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있는 백신 생산 설비 활용…추가 생산 추진
국내 제약사, 내년 상반기 남반구 수출용 백신 생산 단계…확보 방안 모색
올해 추가된 독감 무료 접종 대상 505만 명…우선순위 재검토
“백신 관리는 예방접종 사업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부적절한 보관•수송으로 인하여 역가(力價•세기)가 떨어진 백신을 접종한 환자는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는 질환에 대하여 완벽하게 보호되지 못할 수 있으며, 부적절하게 보관•수송된 백신 폐기관련 비용은 예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백신 무료접종 중단 사태를 보며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질병관리청(질병청)은 21일 오후 한 제보자로부터 독감 백신이 유통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됐다는 신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정은경 질병청장은 22일 언론 브리핑에서 “현재까지 확인한 바로는 백신을 운송하는 냉장차에서 백신을 지역별로 재배분하는 도중 일부가 상온에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조사 뒤 결과를 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독감백신 일부, 유통 과정에서 상온 노출
더 큰 문제는 질병청이 이 사실을 공개한 뒤 많은 의사가 무료 접종용으로 공급된 독감백신 상온 노출 사례를 제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사들만 가입할 수 있는 회원제 온라인사이트 메디게이트에는 22일 관련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회원이 “21일 받은 독감백신이 종이상자에 담겨 있었다. 아이스팩이 들어 있지 않았고 냉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내용의 글을 쓰자 그 아래로 “나도 종이상자에 담긴 백신을 받았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또 다른 의사 커뮤니티에도 “병원 조무사에게 물어보니 누가 독감백신을 택배처럼 데스크 위에 두고 가 백신인지도 몰랐다더라”라는 글이 등록됐다. 전문가들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백신을 수송할 때는 혹시 모를 변질 위험을 피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냉장차에서 병원 냉장고로 옮기는 짧은 시간조차 단축하려고 애쓰는 게 보통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믿기 힘들다”고 탄식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독감백신이 상온에 노출된다 해도 곧 인체에 해를 끼칠 만큼 변질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독감백신은 바이러스를 활동할 수 없도록 처리해 만든, 이른바 ‘사(死)백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가 저하라고 한다. 정 교수는 “각 백신마다 적정 보관 온도가 있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효과가 떨어진다”라며 “효과 없는 이른바 ‘물백신’은 접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지적했다. 김석찬 서울성모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도 “효과가 떨어진 독감백신을 유통할 경우, 그것을 맞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껴 독감 예방조치를 소홀히 할 수 있다. 그 경우 오히려 방역에 방해가 된다”며 “독감백신 효능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올바른 대처가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500만 명분 백신 폐기, 최악의 시나리오
정부는 올 겨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독감이 동시 유행할 경우 방역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보고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국민 1844만 명(만 6개월~18세, 만 62세 이상, 임신부 등)에게 독감백신을 무료 접종해주기로 한 상태였다. 우리 국민의 36% 수준이다. 김석찬 교수는 이런 결정의 배경을 “독감과 코로나19의 초기 증상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년 상황을 보면 10월까지는 국내에 발열 및 호흡기 증상 환자가 많지 않다. 관련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코로나19 진단검사를 실시해 병을 조기 발견, 관리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늦가을 들어 독감이 확산하면 이런 식의 방역이 어려워질 수 있다. 김석찬 교수는 “독감이 통제되지 않으면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코로나19 진단검사에 투여돼 의료체계에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이를 막고자 전문가들은 일찍부터 “건강한 사람도 올해는 독감백신을 맞는 게 좋다”고 강조해왔다. 정부 또한 무료 접종 대상을 예년보다 늘렸다. 이들에게 사용할 독감백신 가운데 585만 명분은 지방자치단체 등이 자체 확보했다. 그 외 1259만 명분은 한 회사(신성약품)가 독점 공급(확보 및 유통)을 맡았다. 바로 이 업체의 백신 배달 과정에서 상온 노출 사례가 확인된 것이다.
