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과 독자들이 완성한 ‘독자공동제작소설’
민중의 기록 ‘논픽션 공모’는 불의에 대한 저항
‘과학란’ 등 ‘란(欄)’ 만들어 기사 분류한 최초 잡지
채만식·이청준·최명희·박완서가 발표한 소설
1930년대 신조어 소개…394개 어휘 사전 등재
문화로 조선을 계도한 문화대중주의 주창
“극예술연구회는 ‘신동아 문화주의’의 증거”
1933년 4월호에 실린 ‘독자 투고 규정’과 ‘신문이 만들어지기까지’의 화보(왼쪽)와 1934년 5월호 권두언 ‘조선 언론계의 임무’과 만화란. ‘신동아는 대중 눈높이로 소통하는 문화주의를 제창하며 사진과 만화를 독립 문화 콘텐츠로 분류했다. [조영철 기자]
조선 민족의 ‘큰 그릇(公器)’에는 늘 ‘문화주의’가 담겨 있었다. ‘신동아 문화주의’는 대중문화참여주의, 학술 재조명, 읽는 잡지에서 보는 잡지로의 변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한민국 문화 영역을 확장시키며 90년의 세월을 지켜냈다.
중요한 것은 신동아는 사회 엘리트들의 눈높이를 추종하지 않고 대중의 눈높이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소통했다는 점이다. 신동아 문화주의 역시 독자가 직접 창작하며 향유할 수 있는 ‘대중참여형 문화’였고, 전문 예술인들에게 지면을 마련해 주는 동시에 또 다른 문화 창달의 주체로 민중을 참여시키며 그들의 시야를 확장했다.
엘리트 아닌 대중 눈높이로 소통한 文化
대표적인 게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무기 정간될 때까지 지속한 ‘독자공동제작소설’과 1964년 9월 복간되며 만들어진 ‘논픽션 공모’다. 다른 매체에도 ‘독자문예’ 같은 독자투고란은 있었지만, 신동아는 매호 작가와 서로 다른 독자들이 참여해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변화를 시도했다.1931년 창간호에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소설가 현진건은 ‘연애의 청산’이라는 제목으로 첫 운을 띄웠고, 이후 각 호에 두 명의 독자가 두 버전으로 연작소설을 완성했다. 작가 1명과 독자 8명이 1~5호까지 ‘같은 제목의 다른 두 편의 소설’을 연작한 것이다. 기성 소설가들이 모여 연작한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전문 작가가 독자와 직접 소통을 시도한 것은 신동아가 처음이었다. 아직도 신동아의 전문 작가 육성이라는 문학적 시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지만, 척박했던 1930년대에 신동아의 대중문화참여주의는 국민의 문화 창달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후 27년 만에 복간된 신동아는 과거 신동아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에 걸맞게 1979년까지 15회 동안 ‘논휙숀(논픽션) 모집’이란 타이틀의 공모문학상을 기획했다.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독자가 제시할 수 있도록 ‘200자 원고지 300매 내외’라는 분량만 명시하고 형식은 자유롭게 모집했다.
독자들의 참여로 인기가 나날이 치솟자, 30만 원으로 출발한 대회 상금도 60만 원(5회)에서 200만 원(16회)까지 차츰 올랐다. 짜장면 한 그릇이 100원, 소주 1병 65원, 신탄진 담배 1갑에 60원이던 1970년도를 감안하면 환영받을 상금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신문잡지가 신춘문예 같은 문학작품 공모를 통해 신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면, 신동아는 말 그대로 순수문학 테크닉을 연마한 예비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스토리텔링을 하다 보면, 비전문가들은 미숙한 문장력과 맞춤법, 구성 문체에 연연하다가 중구난방 스토리가 분산된다. 따라서 신동아는 아예 ‘논픽션’으로 주제를 한정해 독자가 사회 모순과 부조리에 귀 기울이고 현실에 참여하는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진입장벽을 확 낮췄다.
