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1월 동아일보 사장이자 신동아 발행인이던 송진우의 신동아 창간사.
잡지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발행 당시의 시대 상황이 담긴 정신적 산물이면서 독자를 상대로 판매하는 상품이다. 사상의 흐름,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요건이 결집된 총화가 잡지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무게 있는 주제를 다루는 정기간행물은 물론이고, 취미 오락 위주의 가벼운 읽을거리 잡지도 모두 한 시대의 모습을 기록한 유물로 남는다.
민족의 공기(公器) 표방 망라주의 편집
신동아는 군국주의 일본이 침략전쟁을 확산하던 식민지 시기에 태어나서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을 표방하면서 잡지 저널리즘의 선두주자로 달려왔다. 일제는 1931년 9월 18일 만철선(滿鐵線) 폭파사건을 조작해 만주에 기습공격을 감행하면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신동아는 만주사변 직후인 11월에 창간됐으나 5년의 길지 않은 수명으로 1936년 8월에 폐간됐다. 일제가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대륙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1941)이라는 무모한 확전으로 치닫는 광기 서린 먹구름이 다가오던 시기였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세계는 점차 전쟁의 위협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이 고조되고 있었다.신동아는 창간의 취지를 이렇게 천명했다.
“조선민족은 바야흐로 대각성, 대단결, 대활동의 효두(曉頭·먼동이 트기 전의 이른 새벽)에 섰다”면서 조선민족이 크게 각성하고 단결해 활동할 “사상적 대온양(大醞釀·마음속에 어떠한 생각을 은근히 품고 있음)은 민족이 포함한 특색 있는 모든 사상가, 경륜의 의견을 민족 대중 앞에 제시하여 활발하게 비판하고 흡수케 함에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러한 속에서 민족 다중이 공인하는 가장 유력한 민족적 경륜이 발생되는 것이니 월간 신동아의 사명은 정(正)히 이곳에 있는 것이다. 신동아는 조선민족 전도(前途)의 대경륜을 제시하는 전람회요, 토의장이요, 온양소이다. 그러므로 신동아는 어느 일당 일파의 선전기관이 아니다. 하물며 어느 일개인 또는 수개인의 전유(專有) 기관이 아니다. 명실이 다 같은 조선민족의 공기(公器)다.”
민족의 공기로서 신문과는 다른 차원에서 경륜을 펴는 잡지를 지향하겠다는 다짐이다. 구체적인 편집 방침은 ‘망라주의’였다. 신동아 편집을 주관했던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 설의식(필명 小梧)은 편집후기에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문예 등 각 방면을 망라해 “우리의 지식과 문견을 넓히고 실익과 취미를 도울 만한 것이면 모두 다 취하기로”하는 것이 망라주의라고 밝혔다. 신동아 90년 역사에서 기록에 남을 만한 발자취를 분야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학술적 내용을 대중과 연계
일제강점기에 신동아를 편집한 기자들은 대부분 후에 학자 또는 문인으로 대성했다. 신문사 소속 최초의 잡지부장인 주요섭(朱耀燮·1902~1972)은 중국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졸업 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도 공부한 언론인이면서 문인이자 학자였다. 주요섭의 후임 잡지부장 최승만(崔承萬·1897~1984)은 미국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대 졸업. 연희대 교수(1948~1951), 제주도지사(1951~1953), 제주대학장(1952~1953), 이화여자대 부총장(1954~1956), 인하공과대학장(1956~1961)을 역임한다. 고형곤(高亨坤·1906~2004)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1947∼1959), 전북대 총장,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한다. 시조시인 이은상(李殷相·1903~1982)도 신동아 기자였다.신동아에는 이처럼 최고 수준의 지식인들이 편집진으로 참여했기에 당시의 대중잡지와는 달리 학술적인 글이 많았다. 학술지가 존립하기 어려운 시기에 신동아는 자연히 학술지의 성격을 지니게 됐다. 창간 2주년이던 1933년 11월 11일 학술 대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 조선쌀은 어디로(盧東奎, 연희전문 교수)
* 조선경제사의 방법론(白南雲, 연희전문 교수)
* 예술의 근본문제와 조선문단(梁柱東, 숭실전문 교수)
강연 내용은 12월호에 게재됐다. 신동아에는 학술적인 글과 함께 ‘망라주의’ 편집 방침에 따라 다양한 읽을거리도 실렸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폐간됐다.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1936년 8월 25일 조간에 게재했는데, 총독부는 이를 이유로 8월 27일 정간 처분을 내렸다. 같은 때에 발행된 신동아 9월호는 화보에 손기정의 상반신을 확대한 사진을 실어서 아예 일장기 삭제 여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자매지 ‘신가정’(현재 ‘여성동아’)도 함께 정간당했다. 동아일보는 해가 바뀐 1937년 6월 3일자로 279일 만에 속간했으나 신동아와 ‘신가정’은 일제강점기에는 더는 발행되지 못했다.
