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한·중·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

저마다 내 땅, 영토분쟁의 핵 ‘만주’

  • 글: 임상선 한국교과서연구소 소장institute@naver.com

    입력2004-03-02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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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의 민족·국가·영토에 대한 인식은 그들의 교과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 교과서는 그 나라 학계의 일반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중·일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각국의 역사 귀속논쟁을 분석하고, 한국 북방사 연구의 방향을 가늠했다.
    한·중·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
    지난해 불거지기 시작한 중국의 고구려에 대한 자국사 주장은 한·중간에 일종의 역사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강력한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한 두 나라의 대립은 오늘날 북방 혹은 만주지역(중국은 동북지방이라 한다) 역사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이것은 고구려사에 머물지 않고, 그 이전과 이후 이 지역 전체 역사에 대한 귀속 논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고구려사로 인해 한·중간에만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국영토 내 주민, 역사는 모두 자국에 귀속한다는 중국의 주장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영토가 맞닿은 러시아, 티베트, 일본 등도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사를 둘러싼 한·중간 역사귀속 논쟁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중국 역사교과서의 동북지방과 국경문제》

    현재 중국의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민교육출판사 간(刊) ‘중국역사’(7년급 하, 2002년 12월 발행)에는 요나라에 대한 설명이 간단하다.

    당나라 말기 중원의 사람들이 전란을 피해 거란지구로 가면서 야철, 집짓기, 농경이 전래되었고, 야율아보기에 의해 거란(遼)이 건국된 후 남쪽으로 발전하여 연운16주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기술한다. 거란이 어떻게 세력을 규합해 건국되고, 또한 발해를 멸망시키는가에 대한 언급 없이 이주해간 한인에 의해 생활과 문화가 발전된 듯이 기술하고 있다.



    정통과 비정통의 구분

    이어서 황하유역에 당나라에 이어 오대(五代)가 들어서고, 960년 조광윤(趙匡胤)에 의해 북송(北宋)이 건국된 이후는 송나라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가령 송나라와 요나라·서북지구 당항(탕구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송 진종 때, 요군이 대거 송을 공격하여 황하 연변의 단주성 아래에 이르러 동경을 위협하였다. (중략) 송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요군을 물리쳤다. 요송은 의화(議和)하여 요조는 철병하고, 송조는 요에 세폐(歲幣)를 주니, 역사는 이를 단연의 맹이라 칭한다. 이후 매우 오랜 기간, 요송간에는 평화국면이 유지되었다.그때 서북지구의 당항족(黨項族) 세력이 일어났다. 11세기 전기, 당항 수령 원호(元昊)는 대하국(大夏國) 황제라 칭하고, 도성을 흥경에 두니, 역사에서 서하(西夏)라 칭한다. 원호는 칭제 후 매년 송과 교전하고, 쌍방의 손실이 매우 컸다. 그후 쌍방은 화의하고, 원호는 송에 대해 칭신(稱臣)하고 송은 서하에 세폐를 주었다. 화의 후 송하의 변계무역(邊界貿易)이 흥성했다. 서하는 태학을 설치하고, 한문서를 번역하는 등 적극적으로 중원문화를 흡수하였다.(47쪽)

    이 교과서는 요나라의 침입을 받은 송나라가 강화를 맺은 후 요에 해마다 막대한 물품의 세폐를 주어 평화국면이 유지되었다고 했다. 또 당항족의 서하에도 송이 세폐를 주었으나, 대신 서하는 태학, 한문서를 비롯한 중원문화를 흡수했다고 기술한다.

    여기서 중원은 바로 송을 가리킨다. 요, 서하와 북송의 관계는 결국 중원(북송)이 동북지방(요)과 서북지구(서하)의 국가(민족)에 군사상 패배하고 굴욕적인 대우를 감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요나라로 대표되는 동북지방은 결코 중원, 즉 중화의 세계가 아니다.

    이어 요나라 치하의 동북지방에서는 12세기초 여진족의 아골타(阿骨打)가 병사를 일으켜 국호를 금(金)이라 하니, 그가 바로 태조(太祖)다. 중국 교과서에서는 북송에 이어 건국된 남송과 금의 대치과정에서 남송의 악비(岳飛)가 금나라에 맞서 용감히 싸운 것을 두드러지게 서술하고 있다.