민중의 생생한 체험 기록은 여타 문학작품의 감동과는 다르게 비판의식을 자극한다. 수상 작품도 일제강점기에 자주 일어났던 ‘소작쟁의’를 다룬 ‘암태도소작쟁의’(5회), 통행금지(통금) 이후 사회 이면을 고발한 ‘야경원’(8회), 사이비 사회사업가의 실상을 폭로한 ‘회칠한 무덤들’(9회), 원양어선 노동자의 부당한 현실을 폭로한 ‘무사히 끝나기만을’(제12회),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수기 ‘버스 안내양의 근무일기’(제14회) 등이었다.
이들 수상작들은 신동아 논픽션의 지향점이 ‘부정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식’이라는 점을 더욱 공고히 했다. 또한 4·19를 거치며 ‘민중’이라는 용어가 저항의 아이콘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신동아 논픽션 공모는 민중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임을 각성하고 민주주의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수면으로 오른 민중 의식의 기틀을 세우는 데는 1960년대의 신동아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1932년과 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 1974년 연재된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동아DB,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신남철의 독일 나치즘과 하이데거 비판
신동아는 또한 ‘참신함’을 전면에 내세워 동시대 담론에 주목했다. 1934년 11월호에는 동경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인 필자 신남철(1903~미상)의 글이 실렸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실존주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설명하면서 독일 나치의 파시즘과 독일철학에 대해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1936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우호조약 체결 2년 전에 독일철학과는 별개의 나치 사상을 나치에 조력한 하이데거의 철학과 대조해 비판한 것이다. 동시대 세계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독자들에게 문제의식을 일깨워주는 가뭄의 단비 같은 기사였다.또한 신동아는 그동안 국내 대표 소설가들의 문학작품을 대중에게 알리는 문화 전달자이자 통로였다. 작가들에게는 독자를 개화시킬 내용과 형식을 개발하거나 실험을 요구했고, 채만식(1934·레디메이드인생), 이청준(1974·당신들의 천국), 박완서(1974·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최명희(1988년·혼불 2~5부) 같은 대작가들의 글을 연재했다. 이는 원고난·경영난·검열난이라는 ‘3난(難)’을 거치면서도 신동아는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 부조리에 ‘물음표’를 던지는 작품들을 보존해 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920년대 중반부터 동아일보 지면에 사용하던 ‘란(欄)’으로 일목요연하게 차례를 나누고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구성했다. 지금은 이러한 목차는 당연하게 보이지만, 이는 신동아가 처음 시도하고 정착시킨 분류법이었다. ‘사진-만화, 과학란-연예란-스포츠란, 문예란-매호 특별부록’ 순서로 제목 위에 박스를 치고 ‘란(欄)’을 표시해 보기 좋게 구성했다. 사진과 만화 또한 문화콘텐츠로 독립시켜 이미지가 지니는 문화적 상상력을 선사했고, 특히 ‘과학란’과 ‘스포츠란’을 통해 독자의 취미 기호를 자극했다. ‘문예란’에는 문학, 미술, 음악과 함께 기사화되던 연극과 영화가 ‘연예란’으로 세분화돼 더 많은 예술 기사를 실었다.
신동아는 1964년 복간 이후에도 ‘뉴스와 화제란’을 만들어 연극, 영화, 무용, 음악, 미술, 공연, 바둑, 사진, 스포츠, 교육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의 칼럼을 게재하며 한국 문화예술계의 초석을 다졌다. 무용평론 1세대인 조동화(1922~2014)는 이 코너에 16년간 연재하며 ‘무용평론’이라는 새 장을 열었고, 이를 통해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비평지 ‘월간 춤’을 발행하기도 했다.