광복 후 19년, 폐간 뒤 28년의 세월 동안 죽어 있던 신동아는 1964년 9월에 다시 살아났다. 국제적으로는 11월의 도쿄 올림픽을 앞둔 시점이었고, 국내에서는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언론파동)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언론파동은 7월 18일 정부와 공화당이 언론윤리위원회법 추진에 합의하면서 표면화됐다. 권력의 언론통제법 제정을 반대하며 언론계가 궐기해 벌인 전면전 성격의 대립이었고, 언론과 제3공화국의 갈등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준비를 진행하다가 9월에 첫 호를 내놓은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일제 말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2년 넘게 옥고를 치른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1896~1989)이었다. 이희승의 신동아 복간사는 ‘민주주의의 기로(岐路)에 서서’였다. “최근에는 신문 잡지 방송 등 언론기관이 국민에게 알려서는 안 될 것을 알려서인지, 알려야 할 것을 알리지 않아서인지, 그 입을 트러막기(틀어막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 유례가 없는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지난 일요일(8월 2일) 심야에 통과시켰다”고 말하고 “국민의 다대수의 복리를 도모하려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라면, 그것은 반드시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되어야 할 것이요, 행여나 패도(覇道)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밝혔다. 이희승은 1979년 3월호 ‘3·1운동 50주년 기념회 시리즈’에 ‘조선어학회 사건’을 집필했다.
민주화의 긴 투쟁을 거친 후인 오늘날 언론중재위원회법 개정이라는 명분으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권력의 횡포가 전개되는 상황은 신동아 복간 때와 닮았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오늘날 권력의 횡포는 더 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논픽션으로 현대사 발굴과 대중화
신동아의 복간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민족 수난의 역사를 겪은 후였기에 재야 연구자와 역사의 현장을 몸소 경험한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쌓아두고 있었다. 신동아는 논픽션을 발표할 지면을 제공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신동아 복간 기념사업 30만원 고료 논픽션 모집’이었다.“반드시 ‘센세이쇼날’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새 문화건설에 알뜰한 자료가 될 수 있는 여러분의 역작들을 기대합니다”라고 요령을 설명했다. 전기, 기록, 보고, 일기, 수필 등으로 일정한 틀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도록 했다. 다만 전기는 작고한 한국인으로 고종 이후에 사망한 최근 100년 미만의 인물에 한정했다.
고료 30만 원은 파격적인 액수였다. 전통적인 현상공모 신춘문예 상금은 분야에 따라 액수에 차이가 있었지만, 단편소설의 경우 200자 원고지 70장 내외 분량에 상금은 1만 원이었다. 논픽션은 200~500장 분량에 최우수작 10만 원, 우수작은 5만 원이었다. 같은 시기에 ‘사상계’가 시상하는 동인문학상은 기존 중견작가에게 수여하는 제도였는데 상금 3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논픽션 현상공모 작품이 들어오기 전에 우선 저명 필진의 수기를 실었다. 신상초(申相礎·언론인, 정치가)의 ‘자서전적 수기’는 ‘일군(日軍) 탈출기’(1964.9·복간호), ‘중공 탈출기’(1965.3), ‘북한 탈출기’(1966.3)로 이어지는 시리즈였다. 필자는 1944년 일본 도쿄제국대 법학과 3학년 재학 때 학도병에 징집돼 중국 전선에 배치됐다가 옌안(延安)으로 탈출한 뒤, 팔로군에 편입돼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한 특이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으니 원고지 250매의 수기를 3편씩이나 발표한 것이다.
민족 수난기에 지식인들이 겪은 수기는 매호 계속돼 신동아의 한 특색을 이루었다. 통권 2호(1964년 10월호)에는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기’(金鐘斌), 11월호 ‘버마전선 패잔기(敗殘記)’(李佳炯), 12월호 ‘무성영화시대의 자전(自傳)’(李慶孫), 동일 필자의 ‘상해 임정시대의 자전’(1965.6) 등이 그런 수기였다. ‘시베리아 유수기(幽囚記)’(韓喬石)(1967.1~3, 3회 연재)는 총 950매의 회고록이었다. 회고록은 대개 원고지 200~250매에 이르는 길이로 이전의 잡지에는 벅찬 분량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심층취재도 150~200매로 일간지 지면에는 소화하기 어려운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신동아는 긴 글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지면과 긴 글을 지루하지 않게 엮어낼 수 있는 필자 확보, 거기에 높은 수준의 독자가 있었다는 여건이 어우러져 다른 잡지를 압도할 수 있는 편집이 가능했다.
‘복간기념 30만 원 고료 논픽션 모집’은 1965년 9월에 제1회 당선작을 발표했는데 ‘모멸(侮蔑)의 시대’(朴順東)가 최우수작으로 선정됐다. 일본 유학 중에 학병으로 끌려가 버마 전선에서 일본의 패망을 맞아 1946년 1월에 귀국하기까지 파란만장의 체험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당선 작가 박순동은 목포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전명운전(田明雲傳)’(1968·제4회), ‘암태도(岩泰島) 소작쟁의’(1969·제5회)로 세 차례 당선 기록을 세워 논픽션 작가로 등단했다. 제4회 최우수작 ‘전명운전’은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 의사의 일대기를 추적한 작품으로 역사적 인물의 숨은 일생을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첫 당선작가 박순동은 1969년 10월 49세 장년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동아의 논픽션 작품 발굴은 성공을 거둔 새로운 시도였다. 1967년에는 논픽션 당선과 입선한 작품 6편을 모아 ‘모멸의 시대’라는 단행본을 출간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복간 기념사업으로 시작한 논픽션 모집은 반세기 동안 이어져서 2013년 제49회까지 계속됐고, 상금도 제1회 30만 원으로 시작했는데 제5회이던 1969년에는 상금을 60만 원으로 올렸고, 2000년대에는 1000만 원까지 늘어났다.
