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문턱 걸린 전자금융거래법
‘기울어진 운동장’이냐 혁신 길 터주기냐
금융지주 노사, ‘빅테크 특혜법’ 성토
금융위 “특혜 아냐” 빅테크 “외려 의무 강화”
2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배진교 정의당 의원(가운데)과 금융노조, 금융정의연대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입장 표명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금법 개정안은 종합지급결제사업자 지정을 통해 빅테크 업체에 금융업 진출을 허용하면서도 관련 규제가 미비해 금융소비자피해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뉴스1]
그런데 요즘 금융권에서는 전통의 강자들이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KB와 신한, 우리, 하나 등 대형 금융지주들 이야기다. 지난해 금융지주 회장단은 은성수 금융위원장을 만나 현 금융 환경이 빅테크 위주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있다고 성토한 바 있다. 빅테크란 대형 IT(정보기술)기업을 지칭한다.
수개월째 표류하는 논란의 법
금융사가 경계하는 대상은 네이버와 카카오 등 대형 플랫폼 기업이다. 이 업체들은 수년 전부터 금융 관련 사업을 진행해 왔다. 많은 이용자를 보유한 플랫폼 사업자인 터라 성장 속도가 빨라 금융사의 위기감도 커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최근에는 금융 당국이 나서서 IT 기업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려 하자 불만이 커지고 있다.국회에서 수개월째 표류하고 있는 전자금융거래법(이하 전금법) 개정안은 이런 갈등의 단면을 잘 드러낸다. 전금법은 전자금융거래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관련 산업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난 2006년 만들어진 법률이다.
전금법 개정안은 지난해 7월 정부가 ‘디지털금융 종합혁신방안’의 일환으로 마련한 방안이다. 그간 전금법은 금융보안 관련 규정 등 세부 내용이 일부 개정됐지만, 큰 틀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에 금융위는 전금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할 계획이었다. 자금 이체나 선불업 등 결제 서비스 업체를 제도권으로 수용하고, 새로운 서비스와 사업자의 시장 진입을 돕겠다는 취지다. 이를 통해 전금법을 국내 ‘디지털 금융’의 기본법으로 만들겠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발의된 전금법은 이해관계자들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수개월째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치권과 금융권 노조,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개정에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당분간 국회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많다.
개정안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건 ‘종합지급결제사업자(종지사)’를 신설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네이버나 카카오 등 빅테크 업체들이 간편결제와 송금 외에 계좌 기반의 디지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비(非)은행 사업자가 계좌를 발급해 급여 이체나 카드 대금 납부 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에 계좌를 만들 수 있던 건 은행뿐이었다.
은행들은 이를 ‘빅테크 특혜법’이라고 지적하며 반발하고 있다. 대출과 예금 등 여·수신 업무가 금지되긴 하지만 계좌를 통한 급여 이체나 보험료 납부 등 일상적인 은행 업무를 빅테크 업체들이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IT기업들이 권한은 늘지만 은행 수준의 규제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대형 금융사 경영진뿐 아니라 노조까지 반대하고 나서면서 개정안의 국회 통과는 더욱 어려워지는 모양새다.
금융사들과 노조는 빅테크들이 사실상 금융사 기능을 하게 되는 만큼 금융권과 같은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회에 발의된 개정안이 통과하면 빅테크 업체들은 은행법이나 금융소비자보호법을 적용받지 않으면서도 ‘금융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개정안의 핵심으로 꼽히는 ‘종지사’를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빅테크의 ‘힘’에 놀랐나
대형 금융사들이 크게 반발하는 이유는 빅테크의 ‘힘’을 확인한 바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특히 2017년 출범한 카카오뱅크는 카카오톡 메신저 등을 활용해 소비자들을 빠른 속도로 끌어들였다. 이에 출범 4년 만에 자산 규모가 JB광주은행이나 JB전북은행 등 지방은행 수준으로 늘었다. 8월 상장한 뒤에는 기업가치(시가총액)가 20조~30조 원 정도로 KB금융지주나 신한금융지주와 맞먹게 된다.한 금융사 관계자는 “카카오뱅크의 사례에서도 확인했듯 국내 금융산업은 플랫폼 업체 중심으로 재편되는 분위기”라며 “플랫폼 기업들이 기존 은행의 고객 기반을 잠식하는 와중에 전금법으로 길까지 터주려 하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 당국과 빅테크 업체들은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은성수 위원장을 앞세워 개정안을 그대로 밀어붙일 기세다. 은 위원장은 6월 국회에서 열린 전금법 개정 관련 토론회에서 “국내외 디지털 전환 흐름에 대응하는 것을 더 늦출 수 없다”며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이 지나치게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금융위는 금융 당국이 빅테크에 특혜를 주고 있다는 논리는 지나친 해석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이형주 금융위 금융혁신단장은 “정부는 제도권 금융사의 디지털 전환을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다”며 “IT·핀테크 회사 투자나 제휴 연계를 원활히 할 법적 근거를 만들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부수·겸영 업무 확대 등 기존 금융사도 다양한 정책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업권 특혜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했다.
종지사 관련 논란에 대해서는 “(종합지급결제사업자는) 사실상 국제적으로도 같은 방향의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며 “비은행금융기관이 결제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조금 더 높이는 것인데, 우리가 수용할 필요가 높은 제도”라고 강조했다.
빅테크 업체는 외려 새로운 규제의 틀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이 부담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김지식 네이버파이낸셜 법무정책실장은 “전금법 개정안에서는 합병이나 영업양수도 시 금융위로부터 반드시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고 안전성 의무가 강화되는 등 전반적으로 더 많은 의무를 지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종지사 신설에 대해서는 “사용자 예치금을 대출 업무 등에 활용할 수 없고, 관련 기관에 예치해야 하므로 운영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라고 했다. 은행처럼 고객의 예금을 대출로 활용하는 등 ‘여·수신’ 업무를 할 수 없으니 기능은 늘었으나 수익모델은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금융사들과 노조는 네이버파이낸셜 등이 사실상 금융사 기능을 하게 되는 만큼 금융권과 같은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경기 성남시 정자동에 위치한 네이버 사옥. [뉴스1]
개정은 필연…정치 접근 곤란
네이버는 종지사 라이선스 취득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도 내놨다. 네이버파이낸셜은 종지사 신설 방안이 네이버에 특혜를 주는 것이라는 지적과 관련해 “종합지급결제사업자 도입과 관련해 어떠한 관련성도 없으며, 심지어 라이선스 취득을 검토한 바도 없다”고 일축했다.업계에서는 세계적 흐름이나 이용자 편의성 증대 등을 고려했을 때 전금법 개정이 필연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한 빅테크 업계 관계자는 “IT기업과 금융사들이 경쟁을 통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정치적 접근보다는 금융산업의 발전을 위한 길을 함께 찾아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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