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의 부동산 대출 경쟁이 한국 경제의 ‘화약고’ 됐다
- 2009년 6월까지 만기도래하는 은행권 외채 800억달러
- 건설경기 부양책은 21세기 경제에는 효과 없다
- 일본, 거품 만들어 거품 붕괴 막으려다 장기 불황 빠졌다
- ‘콘크리트 경제’로는 미래 없다, 사람에 투자하라
한국 경제가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와 맞물려 빠르게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내 부동산 거품이 급속히 붕괴하고 있고, 환율은 정부 개입에도 불구하고 폭등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인하했지만 시중 금리는 여전히 높은 상태다. 주가는 2007년 고점 대비 반토막 수준까지 내려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규 아파트 미분양 물량이 증가하면서 건설업계 위기론이 고개를 든 지 오래다.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이들에게 돈을 빌려줘야 할 금융기관마저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자영업자가 줄줄이 무너지고 있고, 저소득층은 저소득층대로 고통이 커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 현상을 각각 독립돼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현상의 근저에는 부동산 거품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해야 현재의 위기 구조를 인식할 수 있고, 그에 맞는 해법도 찾을 수 있다.
‘원초적’ 악성 종양 부동산 거품
이 같은 위기 구조의 한가운데에는 가계가 2000년대 이후 한껏 부푼 부동산 거품에 취해 엄청나게 늘린 부동산 담보 대출이 있다. 아울러 프로젝트 파이낸싱(PF·Project Financing)을 포함한 건설업계에 대한 과다 대출도 있다. 이런 과다 대출은 지금 한국 경제의 ‘화약고’가 돼 있다.
현재 부동산 거품이 급속히 꺼지면서 화약고로 이어지는 여러 가닥의 도화선이 빠르게 타들어가고 있다. 이런 불길은 그동안 부동산 거품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에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 가 덮쳐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 이에 따라 화약고의 폭발력이 강해질 소지도 크다.
부동산 거품이 어떻게 한국 경제의 위기를 초래하고 이를 심화시킬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부동산 거품은 생겨날 때부터 국민경제라는 신체에 기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다만 이 악성 종양은 착시 현상 때문에 일정한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오히려 자산효과(wealth effect)와 건설경기 붐 등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부동산 거품의 폐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만 설명해도 그 폐해를 짐작할 수 있다. 가령 그동안 전문가들이 한국 경제의 핵심 문제로 꼽았던 내수 침체, 실업률 증가, 양극화 확대, 고비용 구조 등은 상당 부분 부동산 거품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우선,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가계의 소비 여력이 급격히 위축됐다. 이는 집 값 등 자산 가격의 상승으로 생겨나는 자산 효과를 훨씬 압도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주택 가격이 상승하면 그만큼 무주택 서민의 실질 소득이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한다. 아울러 주거비 부담이 커져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로 이어진다.
부동산 거품은 이처럼 그 자체도 문제지만 그것이 터질 때는 경제에 더 큰 충격을 몰고 온다. 당장 2008년 하반기 이후 계속되는 시중금리 상승이나 환율 폭등도 부동산 거품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우선, 금리 문제부터 살펴보자. 현재의 부동산 거품이 생긴 것은 금융권의 과다 대출 경쟁 때문이다. 특히 2002년부터 금융권은 부동산 담보 대출에 경쟁적으로 나섰다. 반면 저금리 상황이 지속되면서 시중 자금은 은행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은행 몸집 불리기의 부작용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예대율이다. 예대율이란 총예금에서 차지하는 총대출 비율을 말한다. 은행은 예금자의 지급 요청 등에 응할 여유를 갖기 위해 ‘예금 범위 내 대출’이라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이런 점에서 예대율은 일반적으로 85% 이내가 적절하다.
그러나 2004년부터 국내 은행의 예대율(양도성 예금증서 제외)이 100%를 초과하기 시작했다. 예대율은 이후 가파르게 상승해 2007년 하반기부터 최근까지는 130~140%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과다 대출로 자금난을 겪었던 1980년대 말의 일본 은행과 너무나 닮았다.