문학의 논픽션 장르 개척
유주현의 ‘소설 조선총독부’는 복간호부터 인기 연재물이었다. ‘소설’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등장인물, 사건, 시간, 장소가 역사적으로 일치해 실재 인물과 사건을 새로운 방법으로 서술하는 논픽션과 창작소설의 형식을 함께 갖춘 특이한 연재물이었다. 총독 데라우치(寺內), 경무총장 아카시(明石元二郎), 경무과장 구니토모(國友尙謙), 안명근(安明根) 등 실재 인물에 시간과 장소 역시 사실(史實) 그대로였다. 역사소설의 새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복간 첫 호부터 시작된 연재는 대한제국 말에서 광복까지의 기간을 관통하면서 항일과 친일 인물을 통틀어 700여 명이 등장하는 대하드라마였다. 연재가 끝난 후 1967년 신태양사에서 5권으로 출간돼 5만 질이 팔리는 베스트셀러였고 라디오 낭독, TV드라마, 영화 등으로도 재가공됐다. 후에 서문당(1981)과 배영사(1993)에서도 출판됐고, 21년이 흐른 뒤 2014년에 나남출판이 다시 출판했을 정도로 상업성도 있었다. 일본어 번역판은 삼성출판사와 일본 고단샤(講談社)의 계약으로 3권을 출판해 일본에서 판매됐다.소설 집필의 후일담도 있었다. 작가는 유주현이었지만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인사를 인터뷰해 초고를 집필한 사람은 이경남(李敬南)이었다. 그는 후에 ‘소설 조선총독부’의 초고 숨은 필자가 자신이었던 사실과 신동아 복간 무렵의 상황을 소상하게 밝혔다.(‘자유를 위한 회고록 2’, 도서출판 알파, 2006) 언론인이자 문인이었던 이경남은 ‘소설 조선총독부’의 고스트 라이터 역할을 맡으면서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섭렵하다가 다큐멘터리 작가로 입지를 굳히게 돼 신동아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경남의 논픽션은 대개 1회로 끝나는 것이었지만 2회 이상 연재된 작품도 여러 건이 있었다. 2회 이상 발표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운명의 4일(1972.2~1972.5, 4회)
1회 8·15 정오의 환성, 2회 6·25 미명의 포성, 3회 4·19 학해의 노도, 4회 5·16 한강의 횃불. 각 300매.
* 자유북한 60일의 산천과 인물(1977.9~10, 2회)
* 구월산 유격대의 이태준 귀순공작(1993.8~9, 2회)
* 한국 기업의 라이벌(1969.9~1970.8, 12회)
‘소설 조선총독부’는 역사적인 소재를 소설화하는 새로운 장르를 형성해 다음 작품이 신동아에 연재되었다.
* 유주현, 소설 대한제국(1968.4~1970.5, 26회)
* 송병수, 소설 대한독립군(1970.6~1972.2, 21회)
전기 작품도 신동아가 선도했다. 신동아 편집장 손세일의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은 1969년 9월부터 연재(1969.10, 1970.3, 1970.9)하다가 증보를 거듭해 ‘이승만과 김구’라는 제목으로 일조각(1970), 나남출판(2008), ‘월간조선’(월간조선 연재, 단행본 7권)으로 이어지는 방대한 작업으로 마무리되는데, 시작은 신동아였다. 시인 고은이 집필한 ‘이중섭 평전’(1973.6~9, 300장 분량 4회 연재)도 청하(1992)와 향연(2004)에서 출간됐다.
학술지 역할과 역사의 토론장
역사를 탐구하는 광장의 역할도 신동아가 맡았다. 1969년 3월호부터 연재한 3·1운동 50주년 기념 시리즈는 연말까지 10회를 이어갔다. ①3·1독립운동(3월호), ②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그 활동(4월호), ③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저격한 3대 의거(5월호), ④만주 독립군의 활동(6월호), ⑤의열단의 3대 의거(7월호), ⑥신간회 운동(8월호). ⑦6·10만세 사건과 광주학생운동(9월호), ⑧민족실력 향상운동(10월호), ⑨애국단의 활동(11월호), ⑩조선어학회 사건(12월호)주필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의 사회로 1971년 1월부터 진행된 ‘토론, 한국사의 쟁점’은 해당 분야 최고 역사학자들이 벌이는 수준 높은 학술 토론이었다. ①한국사의 주인공과 무대(1월), ②한국사의 창세기(2월), ③한국문화의 기원(3월), ④한국인의 원주지(原住地)와 이동(4월), ⑤삼국의 형성과 도시국가(5월)가 집담회의 주제였다.
연구를 위한 희귀 사료도 전재해 학술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1967년 1월부터 ‘일제 고등경찰이 내사한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비밀정보’(160~220매 분량)를 권말부록으로 7월호까지 5회에 걸쳐 연재해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를 제공했다.
*1968년 7월호 역사학회의 ‘한국사의 시대구분론의 제문제’(토론)
*1969년 4월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사록’
*1969년 5·7·8월호, ‘석굴암 전실(前室)이냐, 광창(光窓)이냐’ 논쟁.