    남송 초년, 금군이 몇 차 남하하여, 남송 항전파는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금에 대항한 명장 악비는 금군으로부터 건강(建康)을 수복하였다. 그후 금군이 또 대거 남송을 진공하였다. 악비는   금군을 대패시키고, 허다하게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였다.송 고종과 권신 진회는 금의 역량이 장대한 것에 대항하는 것을 무서워하여, 그들의 통치를 위협하자, 금에 화(和)를 청하고, 악비 등에게 군사를 돌리도록 하고, 그들의 병권을 해제하였다. 진회는 계속 이른바 ‘모반’죄로서 악비를 살해하였다. (48쪽)

    한·중·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

    역사 교과서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견해를 대표하지 않고 관련국 학계의 일반적 성과를 반영하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

    악비는 금군을 대파시키며 많은 땅을 회복하였지만, 금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비굴하게 강화하려는 남송 왕실과 권력층에 의해 병권을 해제당하고 결국 모반죄로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교과서는 금과 송의 대립을 서술하면서, 송의 인물을 금에 굴복하려는 부류와 금에 저항하며 영토를 되찾으려는 인물로 구분하고, 후자를 부각시켰다. 악비에 대한 본문의 강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별도의 칼럼에서 부연설명하고 있을 정도다.

    이와 같이 중국의 역사교과서는 송나라를 정통으로, 요나라와 금나라를 비정통으로 설정하고 요와 금에 의한 중국 북부의 점유를 중원 왕조에 대한 침입으로 기술하고 있다. 요와 금에 대하여 비우호적임은 금에 대해 항전한 악비를 높이 서술하고 있는 것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영토와 국경 강조

    중국 역사교과서는 중국 영토에 대한 기준을 명시하고 그것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단호하게 서술하고 있다. 별도의 칼럼형태인 ‘역사지식경기’, 즉 역사지식 퀴즈 대회의 주제가 바로 “신강, 서장, 대만은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다”였다.

    우선 교과서에 게재된 산문 한 편을 감상해 보자.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고 또한 조국의 대자연의 풍경을 사랑한다. 우리는 조국의 산하대지만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하나, 꽃 하나, 돌 하나, 벽돌 하나, 기와 하나에도 우리는 친절을 느끼게 하고, 우리에게 그리움과 애무를 느끼게 한다. (‘중국역사’ 7년급 하, 121쪽)

    조국의 산하, 조국의 역사는 정직한 중화의 아들딸에게 영원히 조국에 대한 진지한 감정의 원천이며, 중화민족에게 세계민족의 수풀의 기초에 자립하게 한다. 우리들에게 조국의 역사를 이해하도록 하고, 조국의 산하를 기억나게 한다. (위와 같은 쪽)

    이 글은 조국의 산하와 역사가 중화민족의 영원한 감정의 원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신강, 서장, 대만이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였다”라는 주제로 경기내용, 경기조직, 시험제목, 경기형식 등의 역사지식 경기 운영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 경기는 반별 방식을 거쳐 학년별 형태로 확대되며, 이밖에 통일다민족국가, 민족의 우호왕래사, 민족 발전사 등과 같은 경기도 가능하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

    역사지식경기를 통하여 학생들이 “조국 강역과 영토주권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공감하고, 인문지식, 정리능력, 단체의식 등을 배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이 중에서 앞의 내용이 주요 교육목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역사지식경기 주제와 관련하여 동북지구의 학교는 “동북지구는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였다”를 주제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신강, 서장, 대만에 이어 동북지구도 중국이 향후 해결해야 할 영토문제를 안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동북지구는 19세기 러시아에 불법적으로 할양, 혹은 침탈됐다고 중국이 주장하는 곳이다.

    ‘중국근대현대사’상(인민교육출판사, 2001년 5월)은 “러시아가 침점(侵占)한 우리나라 북방의 대규모 영토”라는 항목에서 195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러시아가 ‘불난 집에 이익 챙기듯’ 중국 북방 150만여km2의 영토를 침탈했다고 기술했다.

    1858년 애혼(쾧琿) 조약으로 중국 동북 외흥안령 이남, 흑룡강 이북의 60만여km2, 1860년 북경조약으로 고혈도(庫頁島)를 포함한 오소리강 이동의 약 40만여km2, 1864년의 중아감분서북계약기(中俄勘分西北界約記)로 파이객십호(湖) 이동과 이남의 44만여km2, 그리고 1880년대 중·러 개정조약 및 이후 5개 감계의정서로 중국 서북부 7만여km2를 러시아에 빼앗겼다고 설명하고 있다.