예대율이 높다는 것은 시중은행이 부족한 대출 재원을 예금보다 조달 비용이 비싼 양도성 예금증서(CD)나 은행채 등으로 채웠다는 뜻이다. 또 외화 차입도 늘렸음을 말한다. 은행채 발행잔고는 2005년 초 50조원 미만에서 2008년 10월 말 139조원으로 무려 90조원 가까이 늘어났다. 2006~2007년에 월 평균 2조8000억원가량을 순발행한 탓이다.
은행이 시중 유동성을 공급하기는커녕 이런 식으로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다보니 시중금리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2007년 말 이후 주택 담보대출의 95%가량을 차지하는 CD연동 대출 금리가 급등했다. 당시 변동금리는 최고 8.5%선, 고정 금리형은 최고 10%선에 육박했다.
이 같은 시중 금리 상승세는 한국은행이 2008년 9월 이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1.25% 포인트 인하하면서 주춤한 상태다. 그렇다고 시중 금리가 기준금리가 낮아진 만큼 빠지지도 않고 있다. 한마디로 기준금리와 시중금리가 따로 노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하반기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치자 국내 은행이 외화를 차입하기 어려워졌다. 외화 유동성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여기에 국내에서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자 국내 은행도 신용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면서 기존 대출을 회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정부는 ‘11·4 대책’을 통해 서울 강남 3구를 제외한 부동산 투기지역과 토지거래허가구역 등을 해제했다. 사실상 대출 규제 완화 조치인 셈이다. 그러나 국내 금융기관은 과거처럼 적극적인 부동산 담보 대출에 나서지 않고 있다.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바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은행권의 과다 대출은 금리 상승만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은행권이 원화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면서 기업 또한 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 중소기업은 은행이 대출을 해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기업보다 신용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 은행이 은행채를 남발하자 평소 회사채를 소화하던 기관투자자가 이쪽으로 몰린 탓이다.
은행은 그동안 만기가 1년 이상 7년 이하의 은행채를 주로 발행했다. 예컨대 2006년에 만기 2~3년짜리 은행채를 발행했다면 2008년부터 2009년에 걸쳐 상환 기간이 도래한다. 이런 식으로 은행채의 상환 잔존 기간별 상환도래 금액(도표1 참조)을 살펴보면, 2008년 10월 현재 1년 이내에 상환해야 하는 금액이 55조9000억원으로 전체 발행잔고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또 1~2년 사이에 상환해야 하는 금액도 41조6000억원으로 30%를 차지하고 있다. 2년 이내에 상환해야 하는 은행채가 총 97조5000억원으로 전체 발행잔고의 70%에 달한다는 얘기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차환 발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용위기가 전세계로 퍼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도표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2008년부터 전월대비 은행채 순발행(증감)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은행채 차환 발행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만기가 도래한 은행채의 경우 원리금을 상환해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은행이 극심한 원화 유동성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물론 CD와 단기 외화차입 상환도 마찬가지로 원화 유동성 부족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은행채 금리도 폭등하고 있다. 이는 은행채에 대한 투자자들의 수요가 급감해 수급 균형이 무너진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들은 막대한 은행채 상환을 위해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급기야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나서서 원화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해결하기는 힘들 것이다. 은행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예금 금리를 올려 시중자금을 끌어오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은행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뻔하다. 부동산 담보 대출이나 기업 대출 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경우 부동산 가격은 더 급속히 하락할 수밖에 없다. 또 대출을 회수당한 기업은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에 빠져 도산할 소지가 크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상황이 가속화하고 있다.
달러 수요 감당할 수 있나
현재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하는 환율 폭등 문제는 또 어떤가. 달러 사재기와 환(煥) 투기 등의 요인이 일부 있을 수 있지만, 펀더멘털 측면에서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는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외국인 투자자의 주식 순매도로 인한 외환 수요다. 외국인 투자자의 주식 순매도 규모는 2007년 27조2000억원(약 290억달러)에 이어 2008년에도 40조원(약 500억달러)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2008년 들어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된 데다 수출 기업이 달러를 내다 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까지 경상수지 적자폭이 125억달러를 넘었으나 10월과 11월의 경상수지 흑자 전환으로 2008년 적자 규모는 70억달러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환율 폭등으로 외환시장의 최대 공급자이자 수요자인 수출 기업이 환차익을 노리고 달러 공급을 꺼린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수출총액을 약 4400억달러로 볼 때 수출 기업이 결제 대금 가운데 10%만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고 해도 연간 440억달러의 달러 공급이 줄어들게 된다. 2008년 경상수지 적자 추정치 70억달러를 포함하면 연간 약 510억달러의 공급이 줄어드는 셈이다.
