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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횃불 1964년 복간 ‘신동아’의 가치[창간 90주년]

“고난 겪으며 독자에게 영감 준 ‘신동아 정신’ 되새겨야”

  • 이봉범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초빙교수 bblee64@skku.edu

민주주의 횃불 1964년 복간 ‘신동아’의 가치[창간 90주년]

  • ● 1960년대 신문잡지 전성시대 연 복간 ‘신동아’
    ● “민주주의 창도하는 잡지”…民意 대변 의지
    ● 민족잡지·모지(母紙) 권위 결합, 독보적 위치
    ● 비판저널리즘이라는 값진 존재, 선두주자 발돋움
    ● 혁신적 편집과 기획으로 종합지 새 모델 제시
    ● 독립운동사 중심 근대사 복원, ‘민족잡지 표방’
    ● 실증을 무기로 독재 권력에 적극 항거
    ● 남다른 스케일의 특집으로 한국 사회에 담론 제시
    ● 공공성과 상업성 딜레마…매체 전략으로 돌파
    ● 잡지사, 독서문화사, 생활문화사 차원의 가치
1964년 9월 ‘신동아’는 이희승 동아일보 사장의 ‘민주주의의 기로에 서서’라는 복간사와 함께 복간됐다. 복간호는 초판 3만 부가 매진돼 이틀 만에 1만 부를 증쇄했다. [동아 DB]

1964년 9월 ‘신동아’는 이희승 동아일보 사장의 ‘민주주의의 기로에 서서’라는 복간사와 함께 복간됐다. 복간호는 초판 3만 부가 매진돼 이틀 만에 1만 부를 증쇄했다. [동아 DB]

1964년 9월 종합 월간지 ‘신동아’가 복간됐다. 1936년 9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여파로 정간된 지 28년 만의 일이다. 신동아는 1931년 11월 “민족적 경륜을 마련하는 터전”이라는 창간사와 함께 출범해 통권 59호를 발행한 뒤 ‘일시 정지’에 들어간 터였다. 그동안 신동아는 편집 내용 혁신을 거듭하며 한국 잡지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동시에 일제 총독부의 가혹한 검열에 맞섰다. 민족 및 사회의 공기(公器)를 자임하며 최고의 정론을 펼쳤던 신동아가 오랜 공백 끝에 복간된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한 문화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신동아 복간의 의미는 일제 탄압으로 강제 폐간된 비운의 민족 잡지가 복원됐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현대 잡지사 차원에서도 여러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신동아’ 복간 이후 잡지 창간 뒤이어

첫째, 신동아 복간은 국내 주요 신문사가 경쟁적으로 잡지를 발간하는 계기가 됐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 이후 또 한 번 ‘신문잡지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동아일보사는 1967년 11월 신동아와 더불어 폐간됐던 ‘신가정’의 후신 ‘여성동아’를 복간한다. 한국일보사는 ‘주간한국’(1964년 9월), ‘주간여성’(1969년 1월)을 차례로 선보였다. 중앙일보사에서는 ‘월간중앙’(1968년 4월), ‘주간중앙’(1968년 8월), ‘소년중앙’(1969년 1월), ‘여성중앙’(1970년 1월)이 나왔다. 경향신문사는 ‘주간경향’(1968년 11월)과 ‘소년경향’(1969년 8월)을, 조선일보사는 ‘주간조선’(1968년 8월)을, 서울신문사는 ‘선데이 서울’(1968년 9월), ‘소년서울’(1970년 4월)을 각각 창간했다. 이렇게 1960년대 후반 메이저신문사가 다양한 잡지를 발간하면서 잡지계에 종합지, 주간지, 여성지 등 분업화 및 전문화 경향이 뚜렷해진다.