*1970년 8월호 문정창, ‘임나(任那)는 대마도였다’에 대해 천관우가 동아일보 ‘서사여록, 일본부(日本府)’(1970.8.26.)라는 칼럼으로 논의가 이어진 경우도 있다.
1986년 10월 1일 동아일보 지령 2만 호 기념사업으로 시작한 현대사 대토론(1986년 10월호)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심포지엄은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 ‘해방공간 3년, 갈등’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 ‘5·10 선거와 남북의 이데올로기’ ‘6·25의 국제적 성격과 국내적 영향’ 등을 다뤄 해를 거듭할수록 그 무게를 더하고 있었는데, 주제 논문과 토론 내용이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게재되고 단행본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출간됐다. 신동아가 다룬 학술 논문은 여기서 모두 정리할 수 없을 정도이므로 특히 역사 분야 논문과 기획 시리즈를 대강 살펴본 것이다.
‘차관’ 기사 필화
1968년 신동아 필화는 영향력이 큰 신문이 발행하는 대표적 잡지에 대한 권력의 탄압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관심이 집중됐다. 동아일보 발행인이 바뀌고 중진 언론인들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던 후유증으로 인해 언론계에 충격이 컸다. 문제 된 ‘차관(借款)’ 기사는 동아일보 정치부 김진배(金珍培)와 경제부 박창래(朴昌來) 두 기자가 공동 집필해 신동아 12월호에 게재한 원고지 250매 분량의 심층보도였다. 본문 리드 부분은 이렇다.“특혜와 폭리가 말썽 되어 국민의 지탄으로 특별 국정감사까지 받게 된 차관업체들의 실태와 정부의 외자도입정책의 공과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상환 능력 등을 진단한 총 보고서. 정부가 일부 업자에게만 치부할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고 있다는 비난을, 그리고 또 이들 혜택을 받은 업자로부터는 그 시혜의 반대급부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 공급을 받고 있다는, 권력과 기업과의 함수관계는 비단 어제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기사와 함께 ‘차관,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제목으로 경제정책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았다. 김영선(金永善), 백두진(白斗鎭), 부완혁(夫琓爀), 송인상(宋仁相), 조동필(趙東弼), 주요한(朱耀翰), 최호진(崔虎鎭)이 외자도입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차관’의 필자 박창래 기자는 11월 23일 오전 11시 30분 출입처인 수산청 기자실에서 연행돼 세 차례 조사를 받았고, 또 다른 필자 김진배는 한국기자상 수상에 대한 부상으로 기자협회가 마련한 동남아 순방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김포공항 도착 즉시 연행돼 역시 네 차례에 걸쳐 연행되거나 출두해 기사의 취재 집필 경위를 조사받았다. 관련자 5명 외에도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 논설위원 겸 신동아 주간인 홍승면과 정치부 차장 유혁인도 출두를 요구하거나 연행해 조사했다.
동아일보는 1968년 11월 29일자 1면에 5단 제목으로 기자가 연행된 사건을 보도했다. ‘본사 기자 5명 심문’이라는 컷과 함께 “정보부 신동아지 ‘차관’ 기사 관련/ 보관 원고도 제출케”라는 기사는 신동아 12월호 ‘차관’ 기사와 관련해 필자 김진배(정치부), 박창래(경제부) 두 기자를 비롯해 신동아 부장 손세일(孫世一), 기자 심재호(沈在昊), 이정윤(李正允) 등이 23일부터 차례로 중앙정보부에 연행 또는 자진출두 형식으로 불려가 심문받았는데, 그중 몇 사람은 반공법 위반혐의로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중앙정보부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사설도 실었다. ‘신동아 필화’라는 제목으로 사건의 경위와 함께 문제 된 기사 내용을 요약 소개했다.
사설란은 평시에 두 건을 다루었는데 이날은 신동아 사건 한 건만으로 의례적으로 긴 분량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다루는 것은 부당하며, 적용 법규도 반공법 위반 혐의가 될 수 없다는 등으로 중앙정보부를 비판했다. 민중은 알 권리가 있고 매스컴은 알릴 의무가 있다. 차관으로 자립경제를 내다보게 됐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면, 차관이 부패나 국민 간의 지나친 불균형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는 논지였다. 중앙정보부와 정면 대결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논리적이면서도 강경한 논설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오히려 수사를 확대했다. 12월 2일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북괴와 중소 분쟁’ 영문 원고(필자 趙淳昇) 번역문 등을 비롯해 신동아 월요회의 회의록, 송고장(送稿帳), 서신, 영수증 등 12점을 압수했다. ‘차관’ 기사로 시작된 필화가 10월호 논문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확대되는 양상이었다. 압수수색 영장은 이규명 서울지검 검사가 청구하여 유태흥 서울지법 부장판사가 발부했다.
12월 3일 오후에는 동아일보 발행인 김상만과 주필 천관우를 연행 심문해 동아일보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태도였다. 동아일보는 이 같은 수사 경과를 보도하면서 국회에서 정일권 총리를 향해서 질문 공세를 펴는 정치권의 움직임도 크게 다루었다. 중앙정보부는 12월 3일에 이어 5일과 6일에도 주필 천관우를 소환 심문했다.