셋째, 은행권의 단기 외채 상환을 위한 달러 수요다. 국내 은행(해외 지점 포함)이 2009년 6월까지 상환해야 하는 외채는 800억달러에 달한다. 국내 은행과 외국계 은행 국내 지점을 통한 단기 외화 차입은 부동산 담보 대출 경쟁이 정점에 이른 2006년부터 급증했다.
위의 세 가지 요인을 감안하면 한국의 외환시장은 플로 측면에서 약 1800억달러가 필요한 상태다. 여기에 구체적인 수치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환율 상승에 따른 투기적 가수요까지 포함하면 ‘최악의 경우’2000억달러 안팎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정부의 외환보유고는 지난 11월 말 기준으로 2005억달러까지 내려가 있다. 환매 문제와 투자손실 문제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가용 외환보유고는 한정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뿐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 인도 등에 투자한 민간부문 해외 투자 펀드의 자금 환류도 기대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해외 투자 펀드가 반토막 이하가 됐을 뿐만 아니라 환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부의 시장 개입에도 불구하고 2008년 8월부터 원·달러 환율이 계속 폭등하고 있는 이유다.
문제는 이런 달러 수급 불균형이 앞으로도 계속될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은행권의 달러 수요까지 포함하면 이미 한국 외환시장은 수급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통화 스와프를 통해 300억달러 규모의 긴급 달러자금을 공급하고 수출 대기업에 달러 매각을 강요한다 한들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부동산 거품이 한창일 때 금융권은 과도하게 외화를 차입해 경쟁적으로 부동산 담보 대출에 나섰다. 그러나 글로벌 신용위기 이후 은행이 외화 차입에 어려움을 겪자 환율이 폭등하고 있다. 오늘의 환율 폭등을 부른 원인 제공자는 부동산 거품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환율 폭등으로 경기 침체
사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순매도하는 것도 부동산 버블 붕괴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본국의 금융위기로 투자자들의 환매 요청이 급증하면서 이에 응하려는 목적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환율이 폭등하는 상황에서도 외국인이 강한 매도세를 보이는 것은 부동산 버블 붕괴 충격이 가시화하기 전에 한국 증시를 탈출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2008년 8월부터 본격화된 원·달러 환율 폭등은 경제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환율이 폭등하는 상태에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도 생산을 축소한다. 기존에 확보한 원자재만 활용해 공장을 가동하기 때문이다. 환율이 폭등한 이후엔 원자재를 수입해서 채산성을 맞출 수 없는데, 어떻게 공장을 돌리겠는가.
그나마 아직은 환율 폭등으로 인한 생산 정체 현상이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초부터 기업의 본격적인 생산 정체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 중소기업이 환율 폭등으로 원가 부담을 이기지 못해 생산을 줄이면 대기업도 납품을 받지 못해 가동률을 낮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업 입장에선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분만큼 제품 가격을 올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수출이 둔화되고 내수도 급감하는 상황에서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채산성이 악화돼 도산하는 기업이 줄줄이 나타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원·달러 환율 폭등은 고유가보다도 악성이다. 고유가는 에너지 절감 노력이나 원화 강세로 어느 정도 부담을 상쇄할 수 있다. 또 유가 상승은 원유를 대량 사용하는 기업에 한해 큰 부담이 된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 상승은 금리정책과 마찬가지로 모든 기업에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실물경기 불황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원·달러 환율이 안정돼야 한다.
집값 폭락, 은행 건전성 위협
부동산 버블이 낳은 또 다른 문제는 바로 가계 부채 급증이다. 은행의 무분별한 대출로 금융권 전체의 가계 부채 총액은 2001년 말 342조원에서 2008년 6월 말 660조원으로, 거의 320조원이나 늘었다. 매년 40조~50조원 불어난 셈이다. 증가율(1999~2005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스페인, 호주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이 가운데 부동산 담보 대출은 307조원에 달한다. 중소기업이 운영자금 명목으로 빌리거나 제2 금융권이나 제도권 금융 밖에서 신용대출 명목으로 빌린 위장 대출까지 포함하면 부동산 담보 대출은 400조원을 훌쩍 넘을 것이다.