    온갖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상과 같은 영토를 수호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중국의 집념은 다음과 같은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우리들 조국의 토지를 사랑한다! 일찍이 광풍이 그것을 휩쓸고 가고, 일찍이 얼음과 우박이 그것을 감싸도, 일찍이 서리와 눈이 그것을 봉쇄하고, 일찍이 큰 불이 그것을 불태우고, 일찍이 큰 비가 그것을 씻어도 (중략) 다만 이러저러한 괴로움과 어려움을 받을 뿐, 그것은 여전히 묵묵히 존재한다. 봄날이 되면 그것은 또 소생하고, 신심(信心)이 가득한 생의(生意)와 만발한 경색(景色)을 나타낸다. (‘중국역사’ 7년급 하, 121쪽)

    그런데 중국 역사교과서에는 정작 우리가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북방 영토 즉 백두산, 두만강, 간도 등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중국이 피의자 신분에 해당하는 것은 무시하고 고발자의 입장에 있는 문제만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제2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다시 독립을 획득한 것을,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조약이라고 말한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의 시기를 유엔의 깃발 아래 연합국에게 주권을 상실한 시기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본 역사교과서는 강화조약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지난해 검정에 통과해 올해부터 사용될 짓쿄(實敎)출판사에서 간행한 ‘고교일본사B’를 보자.

    조선전쟁(6·25)이 시작된 직후 1950년 9월, 미국은 대일강화 방침을 극동위원회 구성국에게 보였다. 다음해 미영 공동초안이 발표되고, 9월에 열린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의 초청장이 55개국에 보내졌다. 그러나 중국, 한국, 북조선은 초청되지 않았다. (중략)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1951년 9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 등 일본 전권(全權) 대표와 48개국 대표 사이에 조인되었다. 평화조약의 내용은 (1)일본의 주권 회복 (2)조선의 독립 (3)팽호(澎湖)제도, 천도(千島)열도, 남화태(南樺太) 영토권 포기(그 귀속은 명시하지 않고) (4)북위 29도선 이남의 난세이 제도와 오카사와라 제도에 대한 미국의 계속적인 시정권(施政權) 행사 (5)외국군대 주류의 승인 (6)원칙으로서 연합국측의 배상청구권 포기 등이었다. (222~223쪽)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일본을 비롯 49개국이 참가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조인했는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일본의 주권 회복과 영토 규정, 그리고 종전시 일본 점령지에 대해 내린 결정이다.

    그 중에는 ‘조선의 독립’도 언급되었는데 관련 조문은 “일본국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權原)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일본 역사교과서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조선의 독립이 언급된 것을 이유로 ‘일본이 1952년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독립은 1945년 8월15일도, 또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도 아니다. 1952년까지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과제로서 영토

    지난해 검정을 통과해 일본 고등학교에서 많이 사용될 것으로 예상되는 도쿄서적과 야마가와출판의 ‘신일본사B’에는 일본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몇 가지 예시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소련과의 북방영토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다음은 야마가와출판 ‘신일본사B’의 일부다.

    소련은 1945년의 대일참전으로 북방영토인 구나시리(國後), 에토로후(擇捉), 하보마이(齒舞) 군도, 시코탄(色丹) 등을 점령하고 있다. (375쪽)

    ‘평화조약 규정에 의한 일본의 영토’라는 지도엔 ‘태평양전쟁 전의 일본령’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한 일본의 영역’‘그 후의 일본 복귀지역’을 표시하고, 이른바 북방영토는 ‘일본국 고유영토’라고 표기하고 있다.

    한편 한반도는 대만 등과 함께 ‘태평양 전쟁 전의 일본령’으로 표시하고 독도는 다케시마(竹島)로 표시했다.

    2002년 검정에 통과해 지난해부터 사용중인 메이세이사의 ‘신일본사’도 “현대일본의 과제와 문화의 창조”라는 항목에서 이렇게 적시했다.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가 타국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북방영토는 러시아에 점령당한 채로 있고, 한국이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또한 중국 등이 오키나와현 센가쿠(尖閣)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70쪽)

    러시아의 북방영토, 한국의 독도(일본은 다케시마라 칭함), 그리고 중국의 센가쿠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나 이들 국가들에 부당하게 영유되어 있다고 서술한 점이 눈에 띈다.

    《한국 역사교과서의 북방 인식》

    우리 중학교 ‘국사’는 선사시대로부터 북방지역이 한국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동시에 주요 무대라고 기술하고 있다.

    만주는 한반도와 더불어 사람이 살기 시작한 수십만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생활무대였으며, 우리 민족은 남방계보다 북방계와 관련이 더 깊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건국하였다. (중략) 고조선의 성립 이후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의 여러 나라가 세워졌다. (17쪽)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에 지금의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북방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발전했다는 내용이다.

