뚫려 있고, 대단히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는 그 마스크 말이다. 그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변조한 목소리로 음산하게 ‘헬로, 시드니’라고 희생자를 부르고 무참히 난자해서 죽이는 호러 영화. 대중은 그 이야기에, 마스크에 열광했다.
그 ‘근본 없음(?)’이 우리의 힘!
지난 9월 24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에 마련된 ‘오징어 게임’ 팝업 체험존 ‘오겜월드’가 시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뉴스1]
앞서도 말했듯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지식과 체험에 기반하고 있다. 100% 확인된 사실이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하지만 대체 왜 매년 서울 이태원이나 홍대 근처에는 10월 마지막 주말만 되면 흡혈귀도 아니고 살인마도 아닌 마블 캐릭터 의상을 입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등장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즐기는 할로윈은 ‘근본 없는(?)’ 축제다. 그 뿌리는 고대 켈트족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미국에 기원을 둔 대중문화의 축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일일까? 망자를 그리는 엄숙한 종교적 행사에서, 아이들이 사탕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날이 되었다가, 어른들도 딱딱한 사회적 가면을 내려놓고 대중문화 흥행작을 흉내 내며 즐기는 날이 된 그 변화 과정을 굳이 비판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그런 ‘근본 없음’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2021년 할로윈은 분명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만든 문화 콘텐츠인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 할로윈 파티 테마로 떠오른 즐거운 현상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할로윈의 ‘근본 없음’ 때문이니 말이다.
이 글을 ‘국뽕’으로 끝낼 수도 있지만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화두를 더 던져보고 싶다. 매년 언론은 안중근 의사의 거사도, 순국도 아닌 ‘사형선고일’을 들먹이며 밸런타인데이를 구박한다. 11월 11일이 ‘빼빼로 데이’라는 걸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래떡 데이’부터 온갖 길쭉한 음식을 갖다 붙이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할로윈의 ‘근본 없음’이 결국 우리의 힘으로 돌아왔다면, 다른 ‘국적 불명 기념일’에 대해서도 너무 ‘빡빡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단일민족과 순수혈통의 환상을 벗어던지고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문화와 섞여 들어갈 때, 우리는 더 강하면서 풍요롭고 즐거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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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