문제는 부동산 담보 대출 가운데 상당 부분이 부실화할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2006년부터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대출 규제가 도입됐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실제로 2008년 11월 MBC ‘PD수첩’ 팀이 방송 보도를 위해 무작위로 샘플링한 경기 용인 지역 한 아파트 단지 200가구의 평균 대출액은 3억4600만원이나 됐다. 대출을 받지 않은 집은 37가구(18.5%)에 불과했다.
물론 용인의 경우 부동산 투기 붐이 절정이었을 때 대규모 분양이 이뤄졌기 때문에 그 정도가 심한 편이라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가계의 부동산 투자는 용인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만약 가계가 잔뜩 빚을 지고 집을 샀는데, 그 집의 자산가치가 본격적으로 하락한다면 어떻게 될까.
2007년 말 현재 주택을 두 채 이상 소유한 다주택자는 전국적으로 105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평균 4.5채씩 총 477만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2000년대 집값 거품기에 새로 두 채 이상 소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은행 빚을 얻어 집을 장만했어도 집값이 오르는 한 은행 금리를 감당하고도 남는 장사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상당수 집값이 떨어지고 금리가 오르면서 집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잠재적 매수자들은 집값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해 입질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 사고 팔 수 있는 거래 가격을 기준으로 한다면 ‘버블 세븐’ 지역의 경우 고점 대비 30~40% 폭락했다. 다른 지역도 고점 대비 10~20% 하락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다주택자 105만명이 평균 한 채씩만이라도 매물로 내놓는다고 생각해보라. 집값은 폭락에 폭락을 거듭할 것이다. 이 같은 집값 폭락이 장기화할 경우 시중은행의 연체율이 높아지고 부실 자산이 늘어날 소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집값 하락은 ‘대차대조표 불황’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과거 일본에서 벌어졌고,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라는 자산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면 그 자산을 사기 위해 진 부채는 그대로 남는다. 이 때문에 가계 등 경제 주체는 한동안 부채 청산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이 지속된다.
부동산 PF 대출 제2 금융권 위협
이런 소비 위축은 다시 내수 침체와 경기 위축을 불러와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부동산 버블을 만든 주역은 중상류층이었다는 점에서 사태가 심각하다. 집값 하락으로 인한 소비 위축 효과는 주로 저소득층이 가담했던 카드채 버블 사태의 몇 배가 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실제 한 국책연구소는 최근 가계대출의 3분의 2 이상이 부동산 관련 대출이라고 발표했다. 여기에 고소득층일수록 부동산 구입 자금 비중이 높아 70%대에 달한다는 것. 고소득층이 보유한 부동산 자산가치가 급락하고 전반적인 신용 수축이 지속되면 이들의 부채 청산을 통한 불황 충격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밖에 이미 위험수위에 이른 PF대출 부실 문제도 결국 시행사와 주택건설업체들이 부동산 거품에 편승해 무리하게 주택 사업을 벌인 탓이다. PF대출 부실은 저축은행과 보험사 등 제2 금융권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아울러 PF 사업과 연계된 은행의 건전성도 위협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서로 연쇄 반응을 일으켜 한국 경제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 부동산 거품 붕괴의 충격과 폐해는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경제의 위기를 단순히 세계경제 상황 탓으로 돌리는 현 정권의 인식이 얼마나 안이한지 알 수 있다.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졌다고 해도 국내의 부동산 거품이 이렇게 크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 경우 한국 경제는 부동산 거품이 없는 튼튼한 경제 체력을 갖췄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휘청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2부 건설회사 죽어야 한국 경제 산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부동산 거품 붕괴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각종 건설 경기 부양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후 첫 번째 부동산 대책인 8·21대책부터 10년간 500만 호 주택 공급을 천명한 9·19대책, 가계 주거 부담 완화 및 건설부문 유동성 지원 구조조정 방안을 담은 10·21대책, 경제난국 극복 종합대책인 11·3대책에 이르기까지 불과 4개월 만에 직접적인 건설 경기 부양 대책만 네 차례나 발표했다.
이밖에 내용을 뜯어보면 사실상 건설경기 부양 대책인 경우도 많다. 정부가 향후 5년간 56조원을 투입하는 ‘광역 경제권 선도 프로젝트’ 사업이 대표적이다. 56조원의 사업비 가운데 53조원가량을 이미 포화상태인 항만과 공항, 산업단지, 도로 건설 등에 투입한다.