둘째, 신동아 복간 후 신문을 모지(母紙)로 둔 신문잡지가 시장 주류를 장악하면서 국내 잡지 생태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1950년대 잡지 시장을 이끈 희망사, 신태양사, 학원사, 삼중당, 사상계사 등의 발간 잡지 대부분이 몰락하게 된다. 이 매체들이 전국적인 조직과 자본을 갖춘 신문잡지의 공세적 경영에 맞서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1955년 창간 이후 지속적으로 최고 발행부수를 기록한 ‘여원’이 1970년 자진 종간한 사례는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문잡지가 갖는 이점은 자본력과 조직만이 아니었다. 모지의 뒷받침으로 광고 및 판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가격경쟁력 면에서도 압도적인 비교우위를 가졌다. 정보력, 기획력, 취재력 또한 막강했다. 모지와 역할을 분담할 수 있어 특정 분야 전문성을 제고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러한 장점을 앞세운 신문잡지가 잡지계를 주도하면서 국내 잡지의 외연 확대와 질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신문잡지는 취약성 또한 지니고 있었다. 특정 신문 자본의 정파성이 개입될 여지가 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편집의 독립성 침해로 이어지기도 했다. 1974년 중앙정보부(중정)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 운동을 광고 탄압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 여파는 신동아와 여성동아에까지 미쳤다. 신동아도 백지 광고로 호응했으나 경영 타격은 불가피했다. 동아일보와 중정의 타협으로 신동아에도 광고 게재가 가능해지면서 당시 사건은 일단락됐으나 이내 반대 경우가 발생했다.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 때는 동아일보사 경영진 및 편집진이 교체되는 곡절을 겪었다.



셋째, 신동아 창간은 국내 잡지계에서 종합지 위상이 재설정되는 전기를 마련했다. 신동아 복간은 동아일보사가 종합미디어 기업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동아일보사는 1963년 4월 동아방송(DBS)을 개국하며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인쇄매체와 전파매체를 동시에 보유한 언론기관이 됐다. 이후 신동아 복간과 신문잡지의 연이은 창간으로 당시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기업으로 우뚝 선다. 종합미디어 체제 구축은 1960년대 국내 언론 기업의 보편적인 지향이었다. 동아일보사가 이를 선점한 것이다.

‘왜’와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 저널리즘 구현

종합미디어 체제에서 신동아 같은 종합지가 갖는 위상은 각별하다. 신문은 ‘무엇’과 ‘누구’에 중점을 둔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 기능에 주력한다. 잡지는 ‘왜’와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 해설과 논설을 담아내는 데 유리하다. 게다가 신동아는 월간이라는 간행 주기 덕에, 시사 의제를 심층 분석하는 데 장점이 있다. 그 덕에 언론기관의 권력과 영향력을 유지·확대하는 데 요긴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아일보사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조선일보사는 ‘조광’ 이후 종합지가 없는 점을 통한하며 종합지 창간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경향신문사 또한 1977년 2월 뒤늦게 ‘정경연구’를 인수해 종합지 영역에 진입하고자 했다. 동아일보사는 1960~70년대 언론 통제의 주된 표적이었다. 이때 비판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하는 신동아는 매우 값진 존재였다. 이러한 여러 요소가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신동아는 국내 종합지의 선두주자로 빠르게 발돋움했다.

신동아는 복간호 초판 3만 부가 매진돼 이틀 만에 1만 부를 증쇄했다. 이후 발행부수가 꾸준히 늘어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내 종합지 가운데 유일하게 평균 발행부수 5만 부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1960년대부터 본격화한 각종 베스트셀러 집계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잡지 전체로 보면 ‘여원’ 다음이었고, 종합지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베스트셀러였다. 복간 당시 종합지 시장을 주도하던 ‘사상계’와 ‘세대’를 가볍게 추월했다. 중앙일보사가 동종 잡지 ‘월간중앙’을 창간한 1970년대, 조선일보사가 ‘세대’ 판권을 인수해 ‘조광’ 후신으로 ‘월간조선’을 선보인 1980년대까지도 신동아의 압도적 우위는 이어진다.

