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이건희가 “월급 두 배 올려라”고 말한 사연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㊻]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은 인센티브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4-03-08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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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식 前 사장 “회장은 학벌 중요시하지 않았다”

    • 삼성은 평범한 俊才들이 뛰어난 성과 내는 회사

    • “기본만 되면 가르쳐서 名馬로 만들겠다”

    • ‘인재 경영’에서 한발 나아가 ‘天才 경영’ 강조

    • 국내 최초 대졸 여사원 공채, 나라 전체 센세이션

    • B급 10명보다 A급 1명, A급 10명보다 특급 1명

    • 반드시 초일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



    노인식 전 삼성중공업 사장은 삼성그룹에서 30여 년간 인사 업무만 한 인사 전문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비상경영 콘트롤타워이던 구조조정본부(옛 비서실) 인사팀장도 8년을 했다. 삼성 안에서 이런 기록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그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와 가까운 전직 삼성 계열사 사장에게 부탁해 겨우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인사 업무는 특성상 보안이 생명이다. 그와의 만남이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사진 찍는 것도 한사코 거부하면서 “기자를 만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에서 첫눈에도 신중하고 합리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삼성반도체의 시작, 삼성반도체통신

    호암은 1983년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기 전 삼성통신을 세워 토대를 만들었다. 사진은 198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삼성반도체통신 현지 법인. [삼성 60년사]

    호암은 1983년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기 전 삼성통신을 세워 토대를 만들었다. 사진은 198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삼성반도체통신 현지 법인. [삼성 60년사]

    우선 지나온 삶이 궁금했다.



    언제 입사했나요.

    “1977년 11월에 공채 입사했습니다.”

    처음 배치받은 곳은 어디였나요.

    “수원이요. 삼성전자 본사 겸 TV와 냉장고 만드는 가전 공장이 있었죠. 건물도 컨테이너로 지은 막사였습니다. 삼성전자가 만들어진 게 1969년이고 제가 입사한 게 1977년이니까 회사 역사가 10년도 채 안 되던 때였죠. 도로도 포장도 안 된 흙길이어서 수원 매탄동 골짜기에 비만 오면 장화 신고 출근할 정도였습니다. 신입사원 교육을 열심히 받고 있는데 두어 달 뒤였나, 갑자기 신규 사업팀으로 가라는 발령을 받았어요.”

    무슨 일이었나요.

    “통신회사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미국 대형 통신회사인 GTE(제너럴 텔레콤 이코노미)와 합작하는 거였는데 삼성전자로서는 신사업에 진출한 거였습니다. 수원 다니는 게 영 낯설고 힘들었는데 사무실이 서울 중구 태평로 본관 건물이어서 내심 좋았어요. 인사 업무를 했는데 신생 회사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집안 단속하느라 바빴습니다.”

    집안 단속이라뇨.

    “그때만 해도 삼성전자가 어려웠어요. 본사도 어려운데 신생 회사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죠. 2년 반 뒤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하기 전까지 완전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그룹 차원에서 통신업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여서 사무실도 태평로, 명동, 구로동으로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월급을 봉투에 담아 현찰로 주던 시절이었는데 제가 본사에 가서 받아왔지요. 다른 계열사 다 나눠주고 저녁 7시나 돼야 맨 마지막에 받아 나왔어요. 보너스도 제일 적었고요. 경영진은 미국인 두 명에 한국 직원들은 이공계 전자과를 졸업한 석·박사 50, 60명 정도였어요. 대부분 서울대 출신으로 사설 교환기 시스템이나 통신을 공부한 사람들이었죠.

    처음에는 꿈을 갖고 삼성에 왔는데 회사에서 대접을 잘 안 해주니까 많이 나갔어요. 미국에서 스카우트돼 온 분들이 다시 돌아간 경우도 있었고요. 회사가 워낙 작으니까 인사 업무는 저 혼자 했고 관리 총무 등 행정직은 한 10명 됐겠네요.”

    가전(家電)이라는 메인 사업에서 어떻게 보면 밀려난 건데 잘 버텼네요.

    “보고서도 읽고 기술자들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하니 통신사업이란 게 앞으로 ‘뜨는 사업’이 될 것 같다, 좀 참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앞이 잘 안보였는데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하면서 빛을 보게 됐습니다. 당시 통신업이란 게 옛날 기계식 구닥다리 전화기 만드는 게 주업이었죠. 그런데 그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습니다. 금성통신 지금의 LG와 동양통신, 나중에 OPC가 되는 두 회사가 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LG가 시장점유율 70%, OPC가 30%가량 됐죠. 1970년대에 전화기 한 대 값이 얼마였는 줄 아세요?”

    집 한 채 값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맞아요. 옛날 영화나 다큐멘터리 같은 거 보면 이쪽에서 전화를 걸면 중간에 사람(교환원)이 받아서 수신자 교환기에 일일이 꽂아주던 거 본 적 있나요.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죠.