12월 6일에는 서울지검 공안부가 신동아 10월호에 게재된 ‘북괴와 중소분쟁’에 관련해 신동아 주간 홍승면과 부장 손세일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사태가 확대되자 동아일보는 처음과는 달리 현저히 위축된 자세를 보였다. 간략한 사실 보도만 하고 더는 비판적인 태도로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11일 동아일보는 관련 간부의 전면적인 인사 개편을 단행했다. 이사 주필이던 천관우와 홍승면(신동아 주간 겸 논설위원), 손세일(신동아 부장) 3명을 해임하고 1면에 ‘본사사령’으로 고지했다. 구속된 홍승면과 손세일은 인사가 있기 전, 구속 3일 만인 12월 9일 석방됐다. 동아일보가 권력의 압력에 굴복한 배경에는 동아일보 계열사인 삼양사와 경방(주)에 대한 세무조사 압력을 우려하는 동시에 동아일보 전 직원에 대한 병역 조사 실시 등 전 방위적 압박이 있었다고 손세일은 증언했다.(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007, 70쪽)
중앙정보부가 명칭을 바꾼 국가정보원은 2007년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구성해 이 필화를 조사한 결과를 포함해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 ‘언론·노동편’(Ⅴ)에 신동아 ‘차관’ 기사는 박정희 정권의 도덕성을 공격했다고 기술했다.(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007, 71쪽)
동아일보를 떠났던 세 언론인은 오래지 않아 모두 복직했다. 홍승면은 편집국장(1969.2~1971.4), 수석논설위원(1972.4), 출판국장 겸 이사(1973.8), 이사 겸 논설주간, 주필(1974.9)을 역임하다가 1975년 2월에 퇴사했다. 손세일은 기획부장(1969.4~1970.9), 논설위원(1970.9~1980.4)을 지냈다. 천관우는 가장 늦게, 3선 개헌이 끝난 후인 1970년 2월에 복귀해 상근이사로 동아일보 사사 편찬을 담당했다.
이후락 증언 사태
신동아 기사가 언론자유 신장의 기폭제 역할을 한 사건은 6·29선언 직후의 ‘이후락 증언’ 기사였다. 1987년 10월호 ‘이후락 증언-최초로 밝힌 김대중 납치 내막’에 대해 제작 마감을 며칠 앞둔 9월 12일부터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삭제를 요청했다. 신동아 이종각 기자가 김대중 납치사건 때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만나 취재한 내용이었다. ①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을 사전에 전혀 몰랐으며 모두 자신이 했다. ② 김대중을 납치한 배가 일본 출발 후 대통령에게 알리니까 대단히 노했다. ③ 처음부터 김씨를 한국에 연행할 작정이었지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요지의 기사를 100매 분량으로 집필했다. ‘월간조선’ 오효진(吳効鎭) 기자도 같은 글을 썼다.신동아 제작팀은 국가안전기획부와 팽팽한 대립을 벌이면서 기사삭제를 거부하고 제작을 강행하자 9월 20일 오후 9시 30분경 수사요원 7명이 동아인쇄공업의 윤전실을 점거해 인쇄를 물리적인 힘으로 중단시켰다. 기사가 한일 간 외교 문제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일동은 ‘신동아 제작탄압을 즉각 중지하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기자들은 농성 과정에서 1984년 이래 당국에 의해 제작이 탄압받은 사례도 밝혔다. 때로는 기사를 싣지 못한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쟁취한 사례도 있다고 밝혔는데 다음과 같다(이하는 2010.10.11 동아일보 창간 90년 특별기획 ‘안기부, “이후락 인터뷰 빼라” 신동아 인쇄 막아’ 인용).
*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신동아는 당국으로부터 20차례에 걸쳐 제재를 받았다. 연행조사 4차례, 기사 전면 삭제 7차례, 부분 삭제를 포함한 수정이 9차례였다.
* 1984년 10월호 발간을 앞두고 신동아 편집진은 ‘대토론 1988년’을 마련했다.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모색하려던 이 공개토론의 내용 게재는 당국의 제재로 무산됐다.
* 1986년 5월 안기부는 6월호 ‘개헌 대토론’ 특집기사 가운데 ‘김대중 씨가 말하는 개헌 방향’의 삭제를 요구했다. 신동아가 거부하자 안기부 수사요원 4명을 인쇄처인 동아인쇄공업에 파견해 인쇄 공정을 중단시키고 기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그해 9월호 ‘부천서 성고문 사건’ 기사는 안기부의 제재로 절반 이상 삭제됐으며, 12월호는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박형규 목사의 인터뷰와 ‘유신 체제하의 고문’ 기사가 실리지 못했다.
* 1987년 1월호에서는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김한조의 증언 ‘나는 박 대통령의 대미 밀사였다’를 삭제하라는 안기부의 압력에 따라 기사를 빼고 표지와 목차를 지운 뒤 다시 작업해 발행해야 했다.
1987년 9월25일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맨 왼쪽)이 전두환 정권의 신동아 탄압 사태에 맞서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을 찾아 격려하고 있다.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출판국 기자들을 격려했다(오른쪽 사진에서 맨 왼쪽).