신동아는 복간 이후 한 차례 결호도 없이 ‘가장 많이 읽힌 잡지’ 지위를 차지하며 장기간 종합지의 대명사로 군림했다. 주목할 점은 독자층이 다양하고 광범위했다는 점이다. 신동아는 세대, 지역, 계층, 젠더를 초월해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일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여성지, 학술지, 특수전문지와 구별되는 신동아만의 특징이었다. 해외 독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점도 특기할 사항이다. 신동아에는 해외교포의 투고가 유독 많았다. 신동아가 당대 독자의 기대 수준을 상당 부분 충족시켰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신동아가 복간 이후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은 민족잡지로서의 정통성, 동아일보의 권위를 바탕으로 신문잡지의 장점을 극대화한 결과였다. 그러나 신동아가 당시 기울인 각고의 노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동아 편집진은 제작 단계에서 잡지 편집 방식을 일신해 대중교양지로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판매 단계에서도 1969년 4월 기준 10개 지사, 503개 지국, 884개 분국 등 총 1380개의 전국 보급망을 보유했다. 일본, 미국, 베트남 등 해외지국 또한 개척했다.

1966년 2월호부터 정기구독제도를 시행해 경쟁 매체를 압도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렇듯 안정적인 발간, 많은 발행부수, 다양한 독자층 확보 등은 차별화된 편집 전략과 선순환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동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물론 신동아가 당시 지녔던 권위의 실질은 그 지면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신동아는 박정희 정권과 언론이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점에 복간했다. 범국민적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고조되던 시기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윤리위원회법’ 제정을 강행하며 언론을 길들이려 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의 언론 규제 강화 시도에 언론 단체가 반발한 사건이다. 파동은 권력과 언론의 타협으로 진정되는 수순을 밟았지만 당시 모든 언론사는 순응과 저항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신동아는 이때 복간사에 맞게 “민주주의를 창도하는 잡지”를 표방했다. 독재의 부조리와 권력의 반민주성을 고발해 진정한 민의를 대변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신동아 편집 및 지면 제작 전반에 반영됐다.

신동아는 ‘망라주의’를 편집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1931년 창간 때부터 지속된 망라주의 편집은 당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제작된 모든 종합지가 채택한 관습적인 원칙이었다. 신동아 또한 ‘민족의 잡지’와 더불어 ‘읽히는 잡지’를 추구했기에 망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당연했다.

시사성 있는 논픽션 중심 편집…차별화 추구

1971년 1월호 서울 청계천 ‘평화상가 르포르타주’에 실린 화보. 신동아의 르포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탐사보도가 주를 이뤘다. 당시에는 드물게 화보를 제공해 현장감을 높였다. [동아 DB]

1971년 1월호 서울 청계천 ‘평화상가 르포르타주’에 실린 화보. 신동아의 르포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탐사보도가 주를 이뤘다. 당시에는 드물게 화보를 제공해 현장감을 높였다. [동아 DB]

신동아는 지면을 특집 및 기획물, 좌담(방담, 정담, 대담 인터뷰), 논픽션(수기, 평전, 회고, 전기 등), 문예물, 르포르타주, 백서(白書), 화보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했다. 이외에 칼럼, 서평, 별책 부록 등도 주기적으로 연재했다. 구성 자체는 다른 잡지와 크게 구분되지 않지만 지면 배치에서는 다른 종합지들과 다른 특징이 발견된다.

신동아 편집의 중심에 위치한 특집과 기획은 국제질서의 변동과 국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시의성이 뚜렷한 의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나 신동아 특집란은 남다른 데가 있다.

1965년 1월호와 2월호에 나눠 실린 ‘전후 20년의 학문과 예술’ 특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모된 세계상에 대한 이론과 기술의 전개를 28개 분야로 세분해 정리한 기획이다. 방대한 규모의 특집은 ‘신동아’의 깊이를 더했다. [동아 DB]

1965년 1월호와 2월호에 나눠 실린 ‘전후 20년의 학문과 예술’ 특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모된 세계상에 대한 이론과 기술의 전개를 28개 분야로 세분해 정리한 기획이다. 방대한 규모의 특집은 ‘신동아’의 깊이를 더했다. [동아 DB]