    수동식 교환기를 전자식으로 바꿔야 한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경북 구미에 전자식교환기를 연구 개발하는 ‘한국전자통신’이라는 회사를 만듭니다. 국내 기술이 없으니까 해외에서 배워 와야 하는데 한국에 기술을 주겠다는 나라가 아무 곳도 없어서 연구가 지지부진했죠. 이걸 민간에 매각하면서 신설 법인 ‘삼성GTE’가 1980년 2월에 인수합니다. 나중에 이 회사가 반도체와 합쳐지는데 사실상 여기서부터 반도체 사업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사장단 회의는 서열 중시 자리 배치에서 원탁 형태로 바뀐다. [삼성 60년사]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사장단 회의는 서열 중시 자리 배치에서 원탁 형태로 바뀐다. [삼성 60년사]

    호암 창업 회장이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이후 초기에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때 통신업에서 거둔 성과가 큰 도움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도체 사업부가 통신과 합쳐져 ‘삼성반도체통신’이 되는데 제가 인사과장으로 갑니다. 말씀한 대로 이때 통신에서 거둔 수익이 반도체 적자를 메우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전화기가 기계식에서 반(半)전자식으로 바뀌면서 연간 매출 2000억 원, 이익이 300억 원씩 나는 회사로 컸습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조 단위입니다. 게다가 물량 100%를 체신부(현재 우체국)에 납품해 따로 영업할 필요도 없었고, 이익을 원가의 몇 %로 보장받는 구조여서 원가 상승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삼성반도체통신이 다시 반도체와 통신으로 분리되면서 삼성통신 인사과장을 하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 반도체, 통신, 가전이 모두 전자로 통합되면서 전자 인사부장을 맡는다. 이후 1993년 신경영 선언이 시작되면서 지역전문가 제도 등 이건희 회장의 다양한 인사 개혁 조치가 실시되던 현장에서 일하다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파고와 맞닥뜨린다.

    1987년 10월 22일 경기 기흥에서 열린 삼성종합기술원 준공식. 삼성 기술 경영의 산실이다. [삼성 60년사]

    1987년 10월 22일 경기 기흥에서 열린 삼성종합기술원 준공식. 삼성 기술 경영의 산실이다. [삼성 60년사]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끔찍해요. 새벽 4시, 5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퇴근했는데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재무 쪽은 회사를 파는 게 일이었고, 인사 쪽은 사람 자르는 게 일이었으니까요. 삼성그룹 전 직원이 16만 명이었는데 11만 명까지 줄였습니다. 임원도 2000명에서 1200명으로 줄고요. 그 숫자는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계열사마다 ‘몇 명 자를 거냐’ 명단 갖고 오라고 비상 회의를 할 때였죠. 퇴직금은커녕 월급도 못 줄 판이니 그나마 회사에 현찰 있을 때 빨리빨리 희망퇴직을 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은행들은 빚 갚으라고 난리고 하루하루 피가 말랐습니다. 속상하니까 낮술도 먹고…. 그렇게 1년 반을 살았습니다. 다들 사람 꼴이 아니었어요.”

    그때 이건희 회장은 뭐라고 했나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어려움은 지나간다’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자, 참고 견디자’ ‘최대한 절약하고 미래를 대비하자’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핵심 인력은 잘 지켜야 한다’…. 정말 의연하고 담담하셨죠. 큰 방향과 지침만 주셔서 구조본이 자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졌습니까.

    “1999년 하반기까지였던 것 같습니다. 임원들 보너스는커녕 월급을 계속 깎고…. 직원들은 차마 월급을 못 깎고 인원을 계속 줄일 수밖에 없었어요.”

    제일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다면요.

    “IMF 직전 해에 이익이 많이 나서 승진을 많이 시켰는데 1년 만에 잘라야 하는 경우였습니다. 어떤 계열사는 임원이 20명 정도였는데 3분의 1까지 줄였어요. 이 중에는 승진 갓 1년 넘긴 사람들도 있었고요. 1999년이 지나면서 반도체 경기가 다시 살아났고 국내 상황도 분위기가 좀 나아졌습니다.

    그래도 2000년까지는 모든 걸 현상 유지 상태로 갔어요. 축의금, 부의금도 제대로 못 주고 복리후생비도 깎고 근속상 부상도 없앴는데 2000년 말에나 겨우 원상회복했어요. 계열사마다 사정이 제각각이어서 삼성전자 같은 데는 워낙 크다 보니 회복하는 데 10년 이상 갔던 것 같아요.”

    외환위기 지나고 구조본 인사팀장을 꽤 오래 한 걸로 압니다만.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했습니다. 2001년부터는 ‘황금시대’가 왔어요. 반도체가 명실상부 세계 1등을 확고히 하고 휴대전화, TV도 잘되고 중공업, 엔지니어링 등등 하는 것마다 다 잘됐으니까요. 지옥에서 천국으로 간 거죠. 임원 승진도 제일 많이 시켰고 포상도 많이 줬어요.”

    지난 회에서 소개한 이승현 인팩코리아 대표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노 전 사장을 “가장 고마웠던 선배”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 대표 말이다.

    “제가 현대중공업에 있다가 삼성중공업으로 스카우트돼 갔는데 6개월 만에 회사가 어려워졌어요. 경영진도 바뀌고. 그때 노 선배님이 삼성반도체통신 인사과장이셨는데 제게 ‘꿈을 펼쳐보라’며 PC사업팀으로 서울 발령을 내셨어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동기부여가 됐는지 몰라요. 제게는 은인이죠. 학연이나 지연으로 맺어 있거나 함께 일을 해본 사이도 아닌데 참 잘 품어주셨습니다. 다른 직원들을 대하실 때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다시 노 전 사장에게 물었다.

    인사 업무를 그렇게 오래 맡은 비결이 있다면 뭘까요.

    “모르죠. 뭐. 굳이 생각해 보면 좀 무색무취한 면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삼성이 경상도 사람 많다고 하는데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저만 해도 서울에서만 쭉 자라온 사람입니다. 삼성은 지연이나 학연으로 모임을 하는 이런 문화가 아니에요. 그런 걸 워낙 터부시했어요.”