이명박 정부와 여당인 한나라당은 이런 대규모 부양책을 내놓으면서 ‘경기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등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해 경제도 살리면서 결국 그것이 국가경쟁력도 살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 국토 균형발전 측면에서 지역의 대규모 SOC사업을 앞당겨야 한다.”(이명박 대통령, 10월30일)
“아파트가 아닌 지방 SOC 사업 같은 경기 활성화 효과가 큰 사업을 할 것이다. 재정 지출에서 경기 활성화 효과가 제일 큰 것은 역시 건설사업이다.”(박병원 대통령경제수석)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간 교통과 물류시설 등에 투자할 것이다.”(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 11월3일)
과연 이들의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선 먼저 한국 건설산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방법으로는 여러 기준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은 GDP 총량에서 건설업의 비중을 계산해보는 것이다.
건설경기 부양책은 효과 있을까
‘도표2’에서 2007년 기준 한국의 실질 GDP는 798조원이다. 이 가운데 건설업은 52조원을 차지해 6.6%에 달한다. 그런가 하면 취업자 수 면에서도 건설업 취업자는 전체 취업자 2326만명 가운데 185만명으로 8%에 불과하다. 또 2003년 기준 산업연관표에 나타난 건설업의 생산유발 계수나 국산투입 계수는 결코 높지 않다.
생산유발 계수란 최종 수요가 1단위 증가할 경우 이로부터 유발되는 산업별 산출액을 말한다. 건설업의 경우 2.5로, 도소매업 4.09, 음식숙박업 2.9, 운수창고업 4.07, 철강 3.2, 유화제품 4.1 등에 비해 낮다. 또 투입 계수는 각 산업별 생산물 1단위 생산을 위해 투입하는 중간재 투입물 단위를 나타낸다. 이것 역시 건설업이 타 업종에 비해 높다고 할 수 없다.
이번에는 건설경기 부양책이 현실에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살펴보자. 1970, 80년대 개발경제 시대에는 경기침체가 오면 건설경기 부양으로 대응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당시 이런 대응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합리적이었다. 우선, 당시에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건설산업의 GDP 비중이 높았고 산업연관효과와 고용효과도 높았다. 건설업에 투자하면 건설업계 자체뿐만 아니라 관련 자재 생산 및 공급 업체 등 연관 산업 전반에서 매출과 고용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또한 당시에는 각종 SOC가 아직 부족한 상태였다. 따라서 건설경기 부양을 통해 취약한 SOC를 확충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도로, 항만, 공항 등 SOC 확충은 물류 수송의 확대와 물류 비용 절감 등의 형태로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 확충에 기여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건설업말고도 수많은 새로운 산업이 발전했다. 그로 인해 건설업 비중도 크게 낮아졌고, 산업연관 효과도 줄어들었다. 또 입지별로 다르겠지만, 웬만한 SOC 투자는 거의 이뤄진 상태다. 이용률이나 가동률이 낮은 도로나 공항, 산업단지 등이 전국적으로 증가하는 데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개발연대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형 건설업체의 조직 구조와 고용 구조가 변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내세우는 ‘경기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효과도 크게 떨어졌다. 왜 그런지 ‘도표3’을 보자.
우선, 건설업체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비용절감 명목으로 덤프트럭 운전자들과 중장비 인력들을 개인사업자 형태로 분리시켰다. 당시 노조가 빠른 속도로 조직되면서 노조원들의 임금 인상 욕구가 분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시공 인력도 아웃소싱 명목으로 점차 하청업체에 떠넘겨 본사 인력을 줄여나갔다.