보건당국은 신성약품이 21일까지 전국 보건소 및 병•의원에 독감백신 약 500만 명분을 공급했다고 밝혔다. 현재 이 물량 전체의 접종이 중단된 상황이다. 올해 국내에 공급된 독감백신 총량(2964만 명분)의 약 17%, 공공접종분의 약 27%에 해당한다.
국내 백신수급은 크게 △백신 제조 및 수입 △백신 검정 △백신 유통 △백신 접종 등 네 단계로 나뉜다. 백신 성능 검증은 식약처, 유통 및 접종 관리는 질병청이 담당한다. 두 기관은 이번 ‘독감백신 상온 노출’ 사태 발생 후 공동으로 조사단을 구성해 백신 품질 확인 및 유통과정 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정은경 질병청장은 “최대 2주 안에 결과를 알리겠다”고 공언했다.
관건은 문제가 된 백신 500만 명분 가운데 얼마만큼이 폐기 운명을 맞느냐다. 현재로서는 전량 사용불가 판정을 받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정기석 교수는 “실온에 방치됐던 우유를 마시는 것도 꺼려지지 않나”라며 “상온 노출이 확인된 백신을 사용하는 게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의원급 의료기관을 운영하는 의사 단체인 대한개원의협의회도 23일 성명을 내고 상온 노출 백신 전량 폐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김우주 고려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독감백신 500만 명분이 갑자기 사라질 경우 정부가 세운 올 겨울 방역계획이 흔들릴 수 있다. 질병청은 지금 백신 효능과 안전성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최악의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비상계획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첫째로 검토할 수 있는 것은 백신 추가생산이다. 김석찬 교수는 “국내에는 GC녹십자, SK바이오사이언스 등 세계적으로 품질력을 인정받는 백신 제조사가 다수 있다”며 “이들을 활용할 방안을 찾아봐야 한다”고 밝혔다.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9월 초 국민의힘이 전국민 무료 독감 예방접종 실시를 제안했을 때 정부와 업계는 “독감백신 추가 생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시기를 놓쳤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백신 개발 및 생산에 최대 6개월이 걸린다고 말한다.
첫째 방안 ; 국내 백신 생산설비 활용, 추가 생산 추진
독감백신 무료 접종이 중단된 9월 22일 오후 광주 북구 한 정형외과에서 독감 예방접종 일시중단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뉴스1]
계절이 북반구와 반대인 남반구의 독감백신 생산 일정은 그 뒤에 시작된다. WHO가 9월쯤 다음해 남반구에 유행할 독감 바이러스 유형을 공개하면 이듬해 3월쯤 남반구용 백신 공급이 시작되는 식이다. 이 시간표에 따르면 현재 북반구 백신 생산 일정은 마감됐다. 백신 제조사들도 다음 행보에 분주하다. 매년 남반구에 막대한 물량의 독감백신을 수출하는 GC녹십자는 이미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는 글로벌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 등과 코로나19 백신 위탁생산 계약을 맺어 관련 준비에 한창이다. 물리적으로 독감백신 추가 생산 여력을 찾기 어려운 게 현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금은 비상 상황인 만큼 가능한 모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백신 제조사들이 추가 생산에 난색을 표했던 9월 초는 독감백신 500만 명분 폐기 가능성이 제기되기 전이다. 당시엔 국내에 독감백신이 충분히 확보돼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였다.