    조용상 전 삼성JAPAN 대표이사도 “그룹에서 뛰어난 경영 실적을 올리고 크게 성공한 경영자는 학벌이 뛰어나거나 처음부터 능력이 뛰어난 이들은 아니었다”면서 이렇게 전했다.

    “삼성에는 평범한 준재(俊才)들이 뛰어난 성과를 내는 경우가 많았고, 입사 때에도 학업 성적은 B학점 정도만 요구했습니다. 이런 건 인재를 양성하는 데 이건희 회장이 가진 어떤 자신감이었다고 봅니다. ‘기본만 되면 내가 가르쳐 명마로 만들겠다’는 자신감 말이죠.”

    호텔신라 빵 맛을 좋게 하려면

    생전에 이건희 회장이 사장단 회의를 통해 ‘인재’에 대해 거의 광적이라고 할 정도로 집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육현표 전 에스원 사장의 말이다.

    “선배들 이야기도 그렇고, 제가 직접 본 사장단회의 자료를 봐도 회장님은 실적을 두고는 사장들을 질책한 적이 없었습니다. 질책할 때 이유는 딱 한 가지 ‘왜 좋은 사람을 뽑지 않느냐? 왜 좋은 사람을 키우지 않느냐?’ 였습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모 계열사 사장이 중장기 경영계획을 보고했더니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당신이) 1년 후를 어떻게 알고 3년 후, 5년 후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걸 알 수 있는 사람을 키우라’고 했다는 겁니다.”

    배동만 전 제일기획 사장도 기자와 만났을 때 이런 에피소드를 전했다.

    “호텔신라 이사로 일할 때인데 어느 날 전화로 ‘호텔 빵 맛이 너무 없다’고 마구 야단을 치셨습니다. ‘어떻게 할 거냐?’고 하시기에 ‘캐나다 밀가루를 쓰고, 발효 등 공정, 수증기의 양, 굽기 온도, 에이징(aging) 등을 깊이 관찰하겠습니다. 직원들을 프랑스나 일본으로 연수도 보내겠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답을 했죠.

    그랬더니 ‘엉뚱한 답을 하고 있다’며 ‘(전화) 끊지 않고 기다릴 테니 답을 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머릿속을 초고속으로 돌렸죠. 갑자기 번쩍 생각이 스쳤습니다. ‘유능한 기술자를 스카우트하겠습니다’ 했더니 그제야 ‘왜 알면서도 못 하느냐’고 끊으셨어요. 빵을 잘 만들려면 뛰어난 기술자를 데려오면 된다는 말은 결국은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노 전 사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회장은 경영하면서 많은 난제와 부딪힐 때마다 답을 ‘사람’에서 구했고 5년, 10년 미래를 구상할 때도 돌파구의 열쇠는 결국 ‘사람’이 쥐고 있다는 걸 믿었던 분이었습니다.”

    삼성은 2000년이 지나면서 세계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가 확고해지는데 이 회장은 평소 강조해 온 ‘인재 경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천재 경영’을 강조한다. 노 전 사장이 비서실(구조본) 인사팀장을 하던 시절이다.

    “2001년으로 기억하는데 IMF 시기를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당시 회장은 ‘삼성이 지금 잘나간다고 하지만 5년 후, 10년 후 과연 뭘로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어느 날 MIT 경영대학원장을 만날 때 제가 배석했는데 이때에도 ‘5년 후, 10년 후 뭘 해야 됩니까’ 물었습니다.

    대학원장이 ‘경제학이나 경영학에서 여태까지 장기 예측해서 맞은 것이 한 번도 없다. 결국 사람밖에 없다’고 하자 회장은 ‘맞다. 우리가 하는 사업에만 관련된 사람을 뽑을 게 아니라 포괄적으로, 지금은 관련이 없지만 언젠가는 연관성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이후 핵심 인력 선발과 인재 양성에 관한 주문이 더 많아졌습니다.

    사장들로부터 영입 인재 리스트 보고를 받을 때 영 마뜩지 않아 하셨습니다. ‘핵심의 ‘핵(核)’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핵심 인력을 뽑겠다고 하는데, 제대로 뽑겠는가, 사장이 직접 뛰지 않고 아랫 사람들에게 인재 찾아오라고 보고나 받고 그런 식으로 되겠는가? 업무의 3분의 1을 인재 뽑는 데 쓰라’고 하셨죠.

    저희로서는 고충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IMF에서 벗어난 지 불과 몇 년이 지난 한국에 글로벌 핵심 인력들이 선뜻 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 회장이 천재를 데려오라고 주문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2001년, 2002년 메모리가 1등 자리를 굳히고 휴대전화도, TV도 최고가 되니까 이제는 추격자가 아닌 퍼스트 무버로서 자리를 유지하고 지키는 게 중요해졌습니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넘사벽 삼성’을 만들어야 하는데 결국 최고 인재를 얼마나 데리고 오느냐가 관건이라는 의미에서 ‘천재 경영’을 내세우신 겁니다. 이후 인재 스카우트에 한층 가속도가 붙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인재들을 많이 뽑은 덕분에 나중에 모바일 시대가 열리면서 애플에 맞서 갤럭시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봅니다.”