‘신동아 사태’는 동아일보가 9월 23일자 사회면에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신동아 기자 등 80명 3일째 농성’과 ‘이후락 씨 증언기사 관련 당국 인쇄저지 항의’라는 부제를 단 기사는 5공화국 들어 언론탄압에 대한 언론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보도한 첫 사례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계층에서 격려 전화가 쇄도했으며 재야단체와 다른 언론사들도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AP, 로이터, AFP통신 등 외국 언론도 사태를 집중 보도했다. AFP통신은 “한국 기자들이 정부 당국의 기사 보도금지 조치에 항의함으로써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진상조사, 민주당의 조사위원회 구성,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의 탄압중지 촉구 성명, 국회 문공위 개회, 당정 협의 등을 거쳐 28일 안기부 측이 인쇄 중지 조치를 철회하면서 일단락됐다.
사태는 결국 신동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락 증언이 실린 신동아 10월호는 40만 부가 판매됐다. 이는 당시 웬만한 일간신문 유료 구독 부수를 뛰어넘는 숫자였다. 신동아는 이때의 용기 있는 투쟁으로 관훈클럽이 수여하는 관훈언론상을 수상했다.
1987년 신동아 탄압 사태의 종결을 알리는 동아일보 9월 28일자 기사.
무게 있는 특집과 별책부록
복간 이듬해 1965년 1월호는 ‘전후 20년의 학문과 예술’이라는 주제의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별책부록으로는 ‘광복 20년 기념/ 연표·주요 문헌집’을 발행했다. 헌법, 얄타협정, 포츠담 선언, 카이로 선언을 시작으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원조협정, 농지개혁법 같은 문헌을 집대성해 역사적인 사료로 학술적 가치도 큰 단행본 부록이었다. 3월호 ‘1919년 3월’은 지역별로 3·1운동의 전모를 살펴본 특집이었다.신동아는 시사 이슈를 학술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는 편집 취지를 살리도록 노력했다. 1996년 10월호 ‘96 한국 4대 파워 집단 주거 출신 집중분석’, 15대 국회의원 전원(299명), 검사장 및 지법원장 이상 법조계 간부(74명), 정부 부처 1급 이상(255명), 50대 그룹 회장과 매출액 순위 30대 기업 사장급 이상(128명) 등 756명 분석 등이 그런 예였다.
별책부록 ‘근대한국 명논설 33편’(1966.1)과 이듬해 같은 제목으로 ‘속 근대 한국 명논설 33편’(1967.1)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1968.1)은 신동아가 매년 신년호 별책부록으로 발행한 자료집으로 중요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는 기획이었다. 별책부록에서 신동아는 근세사와 관련되는 자료를 비롯해서 철학, 사상, 예술 분야까지 독자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부록 가운데 여러 종은 동아일보 출판부가 단행본으로 출판 판매했다. 매년 1월호와 함께 발행한 부록은 〈표〉와 같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신년호에 부록을 싣는 전통을 바꾸어 창간 기념호, 또는 12월호에 부록을 발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적인 문헌 중심에서 실용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창간 75주년 기념호(2007년 11월호) 부록 ‘내 손 안의 영어를 위한 명문장 명표현’(238쪽), 같은 해 12월호 특별부록 ‘한국의 핵 주권’(240쪽), 2008년 12월호 부록 ‘CEO 꿈꾸는 당신이 읽어야 할 경영서 49’(305쪽)가 그런 예였다.
발행부수 증가에 따른 역기능
1980년대는 월간지의 독자가 다수 대중으로 확산한 시기였다. 이전까지는 소수의 지식층이 주요 독자였다. 고도성장의 물결을 타고 잡지구독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경제가 성장했으며, 교육의 확산으로 고학력자가 늘어났다는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대중사회가 도래하면서 독자의 저변이 넓어졌다.정치적 변화도 크게 작용했다. 제5공화국의 등장으로 이전까지 장막 속에 감춰져 있던 정치적 대사건에 국민의 관심이 높았다. 숨겨진 정치 이면을 알고자 하는 국민의 욕구를 잡지 매체가 충족해 주었다. 독자의 호기심을 끌 수 있는 글을 쓸 능력을 지닌 새로운 필자들의 등장도 잡지 저널리즘의 저변 확산을 이끈 요인이었다. 이리하여 월간지는 5공화국 시절 한때 폭발적인 부수 증가를 기록했고, 신문과는 다른 독특한 잡지 저널리즘의 위력을 과시했다.
1984년 7월호부터 신동아의 부수가 급격히 불어나서 10만 부를 돌파했다. 우리나라 잡지사상 월간지의 10만부 돌파는 드물었다. 1985년 3월에 20만 부, 7월에 30만 부를 넘어서는 급격한 신장세였다. 잡지의 30만 부 판매 기록은 이때가 최초였다. 특히 이후락 증언이 실린 1987년 10월호는 40만 부를 돌파했다.
제3공화국 정치 비화는 판매부수를 대폭 늘리는 역할도 했지만, 한편으로 잡지가 ‘폭로 저널리즘’의 무대로 변질됐다는 비판도 받았다. 표피적인 사실의 나열과 과장, 정확성 없는 추측의 조합, 지적인 고뇌 없는 감정적인 글로 독자의 호기심만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폭로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과 ‘비화’ 위주의 편집에 독자들이 염증을 느끼면서 정치 비화 기사가 퇴조를 보인다.
