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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군부-개혁파 파워게임으로 본 ‘남북정상회담 이후’

‘돈줄’ 확보한 개혁파, ‘핵으로 국방력 완성’ 명분으로 군축 나설 듯

  • 이영화 일본 간사이(關西)대 교수·경제학

北 군부-개혁파 파워게임으로 본 ‘남북정상회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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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내부의 국가전략·정책 결정구도를 이와 같은 틀로 파악하는 것은 필자뿐이 아니다. 미국 국무부에서 정보조사국(INR) 북한분석관을 지낸 로버트 칼린과 북한담당관을 역임한 조엘 위트는 지난해 ‘북한의 개혁(North Korean Reform)’이라는 공동저술을 내놓은 바 있다. 두 사람은 이 책을 통해 필자와는 다른 방법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필자가 RENK 활동을 통해 확보한 북한의 비공개 문서나 보고서 등을 기초로 한다면, 칼린과 위트는 북한 공개간행 문헌의 행간을 읽어 김정일 정권이 착실하게 경제개혁에 키를 맞춰가고 있다고 확인한다.

이와 함께, 지난 6월 필자는 평양에 대표부를 둔 한 EU 국가 북한담당 대사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선군파와 개혁파 사이의 쟁점이 주로 ‘경제개혁의 속도’ 문제에 있다고 보는 측면에서 그와 필자의 생각이 일치했다. 두 파벌의 대립선이 각 국가조직을 가로지르면서 진행 중이고, 50대를 경계로 하는 세대간 대립의 색채도 짙다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우여곡절로 점철된 선군파와 개혁파의 대립, 갈등은 다음과 같은 전개과정을 걸어왔다.

[제1기] 선군정치의 전성기 (1998년 후반~2000년 초)

1994년 제네바에서 1차 핵 위기에 관한 북미간 합의가 이뤄진 직후 김일성 주석은 급사하고 대기근과 대량 탈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내 사정의 급변에 따라 김정일 위원장이 일종의 긴급 피난책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선군정치’다. 장거리 탄도미사일 대포동1호 발사를 신호로 인민군은 노동당으로부터 핵개발 주도권까지 강제로 빼앗았고, 이 무렵 군수부문의 경제적 비중은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랬기 때문에 국민경제는 오히려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기근의 진행은 막을 수 없었고, 이러한 흐름이 도리어 군수산업에까지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부터 이미 선군정치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제2기] 개혁파의 탄생과 공세기 (2000년 초~2002년 연말)

기근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긴급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김정일 정권은 주민이 자연발생적으로 확대시켜온 암시장을 공인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개혁파가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000년 초 ‘정치강국, 군사강국은 이미 달성’ ‘수년 내에 경제강국을 목표로 한다’는 개혁파의 정책목표가 등장한다(‘조선중앙통신’ 2월3일). 이러한 정세인식에는 1994년 북미 합의가 초래한 한반도 정세의 대폭적인 긴장완화가 밑받침하고 있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해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을 사이에 두고, 김정일 위원장은 반 년 동안 두 번에 걸쳐 중국을 방문했다(2000년 5월과 2001년 1월). 김 위원장 자신이 선군정치하에서 경제를 개혁하기 위해 길을 닦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때를 즈음해 개혁파는 기세를 올렸고 선군파는 수세로 돌아선다. 새로 들어선 부시 행정부의 2002년 2월 ‘악의 축’ 발언이 불러온 역풍 속에서도 개혁파는 더욱 공세를 가한다.

그 상징적인 예가 시장경제적 요소의 도입을 공식적으로 도모하는 2002년 7월의 ‘경제관리개선조치’였다. 외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조치는 임금과 물가를 변경한 소극적인 개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군파가 우위를 점하던 당시의 북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대담한 도전이었다. 개혁파에게 경제관리개선조치는 다음 단계의 본격적 개혁작업으로 이행하는 전초전이자 선군파의 반응을 관측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외부환경을 갖추는 전방위 외교의 일환으로 그해 9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이 성사됐다.

바로 이 시점에서 선군정치의 환골탈태가 시작된다. 주체사상 같은 간판은 결코 내리지 않았지만 그 변질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선군정치와 경제개혁이 공존하는 불안정하고 미묘한 균형상태가 나타났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으로 차디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미국 이외에는 전세계가 (경제개혁을) 지지한다’ ‘경제강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2002년 말까지 북한 내부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그 울림은 이어진 국제정서 악화로 금세 허무해지기에 이른다.

[제3기] 선군파의 반전 공세기 (2003~2004년 여름)

선군파에게 대반격의 계기를 제공한 것은 2002년 10월 켈리 차관보의 방북이었다. 당시 켈리 차관보는 북한이 1994년의 북미 합의를 위반하고 파키스탄에서 원심분리기 시제품 20대를 구입한 ‘사실’을 들이댔다. 이른바 ‘고농축 우라늄(HEU) 계획’ 의혹이 터져 나왔다.

주지하다시피 이를 계기로 그간 형성된 평화 무드는 순식간에 끝이 났고, 이른바 ‘제2차 핵 위기’가 불거졌다. 북미 대립 격화와 이라크전쟁 개전으로 선군파의 공세는 급격하게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핵 위기 와중에 일본인 납치사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일 국교정상화의 길이 완전히 멀어진 것 역시 선군파에게는 순풍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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