이 같은 추세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더욱 심화됐다. 외환위기 이후 대형 건설업체에는 최소한의 관리 및 영업 인력만 남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인력도 상당수 비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런 가운데 개인 사업자가 된 덤프트럭과 중장비 사업자 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에 따라 트럭 운임 및 중장비 단가는 계속 하락했다. 하청업체의 사정도 갈수록 열악해졌고, 시공 인력의 노임 단가도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 이후 덤프 및 레미콘, 중장비 기사와 하청업체 시공 인력 등 소위 현장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실질가격 기준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는 것이 건설현장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돈 구경하기 힘든 건설 현장
이런 구조에서 정부가 경기부양 명목으로 예전처럼 추가경정 예산안 편성 등을 통해 건설사업 재정 확대를 하면 어떻게 될까. 답은 뻔하다. 건설사업 예산은 대부분 공사를 수주한 대형 원도급자가 차지해버리고 밑바닥으로는 거의 내려가지 않는다.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이 2002년 발주해 2004년까지 진행된 경기 성남~장호원 도로건설 공사 2공구 공사 현장 사례를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도표4’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공사에서 A건설 등 3개 대형 건설업체 컨소시엄은 총공사비(정부 예정가격은 3032억원) 2853억원에 수주해 약 1970억원어치의 공사 물량을 그 60.5% 수준인 1190억원에 하도급을 주었다. 간접공사비와 자재비 등의 명목으로 챙긴 이익만 해도 883억원(2853억-1970억)이다. 이에 더해 직접공사비 하도급 과정에서 780억원(1970억-1190억)을 추가로 챙겼다.
A사 등은 간접 공사비와 자재비만으로 처음부터 총공사비에서 30.9%가량을 챙긴 다음 직접공사비 하도급 과정에서 추가로 27.3%가량을 챙긴다. 총공사비의 58.2%가량이 A사 등 대형 원도급업체의 이익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에 대해 대형 건설업체들은 직원을 투입해 공사 전반을 관리하는 비용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각종 관리 비용은 이미 간접공사비에 포함돼 있다. 따라서 단순히 공사물량을 넘겨주는 브로커 역할을 하는 하도급 발주 과정에서 다시 엄청난 차익을 챙기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국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을 투입해도 대형 건설업체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된다. 정부가 기대한 효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위의 예에서 경기 부양 효과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건설경기 부양 예산 2853억원의 58.2%가 자재비/인건비 883억원과 마진 780억원의 형태로 대형 원도급업체에 돌아간다. 원도급업체가 차지하는 이 돈은 사업관리 및 영업직원들의 월급과 음성적인 로비자금까지 포함된 활동비, 자재비 등으로 나가지만 대부분 이익으로 사내 유보된다.
문제는 이 자금이 대부분 향후 이들 건설업체가 주택사업 등을 위해 택지를 매입하는 데 들어간다는 점이다. 결국 정부의 기대와 달리 건설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자금이 땅값을 부추기는 데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지금처럼 건설업체가 자금난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는 경기부양 예산이 이들의 부채 상환에 사용될 소지가 크다.
하도급 업체에 지급되는 1190억원(41.8%)도 3차, 4차, 5차 다단계 하도급 과정을 통해 중간 마진 형태로 상당 부분 사라진다. 이에 따라 최종 시공 인력과 덤프 트럭 및 중장비 기사 등에게 돌아가는 금액은 당초 건설경기 부양 예산의 30%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가 건설경기 부양 명목으로 아무리 돈을 풀어도 건설사업 현장에서는 돈 구경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더구나 시공 인력 가운데 30~40%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임금을 상당 부분 본국으로 송금한다. 국내 소비 진작 효과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위의 사례에서 원도급자가 챙기는 마진이 큰 이유는 턴키입찰(설계시공 일괄 입찰) 방식으로 공사를 발주하기 때문이다. 이 방식에선 도급순위 상위의 대형 건설업체가 가격 담합을 통해 얼마든지 폭리를 취할 수 있다. 물론 평균 낙찰가가 가장 낮은 최저가 낙찰제의 경우에도 원도급자는 20~30% 이상 남기는 게 보통이다.
일본이 거품 붕괴 막지 못한 이유
앞에서 말한 대로 외환위기 이후 건설업계는 사업구조 및 고용구조를 크게 바꿨다. 이 때문에 건설토목 사업을 통한 고용 창출 및 내수 진작 효과는 과거에 비해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건설경기를 부양한다고 해서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이제 일본 사례를 통해 부동산 거품이 붕괴할 때 정부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의 경우 2007년 하반기 서브 프라임론(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사태가 본격화한 이후 급격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 미국 정부의 천문학적인 경기부양책과 공적자금 투입, 그리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기준금리 인하 등도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화하자 많은 사람이 미국은 일본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폴슨 재무장관이나 버냉키 FRB 의장 등도 가장 먼저 일본의 거품 붕괴 사례를 주시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도 현재 미국에서는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 거품 붕괴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 재현되고 있다.