    ‘기술 인력 맵’부터 만들라

    이건희 회장은 이때 “기술 인력 맵(map)부터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회장이 ‘사장보다 연봉 많이 줄 수 있는 인재를 데려오라’고 하셨지만 사람 심리상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데려온다는 게 힘들다는 걸 잘 알고 계셨죠. 사장들이 얼마나 인재 스카우트에 열심인지 꼼꼼하게 체크하신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핵심 인력 유치를 위해 구체적으로 누구를 만났고 이걸 위해 해외 출장을 몇 번 갔는지까지 다 확인했으니까요.

    연수원에 전 계열사 사장들을 불러 모아놓고 ‘인재를 데려오는 시늉만 하고 있다’고 혼도 내셨습니다. 어느 날은 삼성 계열사 사장 한 분이 일본 현지 법인에 ‘최고 기술자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는 걸 전해 들으시고는 ‘자기가 장가를 가는데 다른 사람한테 색시를 부탁하느냐’면서 화를 내셨죠. 그러면서 ‘그런 식으로 중구난방으로 할 게 아니라 전 세계 톱 회사에 어떤 인재들이 있는지 기술 인력 맵부터 만들라’고 했습니다.

    말이 쉽지, 어려운 작업이었죠. 물론 1등 인재들은 1등 회사에 있으니까 1등 회사를 찾는 건 쉽죠. 구글, 애플 등등 리스트가 죽 나와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런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뛰어난 인재가 누구냐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직도에서 보이는 공식 타이틀 말고 정말 실력 있는 사람을 알아내야 하는데 무슨 수로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내부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과 접촉해야 하는데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온갖 공을 다 들여 뽑았는데 알고 보니 조직에 불만이 있어서 나온 불만분자라거나 실력은 있는데 인화력이 부족해 조직 내에서 평가가 별로 좋지 않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리고 정말 실력 있는 사람들은 이미 대우를 잘 받고 있을 텐데 왜 굳이 이직을 하려 하겠어요.

    그러다 궁리를 낸 게 그 안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을 찾아보자는 거였죠. 조금이라도 연줄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강 인재들이 추려지면 학교 동창들까지 만나 검증하면서 좁혀갔습니다.”

    인재 스카우트 과정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 특히 말을 아꼈다.

    그래도 에피소드를 하나 전해주면 좋겠는데요.

    “일본 기술자들의 경우 계속 관찰하다가 현직에 있을 때는 못 뽑고 퇴임 후에 의사를 물어봅니다. 그것도 쉽지는 않았어요. 40년 넘게 다녔던 회사를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느냐는 거죠. 그래서 ‘서울에 굳이 오지 않아도 되니 고문으로 컨설팅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려고 했습니다. 살고 싶은 곳이 부산이나 제주라면 아파트도 마련해 주고 미리 살아보고 싶다고 하면 한 달이건 두 달이건 편의도 봐주고요. 사람마다 한 3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었어요.

    제가 구조본 인사팀장 끝나고 중공업 사장으로 있을 때인데 신규 사업으로 풍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일본에 40년 전문가가 있었는데 고문으로 모시겠다고 했더니 퇴직 후 3년은 지나야 된다고 하길래 기다렸습니다. 3년 뒤 찾아갔더니 이번에는 부인이 허락해야 된대요.

    부인까지 초청해서 거제에 아파트까지 마련해서 막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려는 찰나, 부인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이제는 물 건너가는구나’ 했는데 자녀들이 혼자 남은 아버지를 걱정한다는 소리가 들렸어요. 다시 찾아갔죠. 사위 아들 딸 며느리에 누님까지 한국으로 초청해 최고 호텔에서 묵게 하고 최고 음식점에서 대접해 드리고 아파트까지 보여드렸더니 자식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거예요. 결국 모시고 왔죠.”

    사람 하나 데려오는 일에 그렇게 공을 들였다는 것이 새삼스럽습니다.

    “007 작전 저리 가라입니다. 특히 외국에서 모셔오는 분들은 본인만 오케이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아내, 자녀들 의견까지 들어야 하니까요. 본인은 일하고 싶은데 와이프는 싫다고 해서 무산되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런 걸 회장께 보고드리면 혼이 많이 났습니다. ‘한 사람 모셔 오는 일이 얼마나 세심한 프로세스가 필요한데 그런 걸 다 무시하고 있다, 완전히 상대방 입장이 돼서 적어도 몇 년은 걸린다 생각하고 공을 들여야 하는데 ‘덜렁 뽑았습니다!’ 이러고 있다’고 말이죠.”

    별도 조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해외 지사에 그걸 전담하는 조직이 있었죠.”

    문제는 데려왔다 해도 일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중요하잖아요.

    “무엇보다 선후배 동료들과 잘 섞이게 배려하는 게 제일 중요하죠. 특히 사장보다 월급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면 ‘왜 나는 이것밖에 안 주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세심하게 해주어야 해요.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 보너스도 비슷하게 올려서 최대한 티 안 나게 했습니다.

    조직 내에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서포터들도 붙였습니다. 해외에서 오래 살다온 사람들은 우리나라 경조사 문화 같은 거 낯설잖아요. 빈소에 왜 가야 하느냐고 물으면 잘 설득해서 모시고 다녔죠.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분들도 나중에는 오히려 앞장서 가는 분도 계셨어요. 능력 있는 인재들은 외부에서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에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적응을 도와야 해요.”

    “많이 줘야 많이 일한다”

    이건희 회장은 사람에 대해 매우 현실적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을 ‘인센티브’로 본 것이다. 삼성이 급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재를 빨아들인 동력은 “역시 보상이었다”고 퇴임 임원들은 말했다.

    노 전 사장 말이다.