첫째, 특집 규모가 남다르다. 가령 ‘전후 20년의 학문과 예술’(1965년 1· 2월)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변모된 세계상에 대한 이론과 기술의 전개를 28개 분야로 세분해 정리한 기획이다. 당시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특집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도전하는 붉은 대륙’(1965년 5월), ‘한국과 미국’(1966년 9월), ‘농촌’(1969년 11월) 등의 특집도 눈길을 끌었다. 이들 특집은 평균 6편 이상의 논문으로 구성됐다. 비슷한 시기 다른 종합지가 특집 지면을 4편 내외의 소논문으로 구성한 것과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규모 외에도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특징은 신동아가 특집 주제에 대한 심층적 접근을 시도한 점이다. ‘교육의 지표를 찾아서’(1966년 2월)의 경우 관련 전문가 논문 5편 외에 백서, 심포지엄, 인터뷰, 좌담회, 외국학자 논문 등으로 구성했다. 당시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인 한국 교육 문제의 현황과 본질을 저인망식으로 다룬 게 특징이다. 1966년을 ‘아시아의 해’로 정하고 관련 특집을 5번 연속 구성한 점도 눈길을 끈다. 신동아는 이처럼 거시적인 계획 아래 민감한 의제를 다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매체의 전문성을 높이고자 했다. 이러한 특집 체제는 신동아만의 독보적인 특징이었다.

둘째, 지상 심포지엄을 개설해 학술적 토론의 장 기능을 수행했다. ‘신문화 60년 기념’(1968년 6~12월), ‘1970년대의 한국’(1970년 1~3월), ‘한국사의 거시적 재구성과 대중화’(1971년 1~5월) 등 학계, 문화계 핵심 쟁점을 다룬 심포지엄은 학술적 논쟁거리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창구 구실을 했다. 동시에 지식인들에게 현실 참여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신동아 자체가 ‘공론의 장’이 돼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선 것도 의미 있는 시도였다.

셋째, 장기 기획 연재를 통해 역사 자료를 발굴하는 성과를 거둔다. 대표적으로 ‘3·1운동 50주년 기념 시리즈: 광복의 증언’(1969년 3~12월), ‘일제고등경찰이 내사한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비밀정보’(1967년 1~8월), ‘잡지를 통해 본 일제강점기 근대화운동’(1966년 1~7월), ‘한국사의 조류’(1972년 5월~1973년 7월), ‘개항 100년 특별기획’(1975년 1~12월) 등이 있다. 신동아는 대체로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사의 중요 자료를 발굴·고증하는 데 주력했다.

그 성과는 아카데미즘 수준을 능가했다. 또한 학계의 일제강점기 연구를 자극해 식민사관 극복과 1960년대 후반 한국학 붐 조성에 일조했다. 이런 연재물은 일제강점기 사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던 동아일보사만이 할 수 있는 기획이었다. 신동아가 류주현의 소설 ‘조선총독부’를 시작으로 1970년대까지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조명한 작품을 잇달아 연재한 것도 근대사 복원 구상의 연장선에서 의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독립운동사 중심의 근대사 복원은 신동아의 ‘민족잡지 표방’이 결코 허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신동아가 강조한 것은 개발독재가 주도한 변질된 관 주도 민족주의나 민족의 정서적 우수성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신동아의 민족주의는 결을 달리했다.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신동아의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가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에 대응하는 현실적 준거를 제시했다.

한편 신동아 편집의 백미는 논픽션, 백서, 르포다. 1930년대 신동아의 중심은 정치논설과 문예였다. 복간 이후 지면 구성에서 문예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줄었다. 이는 문인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동시대 잡지 ‘세대’와도 뚜렷이 구별되는 대목이다. 신문 편집의 색채가 강하게 투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시사에 전문성이 있는 저널리스트 중심의 편집진과 집필진을 일관되게 고수한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이는 신문잡지의 장점이 발휘된 결과다. 신동아는 복간 후 시사성을 매개로 당대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동으로 인한 의제를 수렴해 비판적으로 해부하는 저널리즘을 지향했다. 초창기 신동아를 보면 이러한 특징이 도드라진다.