‘도표5’에서 보듯 일본 정부는 부동산 거품 붕괴를 막기 위해 1992~1995년 무려 66조9000억엔에 달하는 각종 경기부양 대책을 쏟아냈다. 그밖에 2조엔씩 세 차례 보완 대책이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총 재정 투입은 73조엔에 달한다. 이는 1994년 일본 정부의 일반 예산 규모와 맞먹는 액수였다. 이처럼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지만 결국에는 거품 붕괴를 막지 못했다. 이 기간 일본 경제는 0%대의 실질성장률에 그쳤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중 당시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의 건설족(토건족) 의원의 요구에 따라 불요불급한 각종 건설·토건사업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다는 점이 첫손에 꼽힌다. 말하자면 부동산 거품 붕괴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거품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당시엔 뚜렷한 계획도 없이 육지와 무인도를 연결하는 대교를 건설했다. 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산을 마구 훼손해 도로를 건설했지만 나중에 겨우 산토끼와 노루만 지나다닌다는 비판도 나왔다. 조그만 시골길과 연결되는 거대한 고가도로도 지었다. 그러나 이런 퍼주기식 경기부양 대책을 쏟아냈지만 결국 거품이 붕괴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일본 정부가 건설경기 부양책을 폄으로써 사실상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부실 건설업체가 연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일본 건설업체는 거품 붕괴 초기의 줄도산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까지 그 수가 오히려 늘어났다.
경제전문가 사이토 세이치로는 저서 ‘일본경제 왜 무너졌나’(들녘, 1998년)에서 건설 토목산업 종사자 수는 1991년 604만명에서 1996년 676만명으로 오히려 72만명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반면 이 기간에 제조업 종사자 수는 1563만명에서 1450만명으로 113만명이나 줄어들었다. 또한 같은 기간 건설·토목 관련 업체 수는 60만2000개에서 64만7000개로 약 4만5000개나 늘었다.
또 일본 전문가인 알렉스 커 역시 저서 ‘치명적인 일본(Dogs and Demons)’(홍익출판사, 2001년)에서 1994년 일본의 콘크리트 제조량은 모두 9160만t으로 7790만t인 미국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국토의 단위 면적당 미국에 비해 약 30배나 많은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이다.
부동산 거품이 생기면 당연히 건설 붐도 일고, 반대로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 건설 경기도 죽게 마련이다. 이에 따라 건설업체 수가 감소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정부의 막대한 공공사업 확대에 힘입어 거품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건설업체가 늘어난 것이다.
이들 건설업체는 상당수 부실 업체였다. 구조조정이 원활히 이뤄졌다면 이들 업체는 인수합병되거나 퇴출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 예산이라는 인공호흡기가 있었기 때문에 연명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저가 입찰 등 시장 질서를 어지럽힘으로써 건강한 기업의 발목까지 잡았다.
세이치로씨는 이를 두고 “1990년대 일본의 경기부양책은 건설업의 보호와 지원에 도움이 되었을 뿐, 경기의 자율적인 힘을 회복시킨다는 케인스 이론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평가했다. 세이치로씨는 이런 건설경기 부양 대책은 일시적인 효과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폐해는 일본 경제에 오래도록 악영향을 끼쳤다. 우선 적자 재정 편성이 계속되고 국채 잔고가 누적되면서 재정 건정성이 위협받았다. 초저금리 정책을 펴고 재정 지출을 확대함으로써 격렬한 통증은 숨길 수 있었지만 일본 경제의 병인(病因)이 모호해져 병의 원인 진단에 오류가 발생했다. 또 건설사의 부실은 수면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심해졌고, 결국 1998년부터 금융권의 부실 증가로 이어져 일본의 장기 침체를 불러왔다.
일본 정부는 1996년 실질 GDP 성장률이 3.5%로 올라서자 1996~97년에는 경기부양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도표 5 참조). 그동안 건설경기 부양으로 국가 채무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1997년부터 건설업체와 금융기관이 줄도산하는 등 2차 위기를 맞게 됐다.
