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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어느 채권추심원의 일기

  • 서영호 / 일러스트·박진영

어느 채권추심원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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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먼저 욕했잖아?”

“얼마나 갚을 수 있는데?”

“매월 10만원씩 보내줄게요.”

“안 갚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한 일이니 갚으면 되잖아요.”

“안 갚으면 저 TV나 냉장고 같은 것에 모두 딱지 붙이게 돼. 그리고 이 집, 전세인지 월세인지 모르지만 그 돈도 못 찾아가게 할 수 있어!”

“아저씨 맘대로 하세요. 벌써 다른 사람들이 와서 딱지 붙인 지 오래됐어요.”

청년의 야윈 다리와 그 위에 하얀 천으로 친친 맨 붕대가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오늘 실사는 허탕은 아닌 것 같다. 본인은 못 만났지만 아들을 만나 잔뜩 겁을 주었으니 언젠가는 채권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져간 최고장을 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 2004년 7월 ○일

출근하니 벌써 사무실이 욕지거리로 시끄럽다. 옆자리 김 선배가 어디엔가 전화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느라 얼굴이 시뻘겋다.

“야, 이 새끼야, 남의 돈을 떼어먹었으면 갚아야 할 게 아니야. 뭐라고?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봐라. 내가 언제 너한테 먼저 욕했냐? 네가 먼저 나한테 욕했잖아?”

추심원과 채무자 간의 욕설다툼은 항상 누가 먼저 욕을 했느냐로 시비가 확대된다. 아마도 저쪽 채무자는 김 선배가 먼저 욕을 했으니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경찰서에 신고하겠다고 나오는 것 같다.

“그래, 이 새끼야. 신고해라. 지금 경찰서 문 활짝 열려 있으니 가서 신고해. 남의 돈도 못 갚는 주제에 신고는 무슨 놈의 신고냐. 돈이나 빨리 갚아! 뭐, 이리로 온다고? 그래 와라 자식아, 그냥 오지 말고 돈 갖고 와라. 뭐, 여기가 어디냐고? 여기는 너도 잘 아는 네거리다. 너 같은 놈은 함부로 오지도 못해. 여하튼 이달 말까지 500만원 갚아. 그러지 않으면 네 집구석에 가서 가재도구고 뭐고 깡그리 차압해버릴 테니까 그리 알아.”

김 선배가 전화기를 탕 하고 내려놓으며 “에이,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하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추심원 40여 명이 근무하는 이곳 L신용정보사 사무실에서는 고함소리가 자주 난다. 처음엔 조용한 소리로 빚 독촉을 하다가도 대화는 어느새 욕지거리로 바뀐다. 때론 조용히 채무자와 대화하면서 소기의 성과를 올리는 추심원도 있다. 그러나 일부 추심원은 감정이 격해져 채무자와 서로 욕지거리를 주고받는다.

지하 셋방, 구부정한 노파

“어이, 오늘 월급날인데 왜들 그렇게 시끄러워? 좋은 날 소리들 지르지 말아!”

옆자리 이 선배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입사 후 열 번째 돌아오는 월급날이다. 경리가 건네준 월급명세서를 보니 이달 수령액은 162만원이다. ‘이 돈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하고 중얼거리는데 최 선배와 신 선배가 나 들으라는 듯이 한마디 한다.

“나이 50대 중반에 이만큼 벌면 잘 버는 거야. 당신 어디 가서 땅을 파봐. 10원 한 장 나오나.”

추심원의 월급은 실적급이다. 노력한 만큼 받는다. 통상 추심 의뢰 금액의 8% 정도가 추심원의 몫이다. 채권자가 의뢰한 1000만원을 다 받아냈다면 신용정보사가 이중 200만원의 수수료를 챙기고 추심원은 그중 80만원을 가져간다. 어떤 채권자는 채권액의 30%까지 신용정보사에 떼어주고 추심을 의뢰한다. 10%의 추심수수료만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비교적 양질의 채권인 경우다.

▼ 2004년 8월 ○일

채무자 신모씨를 찾기 위해 오전 11시쯤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진 빚은 3000만원, 이미 신용불량자가 되어 채무가 과다한 자였다. 채권자는 그가 어디선가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며 돈을 꼭 받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회수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해 현지 실사를 미뤘다.

S동 뒷골목을 몇 번이나 오간 끝에 신씨의 주소지를 겨우 찾았다. 허름한 단독주택이다. 지하 셋방에 사는 것 같아, 지하 방을 찾아가니 입구부터 쾨쾨한 냄새가 난다. 문을 두드리니 12∼13세로 보이는 초등학생 두 명이 낡은 컴퓨터 앞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 학교는 가지 않고, 웬 컴퓨터 게임일까? 어른이 없느냐고 물으니 낡아서 헐어진 방문을 열고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가 눈을 비비며 나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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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호 / 일러스트·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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