신동아는 복간 당시부터 매년 논픽션 공모전을 열어 서민의 글쓰기를 권장했다. 여타 종합지가 주로 문예를 통해 대중에게 다가선 것과 달리 신동아는 미개척 분야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논픽션을 특화해 독자 참여를 확대하려는 전략이었다.

투명한 공모와 심사를 통해 선정한 논픽션 당선작은 대부분 민초의 체험 수기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변을 겪은 이들의 생생한 삶의 기록이 주를 이뤘다. 집필자는 상궁, 학병, 전쟁포로, 나환자, 엿장수, 파독 광부, 남사당패 단원, 이민자, 농촌여성, 버스안내양, 장돌뱅이, 소매치기, 월부책 장사, 야경원, 집배원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아웃사이더가 많았다. 1970년대까지 신동아에 소개된 논픽션 100여 편을 모아 보면 전통과 근대를 아우른 서민 삶의 총체적 보고서가 된다.

1965년 제1회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에 ‘순교보(殉敎譜)’로 당선된 이사례(1923~2009) 권사. 이 권사는 순교보에서 아버지 이기풍 목사의 선교 일대기를 다뤘다. 신동아는 복간 당시부터 매년 논픽션 공모전을 열어 독자 참여를 유도했다. [동아 DB]

1965년 제1회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에 ‘순교보(殉敎譜)’로 당선된 이사례(1923~2009) 권사. 이 권사는 순교보에서 아버지 이기풍 목사의 선교 일대기를 다뤘다. 신동아는 복간 당시부터 매년 논픽션 공모전을 열어 독자 참여를 유도했다. [동아 DB]

전통과 근대를 아우른 서민 삶의 총체적 보고서

신동아 논픽션 공모는 전문 작가가 독점해 온 글쓰기 영역을 대중에게 확대하고, 하위문화로 치부되던 수기 장르를 주류 문학으로 부상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특히 논픽션 공모를 기반으로 해 서민의 주체적 글쓰기를 활성화함으로써 대중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구현한 것은 잡지 매체를 통한 민권 신장의 징표로 보기에 손색없다.

신동아 르포는 꼭지명을 ‘르포·이색지대’로 시작했다가 1967년부터 인물 중심의 ‘오늘을 사는 한국의 서민’으로 변경했다. 1970년대까지 140여 편이 게재되는데, 초기 르포 대상은 미군부대 주변, 폐광촌, 나환자촌 등 소외된 지역이 주를 이뤘다.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초래된 사회병리의 다양한 이면을 고발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했다.

이후에는 점차 그 범위를 넓혀 공론장에서 쟁점이 된 주제를 심층 취재한다. 소재는 부동산투기·재벌·산업재해 등 경제 문제, 쌀값, 새마을운동 등이었다. 신동아는 이러한 소재를 통해 서민 생활과 직결된 현안을 주로 다뤘다. 화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르포의 가독성을 높이려는 시도도 했다. 기자들이 담당한 르포는 공통적으로 문제적 사안의 객관적 실태와 그 병폐를 다뤘다. 이들 르포는 문제의 원인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종합보고서 같았다. 르포는 여타 종합지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하지만 신동아에 와서야 비로소 규모와 체계 그리고 지속성을 갖춘 르포가 완성됐고, 이것은 이후 등장하는 종합지 기사의 롤 모델이 된다.