‘도표6’을 보면 1990년대 후반 도산 기업 수와 도산 기업의 부채 총액이 급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건설업의 도산 급증으로 실직, 감봉, 장기휴가 등 근로자 피해도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롱거리 된 일본의 주가 부양
일본 정부는 1990년대 부동산 거품 붕괴를 막기 위해 금리 인하와 주가부양 대책도 함께 동원했다. 일본 대장성은 우정연금과 국민연금 등을 통해 1992년 하반기에만 약 2조8200억엔을 주식시장에 투입해 주가를 떠받쳤다. 이후 공적 연금은 1995년까지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주식시장에서 순매수했다.
국제 금융계에서는 당시 일본의 이 같은 주가 부양 대책을 두고 유엔 평화유지군의 머릿글자인 PKO(Peace-Keeping Operation)에 빗대 PKO(Price-Keeping Operation)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는 정부의 역할을 주식시장의 건전한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한정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당시 특정 목표주가를 정해 투자를 직접 결정하고 집행함으로써 조롱 대상이 된 것이다.
또 일본 대장성은 일본은행에 수시로 압력을 가해 1990년 8월까지 6%였던 기준금리를 이듬해 4.5%로 떨어뜨렸다. 1994년엔 1.75% 수준으로 낮췄다. 하지만 건설 및 부동산 업계는 이런 금리 인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은행은 이미 부동산 및 건설업계의 대규모 부실채권을 잔뜩 떠안고 있는 상태였는 데다 신용경색까지 겹쳐 추가 대출을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부동산시장의 투자자가 모두 거품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한다고 해서 부동산 쪽으로 눈길을 돌릴 이유가 없었다. 부동산 가격이 다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다.
요약하자면 일본 정부는 1990년대 부동산 거품이 붕괴할 때 공공건설 사업을 중심으로 한 막대한 건설경기 부양책(재정정책)과 금리 인하(통화정책), 주가부양책(공적 연금 동원) 등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버블 붕괴를 막지 못했다. 오히려 과감한 구조조정 이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재정 및 통화정책 수단을 일찌감치 소진해버렸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1990년대 일본은 엔고(高)가 급속히 진행됐다는 점이다.
▼ 제3부 거품 붕괴 이후 한국 경제의 선택
지금 한국 정부는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는 가운데 1990년대 일본 정부가 하던 정책을 따라 하고 있다. 재정 확대를 통한 건설경기 부양책, 대통령까지 나선 금리 인하 요구, 연금을 동원한 주식 매입과 한국은행의 은행채 매입 등이 그것이다. 바로 일본이 장기불황으로 치달았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정책 실패가 계속되고 국가적 위기가 반복되는 근본 원인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미 외환위기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료 및 정치권의 무능과 무지가 드러났다. 이들은 급변하는 21세기 세계경제 환경 속에서 한국 경제를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발 밑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2008년 10월30일 일본 정부가 내놓은 긴급 경기부양 대책인 ‘생활대책’이 참고가 될 수 있다(도표7 참조).
여기에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생활지원 정액 급부금(가칭) 실시 및 재계에 임금인상 요청, 고용보험료 인하, 전기 및 가스요금의 2009년1~3월 인상폭 축소, 비정규 노동자의 고용안정 대책 강화, 중소기업 등 고용 유지 지원 대책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중소기업과 서민, 저소득층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건설·토목사업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과거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정부의 진정한 역할이 뭔지를 보여주는 대책이 아닐 수 없다.
자산시장 가격 조정은 자산시장에 맡기는 것이 최상이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가격이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는 법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하지 않던가.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근 미국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서 자산가격 하락을 막으려 한들 ‘밑 빠진 독에 돈 붓기’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중장기적으로 정부는 개발경제 시대 때의 경제 운용 방식을 바꿔야 한다. 가계 자산의 80% 이상이 부동산에 몰려 있는 경제는 지속 가능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비용 대비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벌이는 개발사업으로는 선진 경제를 만들 수 없다.
21세기는 첨단 기술경제 시대다. 지식정보화 시대이고, 창조경제 시대다. 당연히 한정된 국가의 자원을 이런 분야에 우선적으로 배분해야 한다. 첨단 기술을 고안하고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며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주입식 교육이 아닌, 창조적 교육 프로그램으로 지식과 정보를 생산·가공하고,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
결국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한국 경제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게임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토건국가적 개발사업을 자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은 각종 건설·토목사업에 돈을 쏟아 붓다 오히려 ‘잃어버린 10년’을 만든 일본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콘크리트에 투자하는 경제는 미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