우리나라에서 독감이 보통 11월 중순 확산하기 시작해 길게는 이듬해 초여름까지 유행한다는 점도 ‘백신 추가 생산’ 검토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제시된다. 보건당국은 매년 인구 1000명당 독감 의심환자가 일정 수준 이상 발생하면 ‘독감 유행주의보’(독감주의보)를 내린다(기준 인원은 해마다 다소 바뀐다). 지난해에는 11월 15일 독감주의보를 발령해 올 3월 27일 해제했다. 2016년에는 12월 8일 발령됐던 독감주의보가 이듬해 6월 1일 풀렸다. 정기석 교수는 “올 겨울 독감이 어느 정도 규모로, 어느 정도 기간 동안 유행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독감백신 500만 명분이 전량 폐기될 경우 지금이라도 추가 생산을 시작해 늦게나마 대중에게 공급하는 게 필요한 일일지 보건당국이 검토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우주 교수는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 GC녹십자가 7월 백신 개발에 본격 착수해 10월 품목허가를 받은 일을 언급하며 “지금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고려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신종플루는 그해 4월 멕시코에서 처음 발견된 뒤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5월 2일 국내 첫 확진자가 나왔고, 6월 11일 WHO가 팬데믹을 선언했다. 당시 국내에는 백신 제조업체가 없고 해외 제품 수입도 무산된 터였다. 독감 유행철을 앞두고 큰 혼란이 우려됐으나 GC녹십자가 단기간에 백신 개발에 성공하며 상황이 안정됐다.
둘째 방안 ; 내년 남반구 수출용 백신 확보 방안 모색
다시 시계 바늘을 2009년으로 돌려보자. 신종플루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던 그해 8월, 이종구 당시 질병관리본부장은 유럽 출장을 떠났다. GSK, 사노피 등 글로벌 제약사 본사를 방문해 백신을 확보해보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이 백신 쟁탈전을 벌이는 팬데믹 상황에서 이 시도는 끝내 실패했다.전문가들은 “국내에 유수의 백신 제조사가 생긴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제는 세계 각국이 우수한 한국 백신을 확보하고자 경쟁한다. GC녹십자는 2012년부터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 남반구 국가에 독감백신을 수출하고 있고, 해당 지역에 독감백신을 공급하는 국제기구 범미보건기구(PAHO) 입찰에서 6년 연속 1위를 할 만큼 인기가 높다. 정기석 교수는 “지금도 국내 백신 제조사가 내년 남반구 수출을 목표로 상당량의 독감백신 생산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그 물량 일부를 위약금을 주고라도 우리 쪽으로 끌어올 수 있을지 검토해볼 만하다”고 밝혔다.
셋째 방안 ; 민간 접종분 일부 공공물량 전환
7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제약사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 임상시험에 참여한 여성이 백신 후보물질을 투여받고 있다. [뉴시스]
그러나 이 경우 오히려 국민 보건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우주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의 거의 전부는 기저질환자다. 암, 당뇨, 심혈관질환 등을 가진 사람은 코로나19에 감염될 경우 위험이 크다. 그런데 현재 기저질환이 있는 20~50대는 정부 무료접종 대상에서 빠져 있다. 일선 병원에서 자비로 독감 접종을 받아야 하는데, 민간 물량을 지나치게 줄이면 여기서 구멍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올해 새로 독감백신 무료접종 대상에 추가된 만 13~18세(285만 명), 만 62~64세(220만 명) 인구를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이들 수를 합치면 505만 명이 된다. 김석찬 교수는 “백신 추가 생산, 해외 수출 물량 확보, 무료 접종대상 조정 등 어느 것 하나 쉽게 정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게 안타깝지만, 방역당국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정책적 판단을 시작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코로나19 백신 개발 전, 백신 유통체계 점검 필수
김우주 교수는 “이번 일을 계기로 국내 백신 유통 체계 전반을 점검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그는 “이번에 방역당국은 백신 유통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선제적으로 적발하지 못했다. 백신을 상온에 노출한 업체가 스스로 질병청에 잘못을 신고한 것도 아니다. 관리감독의 사각지대에서 아무도 모른 채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이 제보를 통해 뒤늦게 알려진 것”이라며 “그로 인해 백신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무너졌다”고 질타했다. 이미 각종 온라인 사이트 등에는 “이런 상황에서 백신을 맞아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넘쳐나고 있다. 김우주 교수는 “감염병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려면 백신 접종이 필수적이다. 적어도 코로나19 백신이 생산돼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백신 유통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현재 미국 바이오기업 모더나가 개발하고 있는 코로나19 백신의 경우 영하 20도 환경에서 유통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 후보물질은 영하 70도 보관 환경을 요구한다. 유통 과정에서 온도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코로나19 예방 효과가 떨어지는 등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다.