돋보이는 별책 부록,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워

1969년 1월 ‘신동아’가 개최한 좌담회. 김진만 공화당 원내총무(왼쪽)와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오른쪽). 신동아의 편집 구성은 특집, 좌담, 논픽션, 문예물, 르포르타주, 백서(白書)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울렀다. [동아 DB]

1969년 1월 ‘신동아’가 개최한 좌담회. 김진만 공화당 원내총무(왼쪽)와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오른쪽). 신동아의 편집 구성은 특집, 좌담, 논픽션, 문예물, 르포르타주, 백서(白書)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울렀다. [동아 DB]

신동아 백서(white book)는 한국 잡지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편집 요소다. 르포에 비해 좀 더 길고 자세한 심층 보고서로서 논평 성격이 강하다. 신동아 백서는 개발 동원 체제의 모순과 병폐를 두루 다루며, 주로 정경 연합체인 지배 권력의 비리를 파헤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복간호의 ‘정치자금-한국민주정치의 비용’은 정쟁과 부정부패의 온상인 정치자금 문제를 외국 사례와 비교해 파헤쳤다. 이를 시작으로 육사8기생, 재건국민운동, 울산공업센터, 차관 등 권력 구조의 모순, 정부의 실책, 정경유착 비리 등 박정희 정권의 내막, 흑막을 비판적으로 해부했다. 정부 정책 성과를 소개하고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는 데 주력한 정부 공식 보고서에 맞선 대항적 보고서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권력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1968년 12월 게재된 백서 ‘차관’은 정부 외자도입 정책의 공과를 다뤘다. 차관 업체들의 특혜와 폭리 실태를 분석한 이 기사로 신동아는 필화 사건을 맞는다. 이를 계기로 신동아가 중정의 감시와 통제에 갇히고 정치 비판과 심층보도가 대단히 어려워지면서 향후 백서의 비판적 논조가 상당 부분 퇴색했다. 이후 유신체제를 겪은 뒤 백서는 논평을 배제한 다큐멘터리로 대체되고 만다. 백서는 신동아가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목표로 삼았음을 증명하는 지면이다. 종합지의 시대적 소명이 가장 잘 발현된 편집이었다.

신동아 편집에서 별책 부록 또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책 못지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동아는 매년 신년호에 별책 부록을 발행했다. 1965년 ‘광복 20년 기념 연표, 주요문헌집’을 비롯해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1968), ‘세계의 인권선언’(1975), ‘일정 하의 금서 33권’(1977), ‘전후 세계를 움직인 문제 논설’(1979) 등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근현대사의 중요 의제를 자료적으로 복원하는 걸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별책 부록에는 발굴 자료 소개, 좌담회, 관련 자료 목록 등이 담겨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종합지의 별책 부록 발행은 1930년대 ‘삼천리’가 시도한 뒤 명맥이 끊겼다가 광복 후 여성지가 매호 발행하면서 관행으로 자리 잡게 된다. 어찌 보면 과당경쟁의 산물로, 잡지출판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지목됐다.

신동아 별책 부록은 수준이 달랐다. 1년 단위로 기획함으로써 충분한 자료 조사와 엄격한 고증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에 신동아 별책 부록은 당대보다 오히려 현대에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별책 부록 존재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보존도 제대로 돼있지 않은 형편이다. 개인적으로 별책 부록만이라도 재발간해 관련 분야 연구 자료로 널리 활용할 수 있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잡지의 생명력은 공공성과 상업성의 조화에서 나온다. 한쪽이 편중되면 독자가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 잡지사에 등장한 수많은 잡지 수명이 짧았던 근본 이유다. 사라진 잡지 대다수는 근대 경영체제로 전환된 1960년대 이후부터 독자의 욕망과 시대정신 추이를 민감하게 고려해야 했다.

공공성과 상업성 사이 딜레마를 신동아는 특유의 매체 전략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편집 체제 및 지면 배치, 논조 등을 종합해 볼 때 신동아의 매체 전략은 시사성, 정론성, 대중성으로 파악된다. 시사성을 중심으로 정론성과 대중성이 상보적으로 결합한 체계다.

시사성은 종합지의 본질이다. 종합지는 단순한 보도보다는 사회성이 강한 시대적 현안을 의제화해 담론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신동아는 참신한 기획과 시사적인 의제 중심의 편집으로 시사성의 최대치를 구현했다. 특집과 기획물, 르포, 백서를 통해 한국 사회 전반의 저변을 탐색했고 병리적 현상을 폭로, 고발했다. 신동아의 시사성은 잡지의 공공성을 높이는 기초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획력, 정보력, 취재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실현 가능했다.

