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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소설의 다른 이름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페루, 소설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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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요사의 장편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의 첫 장면, 새엄마를 찾아간 양아들의 대화 장면이다.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통령선거 출마 경력이 있고, 소설뿐만이 아니라 시와 비평, 희곡, 방송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소설가답게 요사의 소설은 하나 아닌 층위를 거느리고 있다.

거대 서사의 ‘총체성’과 ‘환상’

그의 소설적 주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정치·사회사적 거대 서사의 ‘총체성’과 개인의 성적 욕망이라는 미소(微少)서사의 금기와 그것을 파괴하는 ‘환상’이 그것이다. 개인의 성적 환상을 주제로 한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를 예로 들어 줄거리를 살펴보면, 아내를 잃은 아버지가 아름다운 루크레시아를 만나 아들과 함께 새 가정을 꾸리지만, 새 아내인 루크레시아와 아들 폰치토 간의 ‘기묘한’ 육체적인 관계로 인해 새 아내와 헤어진다. 그런데 양아들 폰치토는 새엄마가 보고 싶다고 아버지와 별거 중인 그녀를 찾아가 갖가지 에피소드를 엮어내는데, 서사의 기본 골격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매 회 에곤 실레의 그림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새엄마와 그녀를 시중드는 하녀의 표정과 자세에 얹어 놓고 슬쩍 열린 문의 틈새나 약간 떨어져 비쳐 보이는 거울로 엿보는 관음증적 서사와 아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헤어졌지만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루크레시아에 대한 성적 환상을 비밀 노트에 부려놓는 망상적 서사가 중층적인 흐름으로 병치된다.

한국 소설계와는 매우 다른 새로운 양상인 요사의 소설을 독자 대중이 흥미를 가지고 따라가기에는 다소 벅찬 감이 없지 않은데, 요사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총체적이고 중층적인 구조가 때로 분신처럼 떨어져 나와 단선적인 서사의 흐름을 제시하는데, 최근에 출간된 ‘새엄마 찬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전체 중 일부가 한 편의 독립적인 작품의 기능을 하는 형국인데, 사실 작가의 집필 순서로는 ‘새엄마 찬양’이 있고, 그리고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엄마 찬양’은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의 밑그림인 것이다. 위의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의 첫 대목에 ‘새엄마 찬양’의 첫 대목을 놓아보자.

마흔 번째 생일날, 루크레시아 부인은 어린아이가 손으로 쓴 편지 한 장이 베개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쓰인 글자 하나하나에서 사랑이 듬뿍 느껴졌다.



생일 축하해요, 새엄마!

돈이 없어서 선물은 준비 못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꼭 일등을 할게요. 그게 내 선물이 될 거예요. 새엄마는 이 세상에서 최고예요. 가장 예쁜 사람이고요. 나는 매일 밤 새엄마 꿈을 꿔요.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요, 엄마!

알폰소

-‘새엄마 찬양’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새엄마와의 육체적 관계라니! 금기를 넘어서는 요사의 현란한 소설적 에로티시즘을 접한 한국의 독자들은 새엄마와 양아들, 또 아주머니와의 결혼(‘나는 훌리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을 제목으로, 그것을 소설의 주 내용으로 삼은 요사의 허구 세계 앞에서 정서적으로 큰 당혹감을 느낀다.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사회, 역사, 문화적인 성격을 전제하지 않았을 때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질혼종의 난투장

실패한 혁명가의 은둔지로서의 페루(‘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총을 든 수백 명의 유럽 제국주의자(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수많은 원주민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내주어야 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비참한 현실(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등의 20여 개 국가), 이질적인 세계(가톨릭)를 강제로 몸과 영혼 속 깊이 받아들이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현실적 사고 체계와 삶의 양상…. 한마디로 라틴아메리카적인 특성은 외압에 무너진 슬픈 역사가 빚어낸 ‘이질혼종’의 난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질혼종이 소설과 만나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탄생하고, 요사의 총체적 환상이 펼쳐지며, 코엘뇨의 빛나는 연금술이 생성된 것이다. 21세기의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방위적인 혼종성(hybrism, 또는 convergence)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문학의, 나아가 인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그 중심에 요사가 있고, 소설의 다른 이름으로 ‘페루’가 새롭게 호명되고 있는 것이다.

신동아 201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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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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