1930년대는 외래문화가 생활 속에 스며들면서 수많은 신조어가 생겨났다. 신동아는 창간호부터 ‘유행어 점고(流行語點考)’ ‘모던어 점고’ ‘신문신어사전’ 같은 신조어를 설명하는 코너를 연재했다. 신동아가 소개한 589개 신조어 중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어휘는 394개라는 연구(허재영, 한국어문학회 어문학 133호)도 있다. 물론 표준국어대사전 등재가 지금까지 통용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에 신조어를 소개하고 언어 생활 정착을 돕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는 “‘신동아’는 ‘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이 활동할 기반을 마련해줬다”고 말했다. [홍태식 객원기자]
40년 前 창간 50주년 좌담회 사회자의 기억
신동아는 잊힌 학술적 가치를 발굴·기록하는 귀중한 사료를 남겨 후속 연구를 독려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극예술연구회’의 재발견이었다. 창간 50주년을 맞은 신동아는 1981년 7월호를 통해 신동아와 ‘동갑내기’인 ‘극예술연구회’에 관한 좌담회를 열었다.1931년 창단한 극예술연구회는 대한민국 근대 연극계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8년 만에 해체돼 많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따라서 후학들은 연구회를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다. 이에 신동아는 12명의 연구회 회원 중 생존한 4명(서항석, 정인섭, 조희순, 이헌구)의 동인을 초대해 좌담을 열어 연구회 창단 목적과 당시 상황을 치밀하게 고증했다. 이 자료는 유일한 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의 공식적인 육성 자료로, 지금도 한국 연극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제일 먼저 읽어보는 ‘역사’ 자료이자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기사다.
1981년 좌담회 말미에 당시 생존 회원들은 “오늘 못다 한 이야기를 다시 기록할 신동아 ‘60주년 기념 좌담’을 기약하자”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회원들이 세상을 등지거나 병석에 눕게 돼 60주년 좌담회는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좌담회 사회자는 유민영(85) 단국대 명예교수였다.
10월 4일 만난 유 교수는 여전히 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의 열정과 이들이 신동아에 대해 가졌던 인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좌담회를 기획하고 연출한 40대 중반의 연극 비평가는 어느새 당시 연구회 회원들 나이가 됐지만, 신동아와 극예술연구회의 ‘깊은 앙상블’을 말할 때에는 다시 그날로 돌아간 듯 해맑은 표정이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 연구회 회원들이 참여한 40년 전 신동아 좌담회는 어땠나요?
“당시 회원들은 연구회 창립 50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고 연구회를 조명하고, 자신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신동아에 대해 무척 고마워했어요. 아무도 자신들을 알아주지 않는데 신동아가 이들을 모셔 역사를 기록하니 매우 감격한 거죠. 사실 극예술연구회의 활동이란 게 당시에 매우 어려운 운동이었습니다. 연극은 광대와 천민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이 심할 때에 동경제대와 와세다대 등 일본의 일류대 출신 엘리트들이 연극배우로 출연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말 대담한 용기로 과감하게 실행한 사람들이었어요. 혈기왕성한 식민지 청년들의 사명감으로 뛰어든 거죠. 연구회가 활동할 당시에도 신동아가 많은 도움을 줬어요. 창간 당시 신동아 주간을 맡아 신동아 문화주의를 이끌었던 주요섭은 중국 후장대와 미국 스탠퍼드대 석사 출신이어서 해외에 관심이 많았고, 독자에게 해외 문학을 소개하며 견문을 넓혀주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연구회 회원이던 서항석, 함대훈은 창간호부터 ‘해외문단 시리즈’로 연재를 시작했죠. ‘글로벌한’ 신동아 문화주의 덕분에 연구회 회원들의 입지도 공고해졌어요.”
‘신동아’ 창간 50주년 기념 좌담 기사가 실린 기사(1981년 7월호). [황승경 제공]
‘글’과 ‘말’로 하는 농촌계몽운동
- 마침 같은 해에 신동아와 연구회가 세상에 나왔네요.“맞아요. 신동아와 연구회가 출현한 1931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당시 동아일보가 주축이 된 민족주의 진영은 1931년부터 농촌계몽운동 일환으로 문맹 퇴치를 위한 전국 모의 ‘브나로드(Vnarod)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의미인데, 제정러시아 말기에 젊은 지식인들의 농촌계몽운동입니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도 모두 브나로드의 일환이었지요.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국민 문맹률이 80%였어요. 그래서 갓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지식인들이 생각한 게 ‘말로 국민을 계몽하자’는 연극이었어요. 문맹률이 너무 높으니 말은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다른 방식의 브나로드 운동이 바로 극예술연구회인 셈이죠. 제 생각에는, 신동아도 그해에 보다 많은 대중을 계몽하려는 뜻으로 창간됐다고 봐요.”