시사성·정론성·대중성 결합해 ‘시사 교양’ 새 영역 개척

1964년 9월부터 류주현(1921~1982) 작가가 ‘신동아’에 3년간 연재한 대하소설 ‘조선총독부’. 신동아의 한국 근대사 조명은 ‘민족잡지’라는 신동아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삼성출판박물관 제공]

1964년 9월부터 류주현(1921~1982) 작가가 ‘신동아’에 3년간 연재한 대하소설 ‘조선총독부’. 신동아의 한국 근대사 조명은 ‘민족잡지’라는 신동아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삼성출판박물관 제공]

이러한 시사성은 신동아의 정론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잡지 편집에서 무엇을 다루었는지 문제 이상으로 그것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즉 논조가 중요하다. 의견 잡지를 지향한 신동아의 기본 논조는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 비판이었다. 그래서 신동아는 당시 종합지 지형에서 항상 야당지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특정 정파 입장을 대변한 것은 아니다. 철저히 실증적 보도를 무기로 삼았기에 사회적 파급력이 컸다.

그래서 당시 신동아가 다룬 주제 자체가 불온한 것이었고 비판적 논조는 더더욱 불온한 것으로 간주됐다. 중정이 백서 ‘차관’ 필화에 이어 ‘북괴의 중소분쟁’(1968년 10월)을 반공법 위반이라 문제 삼아 신동아의 기반을 완전히 붕괴하려고 한 것도 신동아가 비판적 저널리즘에 충실한 매체였기 때문이다.

신동아가 비판적 태도만 견지한 것은 아니다. 대안을 모색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신동아는 관권, 특권을 거부하고 민권, 인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했다. 신동아에 여러 차례 게재된 ‘~상(像)’시리즈에서 이러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신동아는 ‘한국의 정치상’(1965년 5월)을 비롯해 행정상, 경제상, 교육상, 대학상, 종교상, 농촌상, 지식인상 등을 지면을 통해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심포지엄을 기획해 비전을 구체화하고 그 필요성을 사회에 환기하고자 노력했다. 신동아의 정론성은 권력과 불화하며 부침을 겪는 원인이 됐지만 동시에 종합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표본이기도 했다.

시사성은 신동아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잡지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독자에게 읽히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신동아는 독자 친화적인 편집과 대중 참여 기회를 확대하는 기획을 통해 대중성을 제고했다.

그 결과, 최고의 판매부수를 자랑했고 지식인 사회를 넘어 폭넓은 독자층에게 두루 사랑받았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동아가 추구한 대중성이 시사교양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일방적인 계몽을 강조한 과거의 종합지, 선정적인 기사와 화보를 내세운 대중오락잡지, 문학 중심 교양을 지향했던 여타 종합지와 차별화된 행보였다. 중산층의 소장 욕구를 자극한 호화스러운 문학전집, 지적 허영심을 부추긴 속물 교양지와도 구분된다.

오늘날의 ‘신동아’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긴 역사를 자랑하는 신동아를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방향에서 접근하든 신동아의 지면에서 출발하지 않은 평가는 신동아의 실체를 왜곡할 우려가 크다. 신동아 편집의 실제와 체계를 살피면 신동아가 종합지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민족, 민권, 민주 잡지로서의 지향과 실천 의지가 지면에 촘촘히 스며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잡지가 미디어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오늘날, 여전히 매월 독자와 만나는 신동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신동아는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궁금하다. 종합지의 의의가 최소한으로라도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1930년대부터 갖은 고난을 겪으며 이름 모를 수많은 독자에게 영감을 제공한 ‘신동아 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제 ‘역사’로 기록되는 신동아 지면에서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동아가 잡지사, 독서문화사, 생활문화사 차원에서 최적의 보고(寶庫)라는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복간신동아 #잡지전성시대 #신동아90주년 #신동아



신동아 2021년 11월호

이봉범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초빙교수 bblee64@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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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횃불 1964년 복간 ‘신동아’의 가치[창간 9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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