    “월급을 많이 줘야 성과를 내는 거지 월급도 제대로 안 주면서 성과를 내라고 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게 기본 마인드셨어요. 보상을 줄 때도 찔끔찔끔 하지 말라고 하셨죠.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 톱 5 반도체 기업들의 10년차, 20년차 직원들, 임원들 급여 내역을 알아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는데 우리가 50% 내지 60%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쯤에는 70% 내지 80% 가까이 되더군요. 그래도 열심히 쫓아간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비서실 인사팀장을 맡고 있던 그에게 날벼락 같은 지시가 떨어진다.

    “2003년 8월인데 도쿄에서 이학수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회장께서 ‘직원들 급여를 대폭 올리라 하신다’는 거예요. ‘얼마를 말하시는 겁니까?’ 했더니 ‘나도 감이 안 잡힌다. 알아서 안을 짜보라’ 하시는 거예요.

    2001년 2002년에 호황을 거치면서 이제 때가 됐다고 판단하신 건지 갑작스러운 지시에 도저히 감을 못 잡겠어서 난감했죠. 게다가 임금 인상 시기는 매년 3월이었는데 이런 걸 다 알고 계시는 분이 특별 보너스도 아니고 정규 연봉을 8월에 대폭 올리라고 하시니까 정말 난감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4대 그룹은 노동부에 정기적으로 임금 인상률을 보고하던 때였어요. 그전에는 청와대까지 보고했어요. 삼성 혼자만 올리고 싶어도 용인되는 시절이 아니었다는 거죠. 이런 사정을 말씀드렸지만 회장 뜻은 확고했습니다. ‘이익이 많이 났는데 특별 보너스 한 번으로는 안 된다. 우리가 계속 이익을 내려면 지금 분위기를 이어가야 한다, 기본적으로 두 배로 올려라. 그래야 집에서도 가장들이 떳떳하다, 과장·부장들은 생활비에 교육비가 제일 많이 들어가는 때 아니냐’ 이러시는 거예요.

    그전 해에는 임원 급여를 대폭 올리라고 하셔서 난리가 난 적이 있어요. 성과별로 5배까지 차이가 나도록 하라는 거였죠. 그때도 한참을 작업해서 1등급부터 5등급까지 결국 A B C D E 차등 적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는데 이번에는 전 직원 급여를 대폭 올리라고 하신 겁니다.

    매년 3%, 5%씩 인상해 왔는데 ‘대폭’의 의미를 얼마로 해야 하나, 15% 정도로 생각하고 보고드렸더니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인사팀장을 하고 있다’는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그러면서 ‘두 배 인상’을 지시하셨습니다.

    고민 끝에 계열사 이익에 따라 차등 지급안을 짰습니다. 이익을 많이 낸 회사는 최고 30%까지 올리는 식으로 추리니 7, 8개 회사 정도는 올릴 수 있겠더라고요. 이렇게 보고를 드리니 며칠 뒤 실장으로부터 ‘회장님이 너, 집에 가라(사표 쓰라)고 하신다’는 거예요. 거듭 말하지만 앞으로 최고 성과를 내려면 미리미리 챙겨줘야지 이익이 난 후에 해주는 게 아니라는 거였죠. 결국 다시 안을 짰어요.

    조직에서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과장급 부장급이니 과장급부터 올리는 걸로 짰어요. 사원은 워낙 많으니 이듬해부터 하는 걸로 하고요. 전 직원 임금을 한꺼번에 올린 걸 노동부가 알면 큰일이 난다, 삼성만 돈 잔치 한다고 여론도 안 좋아진다, 이런 여건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씀을 함께 드렸습니다. 결국 결재가 났습니다.

    당시 과장, 부장 와이프들이 ‘이건희 회장님 영웅’이라고 칭송이 자자했습니다(웃음). 회장이 또 ‘삼성에서 30년 일했으면 노후 걱정은 없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셔서 임원들 퇴직금도 대폭 올렸습니다. 인사팀장으로서 그걸 맞추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인사時 깐깐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

    이건희 회장이 사람을 보는 눈, 즉 인사 스타일은 어땠나요.

    “사장 후보자를 평가할 때의 깐깐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과거 인사 기록은 물론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몇 년치 자료를 다 취합해 줄을 쳐가면서 보고 또 보셨습니다. 이상하다 싶으면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의문이 생기면 ‘이게 뭐냐’ 물어보시고. 이 사람 장점은 뭐냐, 진짜 그런 능력이 있느냐, 조직 관리 능력은 어떠냐 등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감사 보고서 같은 것 안에도 사람 평이 들어가잖아요. 저희는 보고해 놓고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다 기억하고 계셨어요. 정말 중요한 순간마다 코멘트하신 걸 보면 아니, 저런 내용을 어디서 들으신 걸까, 완전 오싹해지죠. 후계자를 키우고 있는지도 살피셨습니다. 어느 날은 모 계열사 사장에 대해 ‘밑의 사람들 잘 안 키우고…. 요즘에도 그런가?’ 하셔서 깜짝 놀랐던 일도 있었습니다. 호암 회장님은 노골적으로 떠보는 게 있었다고 할까, 수첩에도 적어놓으시고. 근데 선대 회장님은 천부적으로 타고나신 것 같았어요.