- 그래서 시, 소설, 평론, 희곡 같은 해외 문학을 전공한 회원들이 ‘신동아 문화주의’의 단골 필진으로 대거 참여했군요.
“맞아요. 회원이 12명인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윤백남·홍해성 두 사람이었고, 나머지 10명은 모두 일본에서 문학 공부를 한 사람들이었어요. 그중에서도 서항석과 유치진은 영·미 희곡과 독일 희곡을 공부했고, 나머지 8명은 시·소설·평론 등을 전공한 문학도였어요. 그래서 신동아가 주창한 문화주를 잘 알았죠. 당시 우리나라 연극계는 창극(판소리를 여러 사람이 연기하는 무대 공연)과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극으로 양분됐는데, 그 틈바구니에서 극예술연구회가 비집고 들어온 셈이죠. 유학 시절 보던 서양 근대 연극의 흐름을 조선에서 심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테아트르 리브르’(인생의 진실한 모습을 무대에서 재현시키려 한 사실주의 소극장 연극운동)를 전개하려고 했어요. 다만 연구회는 극장을 꾸릴 재정이 안 되니 극장을 빌려 공연했죠. 1932년 여름에 고골리의 ‘감찰관’으로 본격적인 극단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홍해성·노천명·모윤숙…신동아가 바꾼 여성 예술인像
- 문학적으로 그들의 입지는 어떠했나요?“연구회 소속 일본 유학생 10명은 이광수·염상섭의 민족문학 줄기나 이기영·박영희의 프로문학(프롤레타리아 문학)과는 전혀 다른 해외 문학파였었습니다. 그들은 ‘민족’도 ‘프로’도 아닌 중간 입장에서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세계를 보려 했죠. 그들은 서적을 통해 그 나라의 예술, 정치, 사회, 문화를 경험한 민주주의적이고 정통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어요. 조선 땅에도 서양과 같은 보편적인 연극을 해야 한다는 르네상스 부흥운동을 펼친 겁니다. 이러한 연극적·문학적 두 흐름 속에서 이들의 위상은 재발견됩니다.”
- 일제의 견제도 심했겠네요.
“신동아도 1936년에 일제가 폐간시켰잖아요? 극예술연구회는 매월 발행되는 월간지가 아니다 보니 그나마 일제의 감시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지요. 당대의 수재들이 연극 단체를 만들어 8년간 고생스럽게 일본인들 앞에서 공연을 했으니 얼마나 감시가 심했겠어요. 서양의 것을 번역해서 소위 ‘삐딱한 것’을 하니 당연히 일제 검열도 심했어요. 이들은 (당시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더블린 에비소극장 저항운동에 앞장섰던 버틀러, 예이츠의 민족운동을 지향했어요. 1920~30년대 아일랜드 극작가들처럼 연극을 통해 민족저항운동을 전개하려 했지만 (아일랜드 극작가들처럼) 전부 저지당했습니다. 아일랜드 극작가 작품들은 모조리 검열에 걸려 뜻을 이룰 수 없었거든요.”
- 활동은 어떠했나요?
“실험소극장이라는 산하 조직을 만들어 소극장 공연을 본격적으로 준비했어요. 전문 배우는 홍해성뿐이었지만, 나머지 회원들도 공연에 배우로 참여했습니다. 신파극과 창극의 시야에서 사실주의극으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국민 수준을 높여야 해서 강연회를 주최했죠. 이 강연회는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 있던 젊은이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어요. 강연회를 하며 배우가 될 만한 인재를 선별해 본격적으로 배우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참여한 윤태림·윤석중·모윤숙·노천명·이해남·조용만 등은 이후 대한민국의 최고 지성이 되지요.”