    그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거치면서 5세기말에는 한반도의 중부 이북과 요동을 포함한 북방지역을 차지하여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위세를 떨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인들을 중심으로 건국했다고 하고, 당시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를 지배하였다고 보았다.

    한·중·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끊이질 않는다.

    특히 구 교과서와 달리 개정된 교과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발해를 우리 민족의 국가로 보는 이유를 찾는 과정을 추가하는 등 많은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중국과의 발해사 귀속 논쟁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북방 진출을 꾀하여 북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나라 이름도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고려라 하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을 중시하여 이 곳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태조는 이곳에 자주 들러서 북방 지역을 순시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또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한 거란을 무도한 나라로 여기고 적대시하였다. 이러한 북진 정책은 뒤에 압록강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92쪽)

    이 부분은 고려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거란을 적대시한 것도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만이 아니라 수복해야 될 지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993년 거란의 침입을 받았을 때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다음과 같이 대결한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고려가 침식하였고,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였는 데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므로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자,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경으로 논한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은 다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하리요? 그리고 압록강의 안팎 역시 우리 영토 내에 있는데, 여진이 도적질하여 차지하고 있다. (중략)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영토로 만들어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어찌 관계를 맺지 않겠는가? (98쪽)

    ‘고려사’에 따르면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땅은 거란의 것인데 고려가 침입했다고 하자, 서희는 이것을 부정하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을 국호와 평양을 중시해 도읍을 정한 사실을 들어 반박하였다. 나아가 요동지역에 있는 거란의 동경도 오히려 고려의 땅이 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1000여년 전의 거란과 고려를 21세기 중국과 한반도로 치환해 볼 때, 오늘날 고구려, 발해사 넓게는 북방지역을 둘러싼 양국의 주장이나 입장과 차이가 거의 없어 놀라울 뿐이다.

    그후 12세기에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이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성장한다. 다시 교과서를 보자.

    여진족은 원래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말과 화살 등을 바쳤고, 고려는 식량과 농기구 등을 주어 그들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완옌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그 세력이 천리장성 부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중략) 금은 거란을 멸망시키고 만주와 몽고, 중국의 북부를 지배하게 되자, 고려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려는 금과 형제 맹약을 맺어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북진 정책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99~100쪽)

    여진족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하다가 금이 건국한 후는 도리어 형제맹약을 맺기에 이르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만주지역에 대하여 고려는 고구려 영토회복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건국 후 지속적으로 북진정책을 폈지만 요의 건국으로 진출이 막히고, 다시 금의 건국으로 좌절되었다.

    그후 조선 세종 때에 압록강과 두만강 방면의 여진 무리를 몰아내고 4군과 6진을 설치하면서, 조선의 북쪽 국경선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간도와 독도의 소유권

    현재 우리나라가 주변국과 벌이고 있는 영토문제의 주요 대상은 간도와 독도다. 간도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독도는 러·일전쟁 중에 일본이 일방적으로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고, 지금까지도 그 영유권을 강변하고 있다.

    중학교 ‘국사’는 간도와 독도에 대하여 2쪽에 걸쳐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간도와 독도의 역사적 연원을 설명하고 중국이나 일본과 왜 문제가 되고 있는지 지도 사진 사료 등을 제시하며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한·중·일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

    2001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대두된 후 이를 반대하는 학자들이 집필한 비판서들.

    간도는 고구려와 그 뒤를 이은 발해의 땅으로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그러나 발해가 망한 뒤에는 말갈족이 거주하였으며, 여진족이 청을 건국한 뒤에는 이 지역을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고 하여 다른 민족의 이주를 금지하였지만, 조선인들이 곳곳에 살고 있었다.

    조선 숙종 때 조선과 청은 국경선을 정하면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였다. 그후 많은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에 청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철수를 강요하며 간도가 청의 영토라고 주장하였으나, 조선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들을 보호하며 다스렸다. (중략)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안동과 봉천간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가 청의 영토라고 인정하는 간도협약을 청과 체결하였다(1909년). 이로써 간도 지역은 우리의 관할에서 떨어져 나갔다.(239쪽)

    간도가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으며, 숙종 때는 청나라도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철도부설권의 대가로 간도협약을 맺어 청에게 넘겨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간도가 분명히 우리의 영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독도에 대해서도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일방적으로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켜버렸음을 분명히 했다.