    그 과정에서 제일 확실한 원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거짓말하는 사람은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사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 CEO를 발탁하라’는 등 방향만 정해줄 뿐 누구를 승진시켜라, 누구는 안 된다는 등의 지시를 받은 일은 없었으니까요. 사람을 평가할 때도 관상이나 직관에 의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장기간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는 스타일이셨습니다. 뭐, 다 알고 계셨겠지만 일절 모르는 척하시는 거였겠죠. 저희가 보고드릴 때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면 ‘우리가 틀리지 않았구나’ 했고, 아무 말씀 없이 표정이 싸늘해지거나 딴청을 하시면 우리가 뭔가 잘못 캐치한 거라고 느꼈죠.

    하지만 그런 불일치는 한 5% 정도, 회장이 선택한 최종 후보자들이 실무진의 내심과 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회장, 구조본, 계열사 경영진의 사람 보는 눈이 거의 일치했다는 말이죠.”

    여성 인재를 키우라

    1995년 7월 삼성의 학력 제한 철폐 조치 이후 입사 원서 접수 창구에 몰린 청년들. [삼성 60년사]

    1995년 7월 삼성의 학력 제한 철폐 조치 이후 입사 원서 접수 창구에 몰린 청년들. [삼성 60년사]

    2000년 노 전 사장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대졸 신입사원 중 여성 인력을 얼마나 뽑았느냐”는 전화를 받고 ‘아차’ 싶었다고 한다.

    “회장이 신입사원 채용에서 학력과 성차별 요소를 없애라고 지시한 것은 1994년으로 신경영 선언 이듬해였습니다.

    저희도 나름대로 채용에 남녀 구분을 없애고 여직원 유니폼을 없애는 등 남녀평등 제도를 펴왔다고 자신하고 있었지만 곧 이어 외환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위기 상황에 대응하느라 여성인력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데까지는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2000년의 경우 10%가량이었는데 이렇게 보고를 드리니 전화기 저 편에서 ‘내 말귀를 못 알아들었습니까’라는 준엄한 꾸짖음이 들려왔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지시는 당장 효과가 나타났다. 당장 2000년 인사에서 여성 3명이 임원으로 승진한 것이다.

    여성인력 활용은 신경영 선언에서 개혁안의 주요축이기도 한데 이와 관련해 지난 호에 소개한 김인 전 사장은 이런 증언을 들려줬다.

    “신경영 선언 때 회장께서 여성인력을 키워야 한다고 해서 나온 것이 비서 전문직 제도예요. 사실 그때까지 사내 여직원이 가장 많이 일한 곳은 비서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비서 일을 단지 사장 심부름하는 업무가 아니라 하나의 전문직으로 생각하면 상사가 하는 상당 부분의 일을 맡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장들이 밖에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더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거였어요. 저희가 처음으로 전문 비서직제를 만든 배경입니다.

    현실적인 벽에 많이 부딪혀서 잘 뻗어가지는 못했어요. 우선 당사자가 결혼이나 출산을 하면 직(職)을 계속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회장이 이렇게까지 여직원들에게 전문성을 갖도록 고심했구나’ 하는 점을 일깨웠던 기억나는 인사 제도였습니다.”

    이수빈 전 삼성생명 회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하 증언은 신경영 실천위 책자에서 인용한다. 직함은 당시 직함을 그대로 쓴다.

    1992년 초 비서실장으로 일할 때 회장이 여성인력 채용을 하도 강조하셔서 대졸 여사원 500명을 무조건 뽑아보라고 지시했다. 그전에도 여성인력의 활용에 대해 몇 번 지시가 있었지만 서무 업무는 주로 여상 출신이 하면 되고 대졸 여사원들은 애써 교육을 시켜보았자 결혼하면 퇴사를 하는 등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많아 본격적인 채용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1992년 국내 최초로 대졸 여사원 공채를 과감하게 시도했다. 여성계와 언론사, 학계 등으로부터 좋은 평판이 쏟아졌고 우수 인력이 대거 지원해 나라 전체로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을 보는 다른 눈

    이건희 회장의 열린 인재 채용은 외국인 고용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증언이 있어 소개한다. 삼성항공 경영지원실에서 일했던 이영호 전무의 말이다.

    삼성항공에서 일하던 외국인 기술자 가족들을 초청해 ‘만남의 행사’를 가진 적이 있는데 한 러시아 기술자 부인이 내게 다가와 “고맙다”고 한 일이 기억난다. 지금은 외국인 기술자들이 가족을 모두 데려올 수 있지만 채용 초기만 해도 국내에서 혼자 근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부인은 “러시아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어렵지만 남편이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계속 일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며 “계속 남편이 일하게 해달라”는 거였다.

    러시아 기술자들을 데려오게 된 것은 회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회장은 평소 “러시아 우습게 보지마라,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나라다. 그리고 미국, 일본 1급 기술자들은 연봉을 아무리 적게 줘도 20만~50만 불은 주어야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1000불만 주면 데려올 수 있다”고 하셨다.

    실제로 당시 미국, 일본은 기술 이전을 기피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기술료를 요구하고 이미 채용한 인력도 추가 요구 사항이 많아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회장의 말은 큰 돌파구가 됐다.

    어려웠던 점은 러시아 정부의 승인이었다. 워낙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해 기술자 한 명을 채용하는 데 무려 6개월이 걸렸다. 지금은 러시아도 체계를 갖춰 그때보다는 훨씬 쉬어졌다.

    현재 삼성항공에서 일하는 러시아 기술자는 17명이다. 이들은 비행제어, 구조설계, 구조해석 등 항공우주 분야와 소형 엔진 개량 및 개조, 산업용 엔진 상품화 등에서 제 역할을 다 해내고 있다. 우리가 1996년 소형 가스터빈 엔진을 개발해 회장 기술상 은상까지 타게 된 것은 이분들 덕분이었다.