폭로 저널리즘의 부작용으로 일어난 사건이 2008년 12월호와 2009년 2월호에 실린 이른바 ‘미네르바 오보’였다. ‘미네르바는 금융계 7인 그룹, 박대성은 우리와 무관’이라는 제목으로 제보자의 거짓말에 속아 대형 오보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오보의 경위를 규명하기 위해 사내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최맹호 상무이사)를 구성해 조사에 착수했다. 이 같은 사실은 동아일보 1면(2009.2.17)에 “신동아 ‘미네르바’ 오보 사과드립니다, 사내 진상조사위 구성, 진실규명 공개”라는 사고로 알린 다음에 한 달 동안 관련자 심층 면담 등을 통해 진상을 파악한 뒤 사과문을 다시 한번 1면에 게재(2009.3.18)하고 진상조사보고서 요약문은 같은 날 동아일보에 한 페이지 분량으로 싣고, 보고서 전문은 신동아 4월호에 게재했다. 출판편집인, 출판국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신동아 편집장을 해임하는 등 문책성 인사 조치가 단행되면서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지키는 노력을 강화할 것을 다짐”했다. 신동아로서는 뼈아픈 사건이었다. 오보는 자랑할 일이 아니지만 동아일보-신동아가 신뢰 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세를 보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신동아의 외형적인 체제와 편집 내용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시적 변화는 1988년 1월부터 단행한 가로쓰기 편집이었다. 창간 이래 고수해 오던 세로쓰기 체제를 전면 가로쓰기로 바꾼 것이다. 동아일보는 10년 뒤인 1998년 1월 1일부터 가로쓰기를 실행했다. 출판계가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편집으로 전환한 시기는 대개 19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일간지는 아직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을 과감하게 도입할 수 없었으나 잡지와 일반 출판물을 비롯한 광고 분야는 민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글 사용이 늘어나고 있었다.
2000년대의 특종
1996년 1월부터는 판권에 편집진의 이름을 기재한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이전까지는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의 이름만 밝혀왔는데 이때부터는 발행, 편집, 인쇄인 외에 편집의 최고 책임자 출판국장을 필두로 신동아부 부장에서 기자, 출판사진부, 출판미술부, 출판영업국을 포함한 모든 제작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업무에 따르는 책임과 자부심을 지닐 수 있도록 배려하는 조치였는데 다른 잡지와 단행본 출판사도 같은 방식으로 바뀌는 추세를 반영한 제도이기도 했다. 창간 65주년에 실시된 변화였다.기사 한 건당 원고 분량은 줄어드는 추세로 바뀌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1980년대에는 200매 300매 또는 그 이상의 긴 글을 과감하게 실으면서 이처럼 무게 있는 글이 실려 있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긴 글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풍조에 따라 기사의 건당 매수가 줄어드는 쪽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긴 기사를 읽지 않는 독자가 많아졌고, 자료 성격을 지닌 무거운 글은 전문지나 학술지가 싣고, 데이터베이스나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시대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기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100매 넘는 기사도 잘 싣지 않는다. 1980년대까지 500매가 넘는 긴 글도 과감하게 실었지만 근래에는 길어야 70매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신동아는 신문과 방송이 다루지 못하는 특종을 기록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예로는 다음 기사가 있었다.
* ‘수지킴 사건 추적기’ (2001년 12월호) : ‘여간첩의 납북 미수’로 발표됐던 1987년 ‘수지킴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기사.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수상.
* 신기남 의장 부친은 일본군 헌병 오장(2004년 9월호) :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 부친의 친일 행적을 추적 보도. 이 기사로 신 의장이 사임하는 등 큰 파장.
* 김우룡과 MBC, 8개월 전쟁 “김재철 사장, ‘큰집’에 불려가 조인트 맞고 깨진 뒤 좌파 정리했다”(2010년 4월호) :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를 고발한 기사로 한국기자상 수상.
* 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2016년 6월호) : 전두환 전 대통령 퇴임 뒤 첫 단독 인터뷰.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는 이유로 사자 명예훼손 재판 출석을 거부하던 전씨에게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발언 등을 이끌어냄.
* 윤석열 지검장 장모의 이상한 법정 증언(2018년 9월호) :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장모 최모 씨 수백억대 은행 잔고 서류 위조를 자백한 법정 증언 입수 단독보도. 이 보도 내용은 국정감사 이슈가 돼 뉴시스, 뉴스1, TV조선 등 55개 매체가 후속 보도.
* 태영호 인터뷰 ‘잠적 북한 대사대리 조성길 10대 딸 북송 파문’(2019년 3월호) :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가 잠적한 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 등 취재원과 국가정보원의 증언을 토대로 “조성길 부부가 로마 소재 북한대사관을 탈출할 때 고교생 딸과 갈라졌고 이 딸이 북한으로 보내졌다”는 사실 최초 보도. CNN, 워싱턴포스트, 가디언, 로이터, AFP, 텔레그래프, 유로뉴스, NHK,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를 비롯한 전 세계 100개 이상의 매체가 인용 보도.
잡지 기사의 디지털 보도
‘신동아’ 모바일 네이버·카카오 채널.