- 모윤숙·노천명도 배우로 직접 무대에 섰군요.
“연구회는 연극계 분위기를 통째로 변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전에는 기생 출신 여배우가 많았지만 연구회 여배우들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었어요. 간첩사건으로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리는 김수임이나 경성보육학교 출신 김복진도 있었습니다. 노천명은 1932년 신동아에 시 ‘밤의 찬미’로 등단했으니 당시 신동아도 여성 문인의 개념을 바꾸었네요(웃음). 모윤숙도 신동아에서 작품 활동을 했지요. 돌이켜 보면 신동아, 연구회 모두 여성 예술인의 위상 정립에 큰 역할을 했어요.”
- 1981년 좌담회 때에는 고인이 돼 참여하지 못했는데, 연출자 홍해성은 어떤 분이었나요.
“홍해성은 신동아 창간 다음 호인 1931년 12월호 ‘연예란’에 연극에 대해 6쪽에 걸쳐 각기 다른 칼럼과 비평을 기고했어요. ‘어둠의 힘에 대하여’ ‘페트루키오와 카트리나 연출에 대하야’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는 연구회의 유일한 연출자였죠. 원래 법조인이 되려다 김우진을 만나 연극을 하기로 약속하고 예술과로 전과했습니다. 졸업 직전 일본 축지소극장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고국에서 연극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김우진이 1926년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죠.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실의에 빠졌다가 이후 연구회에 들어와 연극 활동에 전념했어요.”
- 연구회는 연극 단체라기보다는 1930년대 지성인들의 집합체였군요.
“맞아요. 주최자들도 당시 최고 인텔리들이고 거기서 배우겠다는 대학생들도 엘리트였죠. 후원회도 막강했어요. 후원회원 면면을 보면, 당대 최고 음악가인 현제명,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국어학자 이희승, 민속학자 송석하, 의학자이자 숙명여대 총장을 지낸 김두헌 박사, 시인 변영로가 있었고, 여성으로는 성신여대 설립자인 이숙종 여사, 추계예대 설립자 황신덕 여사 등 쟁쟁했어요.”
‘극예술연구회’가 발행한 잡지와 신문. [유민영 교수 제공]
“연구회는 ‘신동아 문화주의’의 증거”
- 우리나라 연극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신동아가 1981년에 연구회를 회자시켰을 때는 좌담회 사회자였지만, 올해에는 인터뷰이인 만큼 학자로서 하고 싶은 말이 방금 그 질문입니다(웃음). 연구회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우리 연극의 모태입니다. 현 국립극단 원류를 찾아가다 보면 연구회가 나옵니다. 인텔리들이 연극을 할 수 있도록 흡입하는 발판을 만들었지요.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연극이 천대받았지만, 연구회 활동 이후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연극에 뛰어들었어요. 이들은 편협하지 않은 세계주의에 입각해 리얼리즘을 추구한 주류 연극인이 됐습니다. 이처럼 연구회는 바로 ‘신동아 문화주의’의 증거입니다. 같은 해에 활동을 시작했고, 신동아는 연구회 회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줬죠. 50년이 지나 모두에게 잊혀갈 때는 이를 발굴했고, 지금 90주년에는 이를 재조명하니 말입니다.”
- 그렇군요.
“아마추어 연극인이라고 해도 연구회는 정신문화 활동으로 엄청난 시대적 변혁을 이뤘어요. 당시 좌담회에 참여한 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현재 우리나라 연극계는 철학이 약하다’며 매우 안타까워했어요. 일제강점기에도 건강하고 철저한 예술 정신으로 활동했는데, 자유 대한민국이 되니 오히려 상업성에 찌들었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연기력, 무대기술은 훨씬 좋아졌는데, 왜 르네상스 연극 정신은 약해졌는지 의아해했죠. 철학, 가치관, 목표의 진정성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창간 90주년을 맞아 신동아가 다시 극예술연구회의 가치를 기록한다니 이런 정신도 잊히지 않고 전승되겠죠. 안심이 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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