    회장 말대로 선진국 기술자들은 연봉을 최소한 20만 불을 요구했지만 러시아 기술자들은 평균 2만 불로 이들의 10분의 1이면서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고 있다. 여기에 가족들도 좋아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한편 중국 본사 회장을 지낸 이필곤 씨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건희 회장의 인사관을 체험한 적이 있다며 이런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1994년 초 중앙일보 간담회 자리가 있었는데 회장은 조직의 가장 긴급한 요소를 ‘효율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직은 항상 최고로 효율화된 상태에서 운영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신입사원들에게는 청춘을 바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조직이, 고참들에겐 후회가 없는 조직이 돼야 한다며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들어가고 싶은 회사,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을 넣고 싶은 회사가 회장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조직상이라고 했다.

    얼마 후 사장단 간담회에서는 국가에 대한 사명감과 조직의 건전성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특히 삼성 직원들은 타인에 의해 또 선임자들이 저질러놓은 잘못 때문에, 또 외부의 높은 기대수준 때문에 더 고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이라는 기업을 넘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하는 것이니 보람을 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대우나 교육은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중요한 것은 ‘조직의 청렴도와 족벌 배제’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어느 날은 내 밑에 있던 전무 한 사람을 거론하며 이런 말도 하셨다.

    “이 사장이 김 전무의 관계사 전출을 반대한다면서요?”

    “예, 김 전무가 빠지면 업무에 지장이 많습니다.”

    “잘 모르는 얘기예요. 일 잘하는 상사를 빼주면 오히려 그 밑에 사람에게 좋은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해요. 능력 있는 상사 밑에서 B급이던 사람이 기회를 얻으면 A급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사람을 키우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은 늘 내 인사관리의 귀감이 되었다.

    회장은 또 항상 위기의식을 가지라는 말로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1995년 3월 사장단 오찬 때 한 말이다.

    “3~4년 호황이 지속되면 당연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불황이 닥칠 때를 대비해야 한다. 종업원, 고객을 위하고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최대로 노력해야 하고 낭비는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호황, 불황기를 막론하고 절약 정신이 몸에 배야 한다.” 회장의 가르침은 불황이 계속되는 지금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많은 곳에 공장을

    인건비가 싼 곳이 아니라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공장을 세우라고 했던 이건희 회장은 1997년 7월에는 세계 각국 최고급 인력 22명으로 구성된 미래전략그룹을 상설 기구로 출범시킨다. [삼성 60년사]

    인건비가 싼 곳이 아니라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공장을 세우라고 했던 이건희 회장은 1997년 7월에는 세계 각국 최고급 인력 22명으로 구성된 미래전략그룹을 상설 기구로 출범시킨다. [삼성 60년사]

    이대원 전 삼성중공업 부회장도 “1994년 1월 엔지니어링 부문 사장단 회의에서 회장이 말한 키워드는 ‘사람, 현장, 기술’ 세 개였다”며 이건희 회장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1등 회사를 만들려면 1등인 사람을 모셔 와야 한다, 임원이나 사장들은 근무 시간 반 이상을 고객, 거래처에서 보내야 현장 감각이 살아난다. 그래야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고 기술 중시가 돼야 사람 중시가 된다. 그래야 B급 10명보다 A급 하나, A급 10명보다 특급 하나가 중요하다는 답을 얻게 된다.”


    이듬해 4월 중국에서는 이렇게 말하셨다.

    “저임금을 이유로 진출한 해외 투자는 전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임금이 아닌 머리 좋은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해외에 진출할 때는 양질의 인력을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 잘 분석해서 파악해야 한다. B급 인력밖에 없는 곳에는 공장을 지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한편 윤종용 전 삼성전자 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부회장 시절 자신이 도쿄 주재원으로 있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린다. 윤 전 회장 증언을 듣다 보면 이 회장이 내건 ‘기술 중시’는 결국 최고 기술자에 대한 파격적 예우였으며 연구개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윤 전 회장 말이다.

    내가 일본에 주재했을 때 회장 지시로 오디오 관련 핵심기술을 보유한 일본 기술자 2명을 채용한 일이 있다. 한 명에게는 월급 100만 엔, 또 다른 한 명에게는 60만 엔을 주고 있었다. 일본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10만 엔 정도라는 걸 감안한다면 높은 액수였다. 더구나 나 같은 주재원 그것도 간부 급여의 5배나 높은 액수였다. 당시 부회장이었던 회장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불가능했던 채용이었다.

    어느 날은 연구소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 부지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물색 끝에 나카노구에 있는 약 7000만 엔짜리 물건을 찾아냈는데 자금조달 능력, 송금 문제 등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회장의 결단으로 구입해 지금까지 일본 본사 기술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이어 이어진 윤 전 회장의 말에는 회장의 직원들에 대한 관심, 품질경영을 위한 라인스톱 철학, 기술에 대한 몰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회장을 수행해 일본으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는데 회장이 “A회사에서 OO제품을 생산하는 누구누구는 아직 부장인가?” 물었다. 나는 어떻게 부장들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계시는지 궁금해 여쭈었다. 회장의 답은 간단했다. 그룹의 중요한 부문에서 열심히 일하는 관리자들은 항상 관심을 갖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는 직원들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 아닐 수 없었다.