① 신동아 인터넷 서비스
1996년 11월 동아닷컴이 생기면서 신동아 기사 일부를 서비스하기 시작하다가, 2002년 10월부터 본격적인 서비스에 들어갔다. 2007년부터는 과거 기사 가운데 2001년 1월호 이후 목차와 기사를 서비스하고 있다.
② 모바일 신동아 서비스
2015년 11월 모바일 신동아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③ 포털에 신동아 기사 제공
2003년경 야후 포털을 통해 기사 서비스가 이뤄졌는데, 2007년 1월 1일부터는 네이버, 다음 등의 포털에서도 기사를 볼 수 있는 서비스가 시작됐다. 이로써 신동아는 종이 인쇄와 디지털 서비스 두 개 버전이 공존하는 매체로 진화한 것이다. ‘인터넷 신동아’에 먼저 보도돼 접속 조회수가 늘어난 기사들이 다시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 [단독 인터뷰] 김종인, 선대위원장 수락할 듯(2020년 3월 14일) : “공관위 공천, 더 이상 얘기 안 해” 누적 조회수 32만7784. 다수 언론이 인용 보도.
* 윤정옥 정대협 초대 대표, “윤미향 두둔 입장문, 연락받은 적도 없다”(2020년 5월 2일) : 45만 3996. 조선일보, 중앙일보가 인용 보도하는 등 큰 화제.
* n번방 피해자 암시 명단 공개한 송파구청(2020년 4월 14일) : 52만7968. 보도 직후 KBS, SBS, MBC 등 방송 3사 및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등 주요 일간지가 인용 보도.
* ‘그림 사기’ 무죄 확정 조영남 “감옥 갈 준비했다, 역사적 판결 남겨 뿌듯(2020년 6월 25일) : 44만1961. 조영남이 대법원에서 미처 못 한 이야기를 발 빠르게 기사화. 대법원 판결 당일, 자택에서 조씨와 함께 재판 결과 확인하고 최초로 조씨 심경 보도. 온라인 기사 보도와 동시에 영상도 업로드.
* 송정교 붕괴 사건, 월간지의 경계를 뛰어넘어 동영상 뉴스를 매체 중 가장 먼저 보도.(2020년 9월 4일) : 유튜브 ‘매거진동아’ 동영상 조회수 6만3125. 강원 평창군 진부면 양대천 송정교 붕괴 때 차량 운전자가 주민의 수신호를 보고 30초 차이로 목숨을 구하는 장면을 가장 먼저 보도. KBS, MBC, SBS, 종편 등 방송보다 빨랐음. 이튿날 동아일보 인터넷 판이 동영상 가져가 신동아 동영상 사용.
또 지면에 게재된 기사가 신동아 홈페이지와 포털 매체에 노출되면서 100만 누적 조회수를 넘는 기사도 다수 나왔다.
* ‘최전방 공격수’ 황운하 경찰 수사개혁단장의 직설(2017년 7월호 누적 조회수 97만)
* 아흔 살 老兵들의 외침 “90특무대 ‘북파 공작’ 기억해 달라”(2017년 9월호 51만)
* 문재인 정부 부자증세 멈칫한 진짜 이유(2018년 8월호 120만)
* 추석이 두려운 서민들(2018년 10월호 189만)
* 부자들의 증여세 탈루백태(2018년 10월호 120만)
* 장재연 교수 “웬만하면 마스크를 벗어라”(2019년 4월호 143만)
* 안철수 “소설보다 더 끔찍한 현실, 어떻게 이런 일이...”(2020년 4월호 143만)
* 김종인 “코로나19 대응 보며 文정부 국가경영 능력 있는지 회의”(2020년 4월호 190만)
* 윤미향 ‘안성 쉼터’ 중개인 “7억5000만원 말도 안 돼…적정가 4억 초반”(2020년 7월호 134만)
* 정세균 총리가 수상하다 수상해!(2021년 1월호 130만)
* “헉! 너무 야해” 1500년 전 신라 토우의 성적 욕망과 쾌락(2021년 5월호 237만)
* “文 욕했다고 휴대폰 뺏고 배후 캐물어…발가벗기는 느낌”(2021년 6월호 120만)
전문화 시대의 종합잡지
신동아는 90년의 역사를 기록한, 잡지계를 대표하는 언론매체다. 하지만 매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전 세계 모든 인쇄 매체가 발행부수의 하락과 영향력 축소로 고전하는 양상이다. 방송, 유튜브 등 기술 발전에 따르는 새로운 전달 방식이 속보성, 광역성, 콘텐츠의 확장성 등을 갖추고 고전적인 언론매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신동아도 이에 대처해 디지털 기사를 내보내고 있으며 상당 부분 성과를 내고 있기는 하다.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 것인가. 차라리 과거의 편집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을 표방하는 자세를 견지해 속보성이나 물량 위주의 성장보다는 의견 잡지로 더 고급스러운 편집으로 방향을 잡으면 어떨지 모르겠다. 영광의 90년을 기록한 저력으로 다가오는 100년을 앞두고 고민할 시기라는 생각이다. 신동아의 발전이 한국 잡지 저널리즘의 미래이기에 던지는 화두다. 신동아 90년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90주년 #잡지 저널리즘 #신동아
정진석
● 1939년 출생
●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신문학), 영국 런던정경대 박사 (언론학)
●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위원, 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정책과학대학 원장
● 現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 저서 :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