    독도는 울릉도에 딸린 섬으로서,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영토로 이어져 내려왔다. (중략) 특히, 조선 숙종 때에는 동래에 살던 안용복이 이곳을 왕래하는 일본 어부들을 쫓아내고,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나라의 영토임을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240쪽)

    한·중·일 3국은 모두 외국과 영토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교과서에는 자신들이 되찾아야 할 영토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만주지역에 가장 많은 지면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국사 교과서이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는 오랜 시기부터 북방지역에 등장한 국가가 한국사의 일원이었으며, 이 지역이 한반도와 불가분의 관계하에 동일한 역사 궤적을 밟아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고려 이전은 북방지역이 한국사의 주요 무대인 것과 달리, 발해 멸망 후는 북방지역이 수복되어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침략을 통하여 압박을 가하는 적대적인 지역으로 변하여 갔다.

    그후 조선시대 실학 발흥기에 이르러 새삼 북방지역과 우리나라와의 역사·문화적 공통분모를 확인하게 되었다. 불법적으로 일제에 의해 청의 소유가 되었다는 간도문제도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영토분쟁의 핵, 만주

    만주지역에 대한 역사교과서 서술의 양으로 이 지역에 대한 각국의 관련성을 재단할 수는 없지만, 현재 각국이 이 지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은 지난날 반강제적으로 외국에 넘긴 영토를 잊지 않고 미래에 수복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만주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의 내용에는 중원지역에 비해 동북지방이 오늘날도 여전히 변방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특히 요나라와 금나라 역사는 황하를 중심으로 한 정통 중원 역사가 아닌, 비정통적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 중국의 교과서에서 동북지방은 변방의 역사인 것이다.

    이와 달리 우리는 발해 멸망 이후 1000여년간 이 지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듯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반증하는 측면도 있다. 또한 우리가 북방지역과 공통의 역사, 문화적 경험을 해 온 것은 1000년의 몇십 배인 수십만 년에 해당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1945년 이후 국내 박사학위논문 중 북방사 연구 현황을 살펴보면, 고조선은 5(1)명, 고구려는 26(17)명, 그리고 발해는 8(6)명이다(괄호 안은 역사분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대한 논문이 2건, 그리고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2건이고, 일제시기 만주에 대한 연구가 7건이다. 발해 이후 요나라와 금나라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등과의 영토문제나 국경에 대한 연구도 7(4)건에 불과하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간도와 독도에 대해서는 각각 11(3)건과 5(0)건이 있을 뿐이다.

    한국사 전체로 볼 때 한반도 내의 백제 32(24)건과 신라 111(68)건에 비해 북방의 고조선·고구려·발해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이와 같은 원인의 하나는 발해 이후 요, 금을 비롯한 북방지역에 대한 연구에서 다른 연구의 토대가 되는 역사분야가 상대적으로 부진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북방지역에 대한 질과 양 모든 측면에서 연구를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 이와 더불어 북방지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의 연구현황도 지속적이며 전문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상대국의 입장이 무엇이며,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 문제는 중국적 사고와 그 성과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도 원인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발해사에서 찾아보면, 고구려 주민과 말갈로 이루어진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하여 한국과 중국의 학계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말갈족을 둘러싸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우리는 발해를 한국사라고 하면서도 고구려 주민의 역할만 강조하고 말갈족은 한국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중국은 말갈이 한국민족이 아니라면 중국민족의 일원이라 인정하고, 여기에 근거하여 발해사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논리를 세우고 있다. 중국이 처음부터 말갈족을 적극적으로 중국민족의 일부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동아시아의 주인인가

    또한 발해와 당나라의 영역 표시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있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양국간 경계가 대동강 어귀로부터 압록강 어귀까지는 해안선에서 일정 지역 안으로 들어와 있고, 이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표시하고 있다. 여기서 경계선 동쪽은 발해, 그 반대편은 당나라인 것은 물론이고, 일부 국내 연구자들도 무의식적으로 이것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양국간 경계는 발해가 존속하는 기간이라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당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반발로 요동으로 달아난 것이 676년이고 그나마 요서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폐지된 것이 756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당이 요동을 점유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기간은 8세기 전반에 불과하며, 그렇더라도 이때 신의주 이하 황해도 지역을 차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말갈족과 당나라·발해 국경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이것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말갈족을 연구하고, 중국인의 입장에서 양국의 경계를 그었고, 이것을 국내 학계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중국이 동아시아 전체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발해의 영역 이외는 모두 중국(당)의 것이라는 중화적 사고가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한국의 북방사 연구는 중국의 동북지방사 연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향후의 북방사 연구에서 필요한 것은 중국사가 아닌 한국사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중국인이 연구한 동북지방사를 극복하는 길은, 한국사의 일부로서 북방사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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