    1980년 초 전자 수원공장에서 품질 향상에 관한 회의를 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품질이 안정되지 않은 VTR 보고를 받은 회장(당시 부회장)은 “지금 당장 생산을 중단하고 개선이 되면 재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며 머뭇거리자 재차 호통이 떨어졌다. 회장의 지시는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당시는 일본 제품들도 품질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고, 무엇보다 생산을 계속해야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VTR 사업부 인력만 300명이었으니, 생산 중단 여파가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아무튼 3개월간 각고의 노력 끝에 품질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후 생산을 재개했다. 1980년대 초부터 품질을 중시하고 질 위주 경영을 앞서 실천했던 회장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문제 해결에 대한 회장의 강한 집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에 관련 부서 임원들과 오사카에 있는 VCR 헤드 실린더 제조 공장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비까지 내려 시내에서 공장까지 이동하는 데만 1시간 이상이 걸렸다.

    공장에 도착한 후 회장이 직접 일본의 부품 제조 중소업체 사장들과 회의를 주재했다. 좁고 누추한 회의실에서 조금도 불편한 내색 없이 사업의 문제점과 향후 기술 동향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세 시간 넘게 진지하고 철저하게 토론을 이끌었다. 사업을 반드시 초일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열정과 의지를 새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자리였다.


    ‘기술을 사든지, 사람을 데려오든지’

    이번에는 중앙개발 안양베네스트 골프클럽 이사였던 성상용 씨의 증언을 소개하고 싶다. 기술과 현장을 중시하던 이건희 회장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다.

    ‘회장이 안양 골프장 공사 현장을 살필 때 일이다. 대형 나무를 이식하기 위해 나무를 새끼로 감아 분을 뜨는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옮긴 나무가 죽는 경우는 없느냐? 무게는 얼마나 되느냐? 어떤 나무라도 이식이 가능하냐?’ 등등을 물으셨다. 이식할 때 유의점,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활착률 등에 대해 답을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이 ‘외국 골프장을 보니 화분을 박스로 짜서 하니 이보다 더 큰 나무도 마음대로 옮기던데 한번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회장이 얘기한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 남쪽 셔우드 C.C였는데 그곳은 해양성 아열대 기후로 우리와는 기후도 토양도 달라 무슨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실제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토양이 푸석푸석한 사토질이었고 나무도 미국 자생 토종인 오크송이었다. 회장이 말한 것은 우리와는 사정이 너무 달라서 시간이나 비용 측면에서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선임 관리자에게 물으니 회장의 말을 자신도 들었고 이미 “안 된다”라고 보고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저간의 상황을 잘 알고도 나한테 또 말씀하셨다는 것인가. 여러 고민 끝에 일단 나무 이식 기술자를 직접 만나본 후 결정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으로 날아갔다.

    현장에서 기술자를 만나 한국의 기후, 토양과 수종 다양성 등을 설명하고 박스 이식 방법의 장단점과 한국에 적용 가능한지 여부 등등을 타진했다. 그러자 그는 뜻밖에 “가능할 것 같다”는 것 아닌가. 나는 그를 안양 골프장으로 직접 모시고 와 박스 형태의 나무 이식 기술을 전수받았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시범적으로 이식해 본 소나무가 다른 나무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활착률이 좋아졌다. 우리는 다른 모든 수종에도 적용, 차츰 범위를 넓혀갔다. 이식을 아주 싫어하는 목련 벚나무는 물론 삼복더위 뙤약볕 속이나 엄동설한 추위 속에서도 이식이 가능할지 여부를 실험해 보면서 우리 실정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느 때나, 어떤 크기나, 어떤 나무나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세계적 나무 이식 기술을 확보하게 되었다. ‘안 된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만의 노하우를 만들게 된 것이다. 나는 해보지도 않고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잘못을 반성했다. 그 일 이후 회장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믿게 됐다.

    회장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기술 부족으로 경영에 문제가 생기는 걸 제일 싫어한다. 기술을 사든지, 사람을 데려오든지 해라. 책상에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으면 시간도 더 들고 결과적으로 돈도 더 든다. 기회 선점을 놓친다.”


    당시로선 파격이던 의료진 유학

    한편 서울대병원장을 지낸 한용철 전 삼성의료원 원장은 인재 양성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이건희 회장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87년 삼성의료원 건립과 관련해 이건희 회장을 처음 만났다. 회장은 서울대학병원과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의 차이점을 물었다.

    서울대학병원은 의사를 채용하면 1년간 선진 의학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를 제공하지만, 고려병원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의료진의 수준과 질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자 “젊고 유능한 의사들을 선발해서 2년 정도 교육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한 두 명도 아닌 여러 명의 의사를 외국에서 2년이나 교육한다는 것이 너무 파격적이고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지역전문가라는 것도 없었던 시절이라 수십 명의 의사를 해외로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떻든, 회장의 의지에 따라 젊고 유능한 의사 50여 명(웬만한 종합병원 의사 숫자와 맞먹는다)을 세계 유명 병원으로 보내 살아 있는 선진 의학을 배우게 했다. 이 의사들이 개원 후 최단시간 내에 간이식 수술에 성공하는 등 고난도 수술을 하나씩 펼쳐가며 의료의 질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지금도 밤낮으로 임상 연구에도 열을 올리는 중진 의사들을 보면서 회장의 생각이 적중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삼성의료원이 개원 2년도 안 된 짧은 연륜으로 국내 의료계 정상급에 설 수 있게 된 배경에는 회장의 이러한 선견지명이 있었다. 국가와 삼성의 미래를 위해 인재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념을 묵묵히 실천하던 그때 그분의 인상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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